541–549
첫 번째 대유행
동로마와 사산 제국을 덮쳤다. 황제의 이름을 따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 부른다. 542년 봄 콘스탄티노플에 닿은 뒤 항구를 타고 지중해를 한 바퀴 돌았다. 사망자 추정은 6세기 한 번의 유행만 세면 2,500만 명, 두 세기에 걸친 재발까지 세면 5,000만 명이다.
194X년 · 프랑스령 알제리 오랑
무대는 알제리의 항구 도시 오랑, 때는 「194X년」이다. 그때 알제리는 프랑스 땅이었고, 프랑스 본토는 독일에 점령돼 있었고, 페스트를 확실히 고치는 약은 아직 없었다. 이 페이지는 그 배경 — 도시와 식민지, 병과 의학, 역병을 가둬 온 역사, 점령기의 프랑스 — 만 모았다. 줄거리·결말은 없다.
이 소설을 따라가는 데 필요한 배경을 여덟 가지로 추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각 장에 있다.
오랑은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둘째 도시이고, 바다 건너 마르세유와 마주 본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를 쳐들어갔고, 1848년부터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의 일부(세 개의 도(道))로 다뤘다. 그래서 오랑은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였다. 시청·대로·카페는 프랑스식이고, 날씨는 비가 적고 덥다.
같은 도시에 살아도 법적 신분이 달랐다. 유럽계 주민은 프랑스 시민이었고 그중 3분의 2쯤이 바다 건너 가까운 에스파냐 출신이었다. 유대계는 1870년 법령으로 시민이 됐다. 알제리 전체로는 다수였던 아랍·베르베르계 무슬림은 「신민」으로, 시민권 없이 따로 다스려졌다.
1940년 7월, 오랑 옆 군항에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함대를 포격했다. 어제의 동맹이었지만, 그 함대가 독일 손에 들어갈까 두려워서였다. 같은 해 비시 정부는 알제리 유대인의 시민권을 빼앗았다. 1942년 11월에는 연합군이 오랑에 상륙했고, 본토와 알제리 사이의 길이 끊겼다.
페스트균은 쥐와 그 몸의 벼룩 사이를 돈다. 균이 벼룩의 목을 막으면 굶주린 벼룩이 더 자주 물며 균을 밀어 넣는다. 쥐가 떼로 죽어 숙주가 사라지면 벼룩은 사람에게 옮겨 온다. 그리고 쥐는 배의 짐 속에 숨어 바다를 건넌다 — 페스트가 늘 항구로 들어온 이유다.
1940년대의 의사는 페스트가 무엇인지 알았다. 손에는 말의 피로 만든 혈청, 예방 백신, 1930년대에 나온 설파제가 있었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페니실린은 페스트균에 잘 듣지 않았다. 균을 죽이는 스트렙토마이신은 1943년에 발견됐고, 페스트 환자에게 쓴 것은 1947년부터다.
페스트는 세 번 세계를 돌았다. 14세기의 유행을 한국어로 「흑사병」이라 부른다. 프랑스의 마지막 대유행은 1720년 마르세유다. 검역 제도가 있었는데도, 비단과 면화를 팔아야 했던 상인들의 압력으로 검역이 풀렸고 시내 인구 절반이 넘게 죽었다.
병에 걸렸는지 아직 모르는 사람을 떼어 두는 것이 검역이다. 1448년 베네치아가 그 기간을 40일로 정했고, 이탈리아어 「40」이 영어 quarantine이 됐다. 선페스트는 감염에서 죽음까지 37일쯤 걸린다고 추정되니, 40일이면 배 안 사람들이 건강한지 가려낼 수 있었다. 지역 전체를 막는 선은 봉쇄선(코르동 사니테르)이라 부른다.
1940년 휴전으로 프랑스는 약 1,200km의 경계선으로 갈렸다. 선을 넘으려면 통행증이 있어야 했고, 처음 몇 달은 편지도 오가지 못했다. 그 뒤로도 문장이 미리 인쇄된 엽서만 허락됐다. 이 점령에 맞선 사람들이 레지스탕스이고, 카뮈는 지하신문 『콩바』에서 일했다. 이 책은 해방 3년 뒤인 1947년에 나왔다.
한국 독자에게 이 배경은 낯설지 않다. 2015년 메르스 때 한국에서는 확진자 186명 가운데 38명이 숨졌고 1만 6,693명이 격리됐다. 2020년 코로나19 때는 자가격리와 입국자 격리가 일상이 됐다. 06장이 다루는 검역·격리·봉쇄는 그 낱말들의 먼 조상이다. 한국어는 둘을 흔히 「격리」 하나로 부르지만, 자가격리는 걸렸는지 모르는 사람을 떼어 두는 것(검역)이고 확진자의 격리 입원은 걸린 사람을 떼어 놓는 것이다. 검역(檢疫)의 「역(疫)」이 곧 역병의 역이다.
페스트는 지나간 병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2019~2025년에도 콩고민주공화국과 마다가스카르에서 환자가 꾸준히 나왔다. 2003년에는 오랑에서 25km 떨어진 마을에서 57년 만에 환자 18명이 나왔다. 한국에서 페스트는 발생 즉시 신고하는 제1급 법정감염병이고, 질병관리청은 국내 발생 사례가 없다고 적는다.
알제리가 프랑스령이던 1830~1962년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1910~1945년을 품는다. 알제리는 1954년부터 8년의 전쟁 끝에 독립했다. 다만 알제리는 법으로 프랑스의 일부로 다뤄졌고, 독립 무렵 100만 명이 넘는 유럽계 주민이 대대로 살고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왼쪽 목차에서 한 장(章)씩 골라 본다 — 한 번에 한 주제만 뜬다. 처음부터 다 읽을 필요는 없고, 장마다 맨 위의 요약 상자만 읽어도 된다. 병이 낯설면 03장과 04장부터 보면 된다.
검색창에 낱말을 넣으면 장 구분을 넘어 그 대목만 뽑아 준다. “멍울”, “라자레토”, “설파제” 같은 말이 걸렸을 때 쓰면 된다.
스포일러는 없다. 소설 안의 이야기는 첫 장의 도시 묘사까지만 다룬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영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알제리 북서부의 항구. 알제에서 서쪽으로 직선 약 350km, 지중해 건너 마르세유에서 약 990km.



아랍어 이름은 와흐란(وهران)이다. 베르베르어 wa-iharan, 「사자들의 땅」에서 왔다고 본다. 900년 무렵 이 근처에 바르바리사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마지막 두 마리가 죽은 산은 「사자들의 산」이라 불렸다. 시청 앞에는 지금도 사자 상 두 마리가 서 있다. 도시는 903년 이 지역의 베르베르 부족들이 세웠다.
이 도시의 역사는 주인이 여러 번 바뀐 역사다.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명으로 페드로 나바로 백작이 5월 17일 도시를 함락했다. 점령군은 도시의 책과 문서를 불태웠다. 1563년에는 바다에서 300미터 위 에두르산 꼭대기에 산타크루스 요새를 지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을 틈타 마스카라의 베이(지방 통치자)가 에스파냐를 몰아냈다. 24년 뒤인 1732년 에스파냐가 다시 들어와 60년을 더 머문다.
10월 8일 밤, 7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3,000명 넘게 죽었다. 에스파냐 왕은 이 도시를 지키는 비용이 더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1792년 2월 에스파냐군이 완전히 철수했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를 쳐들어갔다. 명분은 1827년 빚 문제로 다투던 알제의 통치자가 프랑스 영사를 파리채로 친 일이었다. 이듬해 1월 4일 프랑스군이 오랑에 들어왔다. 그 뒤 유럽계가 계속 들어와 20세기에는 무슬림 주민보다 많아진다.


같은 도시 안에 법적 신분이 셋 있었다.
알제리에서 태어나 자란 유럽계 주민을 나중에 피에누아르라 불렀다. 오랑의 유럽계는 3분의 2쯤이 에스파냐 출신이었다. 바다 건너 300km 남짓한 알리칸테·발렌시아·무르시아 일대는 작은 땅을 쪼개 부치는 가난한 농촌이었고, 1846년 큰 가뭄이 겹쳤다. 일거리를 찾아 건너온 것이다. 1896년 알제리 인구조사에서 알리칸테 출신만 5만 6,000명이었다.
알제리의 유대인 약 3만 5,000명은 1870년 크레미외 법령으로 한꺼번에 프랑스 시민이 됐다. 유럽에 친척이 많은 유대인이 프랑스 문화에 더 빨리 동화되리라 본 것이다. 무슬림 주민은 이 법령에서 빠졌다.
알제리 전체의 다수인 아랍·베르베르계 무슬림은 프랑스 국적의 「신민」이었지 시민이 아니었다. 1865년부터 개인이 시민이 될 길은 있었지만 이슬람 법을 따르는 신분을 버려야 했다. 1881년의 원주민법은 이들만 따로 처벌하고 집단 처벌까지 허용했다. 시민권은 2차 대전 뒤에야 주어졌다.


첫 장은 이 도시를 칭찬하지 않는다. 「도시 자체는, 인정해야 하는데, 못생겼다.」 비둘기도 나무도 정원도 없어 날갯짓 소리도 잎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계절이 하늘에서만 읽히는 곳이라 적는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일하고, 자기들 표현으로 「장사를 한다」. 여자와 영화와 해수욕을 좋아하지만 그건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의 몫이다. 그리고 한 마디로 「여기서는 지루하다」고 쓴다.
도시의 위치도 짚는다. 헐벗은 고원 가운데, 빛나는 언덕에 둘러싸여, 흠잡을 데 없는 모양의 만 앞에 놓였다. 그런데 도시는 그 만에 등을 돌리고 지어졌다. 그래서 바다는 보이지 않고, 언제나 찾아 나서야 한다.
소설이 「194X년」이라 적은 그 몇 해에, 이 도시에는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나.
오랑에서 서쪽으로 6km 떨어진 군항. 프랑스가 독일과 휴전하자 영국은 프랑스 함대가 독일 손에 들어가면 바다의 힘이 뒤집혀 대서양 보급로가 위험해진다고 봤다. 영국에 합류하든지, 카리브해의 프랑스령으로 가든지, 아니면 침몰을 각오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거부당하자 포격했다. 프랑스 수병 1,297명이 죽었다. 비시 정부는 닷새 뒤 영국과 국교를 끊었다.
비시 정부는 반유대 법률을 만들면서 70년 된 크레미외 법령을 폐지했다. 알제리 유대인은 하루아침에 시민이 아니게 됐다. 공립학교의 유대인 학생 수를 제한하다가 결국 학교에서 내보냈고, 유대계 공동체는 쫓겨난 아이들을 위해 사설 교육을 꾸렸다. 이 법령은 연합군 상륙 뒤에도 바로 돌아오지 않았고, 1943년 10월에야 되살아났다.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미군이 유럽·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벌인 첫 작전이다. 프랑스로 바로 건너가자는 미국과 아직 힘이 모자란다는 영국 사이의 절충이었다. 오랑 항구에 바로 들어가려던 영국 함정 두 척은 비시 프랑스 구축함에 격침됐지만, 전함 포격 끝에 11월 10일 오랑은 항복했다.
히틀러는 북아프리카의 프랑스군이 연합군과 손을 잡자 곧바로 프랑스 남쪽의 비점령 지역까지 점령했다. 이제 프랑스 본토와 알제리 사이의 지중해는 전선이 됐다. 카뮈는 이때 결핵 요양 중이라 프랑스 본토에 있었고, 아내와 어머니가 있는 알제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20세기 알제리에도 페스트가 있었다. 큰 유행은 세 번 — 1921년 185건, 1931년 76건, 1944년 95건이고, 그 밖에 산발적인 환자가 158명이었다. 그런데 두 건을 빼고는 모두 항구에서 났다. 보건 당국은 늘 배를 타고 들어온 것으로 봤다.
왜 크게 번지지 않았을까. 당시 알제리에는 들쥐 사이에 페스트균이 늘 머무는 「자연 병소」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배가 들여온 쥐와 함께 항구에서 일었다가 사그라든 것이다. 마지막 환자는 1946년 오랑에서 나왔다.
카뮈가 수첩에 페스트에 관한 생각을 적은 것은 1941년 4월로, 1944년 유행보다 앞선다. 오랑은 1849년에는 콜레라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페스트가 어떤 병이고, 무엇을 타고 어떻게 옮는가.



양쪽 끝만 진하게 물들어 현미경에서 안전핀처럼 보인다. 햇빛과 건조, 40도가 넘는 열에 아주 빨리 죽는다. 그래서 바깥 공기 속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늘과 실내, 그리고 짐승의 몸을 길로 삼는다. 설치류 200종 넘게가 이 균을 품고, 벼룩 125종 넘게가 옮길 수 있다.
흔히 「쥐가 병을 옮긴다」고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영어 위키백과는 못을 박는다 — 「널리 믿는 것과 달리, 쥐가 직접 확산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벼룩의 병이고, 쥐는 먼저 죽는 쪽이다.
기전은 이렇다. 균이 벼룩의 앞위(위 바로 앞의 좁은 관)에서 덩어리지면 길이 막힌다. 막힌 벼룩은 피를 삼켜도 위로 내려보내지 못해 굶는다. 굶주린 벼룩은 더 사납게, 더 자주 문다. 그리고 물 때마다 막힌 덩어리를 게워 내며 수천 마리의 균을 상처 안으로 밀어 넣는다. 벼룩은 결국 굶어 죽는다.
벼룩이 사람을 무는 것은 그 동네 쥐가 다 죽어 숙주가 사라졌을 때다. 숙주를 잃은 벼룩이 다음 몸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순서가 정해져 있다 — 「사람에게 심각한 페스트가 돌기 전에는 반드시 설치류의 유행이 먼저 있다.」
세 번째 대유행(05장)은 바다의 교역을 타고 세계로 퍼졌다. 감염된 사람, 쥐, 그리고 벼룩이 숨은 화물이 배에 실려 갔다. 배가 닿는 곳은 항구이고, 짐을 부리는 부두와 창고에는 쥐가 산다.
그래서 19세기 말~20세기의 페스트는 항구 도시의 병이었다. 1899년 포르투, 1900년 글래스고 같은 유럽 항구에도 왔고, 20세기 알제리의 환자도 두 건을 빼고는 모두 항구에서 나왔다(02장).
| 형태 | 어디 | 어떻게 옮나 | 잠복기 | 치료 안 하면 | 얼마나 빨리 |
|---|---|---|---|---|---|
| 선페스트 bubonique | 림프절 | 벼룩에 물리거나, 병든 짐승의 체액에 닿아서. 사람 사이로는 옮지 않는다. | 1~7일 | 30~90% 출처에 따라 40~60% | 대개 열흘 안 |
| 패혈증형 septicémique | 피 | 선페스트에서 번져 가는 경우가 많다. | 출처에 값이 없다 | 거의 다 죽는다 | 너무 빨라 멍울이 생길 틈도 없는 경우가 있다 |
| 폐페스트 pulmonaire | 폐 |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기침과 침방울, 공기. | 2~4일 출처에 따라 3~7일 | 거의 100% 출처에 따라 90~95% | 1~6일. 빠르면 36시간 |
세 형태 가운데 사람 사이로 옮는 것은 폐페스트 하나뿐이다. 나머지 둘은 벼룩이나 체액이 있어야 간다. 이 차이가 방역의 모양을 결정한다 — 선페스트는 쥐와 벼룩을 잡아야 하고, 폐페스트는 사람을 떼어 놓아야 한다.
물린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림프절이 붓는다. 벼룩은 주로 다리를 물기 때문에 사타구니가 가장 흔하고, 겨드랑이와 목이 뒤를 잇는다. 「선페스트」의 서양 이름 bubonic은 그리스어 βουβών, 「사타구니」에서 왔다.
매끄럽고 몹시 아프다. 붓기 전에 통증이 먼저 오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더 아파져 터질 지경까지 간다. 부검해 보면 대개 피가 고였거나 썩어 있다.
현대 의학 문헌의 수치를 찾지 못했다. 남아 있는 크기 묘사는 보카치오의 것뿐이다 — 「어떤 것은 흔한 사과만 하고, 어떤 것은 달걀만 했다.」

치명률과 잠복기는 출처마다 다른 값을 적는다. 세계보건기구는 치료하지 않은 선페스트의 치명률을 30~60%로 적고, 폐페스트와 패혈증형은 치료하지 않으면 언제나 죽는다고 적는다. 위키백과 안에서도 30~90%, 40~60% 같은 값이 섞여 있다. 이 페이지는 갈리는 것을 갈리는 대로 적었다.
패혈증형의 잠복기는 확인한 어느 문서에도 값이 없다. 그래서 표의 그 칸은 비워 두는 대신 「출처에 값이 없다」라고 적었다.
1940년대 전반의 의사가 손에 쥘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아직 없던 것.


홍콩의 첫 환자는 1894년 5월 8일에 나왔고, 이틀 뒤 홍콩은 감염 항구로 선포됐다. 프랑스 정부가 예르생을 보냈을 때 이미 사망자는 10만 명이었다.
일본 정부가 보낸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일행은 6월 12일에 도착해 6월 14일에 균을 찾았다. 예르생은 6월 15일에 혼자 도착해 6월 23일에 찾았다. 날짜만 보면 기타사토가 아흐레 빠르다.
그런데 이름은 예르생에게 갔다. 이유는 기술의 정확도다. 예르생은 이 균을 그람음성으로 정확히 적었고, 기타사토는 그람양성이라 했다. 피에서 나온 균과 멍울에서 나온 균의 모양이 다르다고도 적어, 배양이 다른 균에 오염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위키백과의 표현은 이렇다 — 「기타사토의 기술은 정확성이 부족했다.」
부검 현장의 일화가 남아 있다. 예르생은 기타사토가 멍울이 아니라 피를 보고 있는 것에 놀라, 사람을 통해 「멍울도 보라」고 전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영국인 의사 라우슨은 기타사토만 돕고 예르생은 돕지 않았다. 프랑스를 동아시아의 경쟁국으로 봤기 때문이다. 병원의 시체는 전부 기타사토 몫으로 잡혀 있었고, 예르생은 시체를 옮기는 영국 선원들에게 돈을 주고 표본을 얻었다. 1976년의 재검토는 기타사토도 그 균을 봤다고 결론지으며 「이 공로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 무엇 | 무엇인가 | 1940년대에 |
|---|---|---|
| 항페스트 혈청 1895 | 예르생이 파스퇴르 연구소 동료들과 만들었다. 균을 맞힌 말의 피에서 뽑은 항체를 사람에게 놓는다. 세균을 죽이는 약이 아직 없던 시대라, 몸 밖에서 만든 면역을 빌려 오는 것이 유일한 수였다. | 있었다. 다만 1896년 광저우·아모이, 1897년 봄베이에서의 성적을 위키백과는 한 마디로 적는다 — 「실망스러운 결과」. |
| 하프킨 백신 1897 | 죽인 균으로 만든 예방 접종. 걸린 사람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안 걸린 사람을 지킨다. | 있었다. 봄베이에서 사망률을 50~85% 낮췄다고 기록된다. 다만 효과를 두고는 지금도 논란이 남아 있다. |
| 설파제 1935 | 세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더 늘지 못하게 막는 약. 페니실린보다 먼저 나온 항균제다. 페스트에는 1930년대 후반부터 쓰였다. | 있었다. 선페스트에는 들었지만 폐페스트에는 약했다. 1939~2008년 보고를 모은 분석에서 설파제만 쓴 환자의 치명률은 20% 남짓이었다. |
| 스트렙토마이신 1943 | 흙 속 방선균에서 뽑은 항생물질. 페니실린이 잘 듣지 않는 그람음성균에 듣는 첫 항생제였고, 페스트균이 바로 그람음성이다. 오늘날 페스트 치료의 기본 약 가운데 하나다. | 사실상 없었다. 1943년 10월에 분리돼 이듬해 1월에 발표됐지만 만들 수 있는 양이 적었다. 페스트 환자에게 처음 쓴 것은 1947년이다. |
혈청은 세균을 죽이는 약이 하나도 없던 시대의 수였다. 균을 맞혀 면역이 생긴 말의 피에서 항체를 뽑아, 몸 밖에서 만든 면역을 빌려 오는 것이다. 1896년부터 쓰였다.
설파제는 1930년대에 나온 첫 합성 항균제다. 균을 죽이지 않고 늘지 못하게 막는다. 페스트에는 1930년대 후반부터 쓰여 혈청을 밀어냈다. 선페스트에는 들었지만 폐페스트에는 약했다.
페니실린은 2차 대전 중에 대량생산됐지만 페스트에는 답이 아니었다. 페스트균은 그람음성균 — 바깥에 막이 한 겹 더 있는 세균 — 이라 초기 페니실린이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그람음성균에 듣는 약을 흙 속 미생물에서 찾던 끝에 1943년 스트렙토마이신이 나왔다. 처음에는 만들 수 있는 양이 적었고, 페스트 환자에게 쓰기 시작한 것은 1947년이다.
1939~2008년에 나온 보고들을 모은 분석은 약마다 치명률을 이렇게 셌다 — 테트라사이클린 1.3%, 스트렙토마이신 같은 아미노글리코사이드 7.5%, 설파제 20.2%, 페니실린 75%. 시대와 환자가 서로 달라 단순 비교는 조심해야 한다.
혈청도 백신도 설파제도 있었다. 다만 셋 다 확실하지 않았다. 혈청의 성적을 위키백과는 「실망스러운 결과」 한 마디로 적고, 백신의 효과는 지금도 논란이 남아 있으며, 설파제는 폐페스트에 약했다.
스트렙토마이신은 1943년 10월에 분리돼 이듬해 1월에 발표됐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에게 쓴 것은 1947년부터다. 1940년대 전반의 의사에게는 사실상 없던 약이다.
세계보건기구는 페스트를 일찍 진단해 항생제를 쓰면 살릴 수 있는 병으로 적는다. 2003년 오랑 근처에서 나온 환자 18명은 독시사이클린 같은 항생제로 치료받았고, 첫 환자를 빼고 모두 나았다.


이 병은 세 번 세계를 돌았다. 프랑스에서는 1720년 마르세유가 마지막 큰 유행이었다.
동로마와 사산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 부른다. 542년 봄 콘스탄티노플에 닿아 항구를 타고 지중해를 돌았다. 사망자는 한 번의 유행만 세면 2,500만 명, 두 세기의 재발까지 세면 5,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흑사병. 최대 5,000만 명이 죽었고 유럽 인구의 30~60%가 사라졌다는 추정이 가장 널리 쓰인다. 다만 이 숫자는 출처마다 크게 갈린다.
중국 윈난에서 시작해 바다의 교역을 타고 세계로 갔다. 감염된 사람과 쥐, 벼룩이 숨은 화물이 배에 실려 항구에서 항구로 옮겨 다녔다. 최소 1,500만 명이 죽었고 인도가 1,000만~1,200만 명이다. 균도 벼룩도 바로 이 유행 중에 밝혀졌다.
당대 사람들은 그 병을 어느 유럽어로도 「검은」이라 부르지 않았다. 라틴어로 pestis, pestilentia, mortalitas라 했고, 영어로는 「역병」, 「큰 죽음」이라 했다.
영어 Black death가 처음 쓰인 것은 1755년이다. 덴마크어 den sorte død를 옮긴 말이다. 그러니 이 이름은 400년 뒤에 붙은 이름이다. 한국어의 「흑사병」도 이 이름을 옮긴 것이라, 병 자체를 가리킬 때는 「페스트」가 맞다.


서유럽의 마지막 대규모 선페스트는 지중해 건너 한 척의 배에서 시작했다. 상선 생탕투안호가 레바논의 시돈에서 출발해 스미르나·트리폴리, 그리고 역병이 돌던 키프로스를 거쳐 1720년 5월 마르세유에 닿았다.
배에서는 이미 튀르크인 승객 하나가 죽었고 선원 여럿과 선의까지 죽은 뒤였다. 리보르노는 입항을 거부했다. 마르세유는 받았고, 항만 당국은 곧바로 검역에 넣었다.
그런데 화물이 문제였다. 보케르 큰 장에 내다 팔 비단과 면화가 실려 있었고, 그것을 기다리던 유력 상인들이 당국에 압력을 넣었다. 장날을 놓치면 한 해 장사를 망치기 때문이다. 검역이 풀렸다. 며칠 뒤 시내에서 환자가 나왔다.
결과는 이렇다. 마르세유 시내에서 인구 9만 명 중 5만 명이 죽었다. 주변 프로방스에서 5만 명이 더 죽었다. 툴롱 일대는 절반이 넘게 죽었다. 인구가 유행 전으로 돌아온 것은 1765년, 45년 뒤다.
엑스 고등법원은 마르세유와 프로방스 사이의 모든 왕래를 사형으로 금지했다. 그리고 그 금지를 물리적으로 집행하려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담을 쌓았다. 마른돌로 높이 2미터, 두께 70센티미터. 조금 물러난 자리에 초소를 뒀다.
1720년 9월 16일, 니콜라 로즈가 지원자와 죄수 150명을 이끌고 빈민가에 쌓인 시체 1,200구를 치웠다. 3주 된 것도 있었다. 30분 만에 구덩이에 넣고 석회를 덮었다. 그 150명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셋이다.
역병에는 늘 누군가를 지목하는 일이 따라왔다. 원인을 모르는 재앙 앞에서 사람들은 탓할 대상을 찾았다. 1349년 2월 스트라스부르에서 유대인 약 2,000명이 살해됐고, 1351년까지 유대인 공동체 60곳이 파괴됐다. 탁발수사, 외국인, 거지, 순례자, 나병 환자도 표적이 됐다.


세 번째 대유행 때 세계가 쓴 방역 원칙은 셋이었다 — Isolation(격리), Incineration(소각), Inoculation(접종). 머리글자를 따 「3I」라 부른다.
소각은 벼룩과 쥐가 숨은 집과 물건을 통째로 없애려는 것이었고, 그만큼 사고도 냈다. 1900년 호놀룰루에서는 방역 소각이 걷잡을 수 없는 큰불이 되어 차이나타운을 태웠고, 7,000명이 넘는 중국인·일본인 주민이 집을 잃었다.
이 시기의 방역에는 인종 문제가 붙어 다녔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단 한 건이 나왔을 뿐인데 차이나타운 전체가 엄격히 격리됐다. 케이프 식민지에서는 흑인 주민이 도시 밖으로 강제 이주됐는데, 역사가들은 그 동기를 인종 분리로 읽는다.
약이 없던 600년 동안, 사람들이 역병에 맞서 발명한 것은 가두는 방법이었다.
검역은 병에 걸렸는지 아직 모르는 사람을 떼어 두는 것이다. 격리는 걸린 것이 확인된 사람을 떼어 놓는 것이다. 한국어는 둘을 흔히 「격리」로 부른다 — 코로나19 때의 자가격리는 앞쪽, 확진자의 격리 입원은 뒤쪽이다.
검역을 하려면 둘 곳이 필요하다. 도시와 떨어져 있으면서 배를 대기 쉬운 곳 — 섬이 알맞았다. 1423년 베네치아가 석호의 섬 산타 마리아 디 나자렛에 시설을 세웠다. 섬 이름이 시설 이름이 되고 시설 이름이 보통명사가 됐다. 나자레토가 라자레토로 바뀐 데는 나병 환자 병원을 성 라자로에게 바치던 관습이 얽혔다고 본다.
「위생 저지선」. 한 지역의 안팎으로 사람이 오가지 못하게 막는 선이다. 담이나 울타리를 치고 무장한 사람이 지킨다. 말 자체는 1821년 프랑스가 에스파냐에서 번지던 황열병을 막는다며 피레네 국경에 군대를 세운 데서 나왔다. 그 배치에는 에스파냐의 자유주의 사상을 막으려는 뜻이 더 컸다는 평도 있다.


1580년 유행 뒤 마르세유 시의회는 시의원과 의사로 위생국을 만들었다. 배가 들어오면 대표단이 나가 선장의 일지를 읽고, 지중해에서 역병 소문이 도는 도시들의 명단과 대조했다.
절차는 셋으로 갈렸다. 병의 징후가 있으면 입항 자체를 막았다. 징후는 없지만 거쳐 온 항구 중에 역병 기록이 있으면 바깥 섬에서 2단계 검역을 시켰다. 그리고 깨끗한 건강증명서를 가진 배에도 최소 18일의 검역을 매겼다. 의심스러운 선원은 더 외진 섬에서 50~60일을 보내야 했다.
라자레토를 지을 자리에도 기준이 있었다. 바람이 잘 통할 것 — 나쁜 공기를 날려 보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바다에 가까울 것 — 물을 퍼 올려야 하니까. 그리고 외지되 닿기는 쉬울 것.
그러니 1720년의 재난(05장)은 제도가 없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제도는 140년 전부터 있었고, 그 제도를 사람이 풀었다.


아는 것. 부리 안에는 말린 장미와 카네이션, 라벤더와 페퍼민트, 장뇌, 구리, 식초를 적신 스펀지, 노간주 열매, 정향, 몰약 따위를 채웠다. 나쁜 냄새가 병을 옮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미아스마설). 부리가 향료를 물고 있으니 의사는 두 손을 다 쓸 수 있었다.
모르는 것. 누가 이것을 설계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위키백과가 말하는 것은 1619년 파리 유행 때 루이 13세의 시의 샤를 드 로름의 전기에 처음 언급된다는 것까지다. 널리 퍼진 그림은 1656년 판화와 그것을 베낀 풍자화다.
틀리기 쉬운 것. 이 차림은 17세기의 것이다. 위키백과는 못을 박는다 — 「중세의 역병 의사와 이 초기 근대 의상의 이미지를 잇는 증거는 없다.」 흑사병 그림으로 쓰면 틀린다.
흔했는지도 모른다. 남아 있는 진품 가면은 전 세계에 두 점뿐이고 둘 다 독일에서 나왔는데, 정작 그 시기 중부 유럽에 대응할 만한 유행 기록이 없다. 눈구멍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 실제로 앞을 볼 수 없다는 점도 지적된다. 일부 역사가는 이 의사가 원래 허구였다가 나중에 진짜 방호복에 영향을 줬다고 본다.
다만 이론이 틀렸다고 효과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얼굴과 몸을 덮어 튀는 피와 침방울을 막았고, 밀랍을 먹인 옷은 벼룩이 달라붙는 것을 막았다. 위키백과는 이것을 의료용 개인보호장비의 가장 이른 예 가운데 하나로 적는다.
1665년 영국의 마을 에이엄은 병이 이웃 마을로 넘어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봉쇄했다. 역병은 14개월 동안 이어졌고, 한 기록은 최소 260명, 교회 기록은 273명이 죽었다고 적는다.
21세기의 재분석은 에이엄 사례의 4분의 3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옮은 것으로 본다. 특히 한 집 안에서. 「벼룩이 옮기는 병」이라는 그림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940~1944년. 1947년 이 책을 처음 읽은 프랑스 사람들이 막 지나온 4년이다.
경계선은 1940년 6월 25일부터 효력이 났다. 스위스에서 에스파냐까지 13개 도를 가로질렀다. 독일에게 이 선은 경제의 고삐였다 — 프랑스 밀과 석탄의 4분의 3, 강철·직물·설탕은 거의 다 점령 지역에서 났다. 비점령 지역은 먹고살 것을 독일 당국에 기대야 했다.
1940년 9월까지는 두 지역 사이에 편지가 아예 오가지 못했다. 그 뒤 나온 것이 가족 엽서다. 13줄에 「건강함」, 「아픔」 같은 문장이 미리 인쇄돼 있어, 지우거나 몇 낱말을 채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검열을 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선을 합법적으로 넘으려면 독일 당국의 통행증(아우스바이스)이 있어야 했다. 근처 주민용과 기한이 정해진 일반용이 있었고, 둘 다 받기 어려웠다. 1942년 11월 독일군이 남쪽까지 들어온 뒤 선은 의미를 잃었고, 1943년 3월 공식으로 없어졌다.
처음에 저항은 아주 작았다. 조직된 저항에 참여한 사람은 인구의 1~3%로 추정된다. 첫 일은 총이 아니라 글이었다 — 1940년 여름부터 지하신문이 나왔고, 철도원들이 그것을 전국으로 날랐다.
1943년 독일이 프랑스 젊은이 수십만 명을 독일 공장으로 끌고 가는 강제노동(STO)을 시작하자, 징용을 피해 산과 숲으로 숨은 젊은이들이 무장 저항에 합류했다. 1944년 6월 국내 무장 저항군은 약 10만 명이었고 10월에는 40만 명이 됐다.
대가는 컸다. 저항을 위협하려고 독일 당국이 총살한 프랑스 민간인 인질이 약 3만 명으로 추정된다.
『콩바』(투쟁)는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가 1941년 12월에 시작한 지하신문이다. 카뮈는 1943년부터 이 신문에서 일했다. 기사는 가명으로 썼고, 잡히지 않으려고 가짜 신분증을 들고 다녔다.
1944년 8월 파리 해방과 함께 신문은 공개 발행됐고, 카뮈는 편집장으로 1947년까지 거의 매일 사설을 썼다. 해방 직후 부수는 1945년 1월 18만 5,000부까지 올랐다.


카뮈가 1942년부터 요양한 르 파늘리에는 오트루아르의 고원에 있고, 르 샹봉쉬르리뇽에서 몇 킬로미터 거리다.
이 고원의 마을들은 17세기부터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온 개신교도(위그노)가 모여 살던 곳이다. 지금도 「개신교 산」이라 불린다. 전쟁 동안 이 마을들은 나치 독일과 그 점령지에서 도망쳐 온 유대인과 난민을 숨겼다. 마을 안에도, 주변 농가에도 숨겼고, 스위스로 넘어가도록 도왔다. 숨겨 준 사람의 수는 800명에서 5,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마을이 그럴 수 있었던 조건도 기록돼 있다. 1940년대 이 마을은 겨울에 900명, 여름에 6,000명이었다. 관광객을 받느라 호텔 42곳, 하숙 50곳, 유스호스텔 12곳이 있었는데 전쟁으로 그것들이 비어 있었다. 외지 사람이 오가는 데 익숙했고, 스스로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이라는 기억이 있었다.
1913–1960. 알제리에서 태어난 유럽계 프랑스인. 이 소설과 겹치지 않는 범위에서.
1940년 독일군이 파리로 다가오자 카뮈가 일하던 파리의 신문사는 그를 내보냈다. 카뮈와 아내는 1941년 초 알제리로 돌아가 오랑의 처가에 머물렀다.
그해 오랑에서 그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중에는 비시 정부의 법으로 공립학교에서 쫓겨난 유대인 아이들(02장)도 있었다. 철학 교사 앙드레 베니슈와 함께였다. 같은 해 4월, 수첩에 처음 페스트에 관한 생각을 적었다.
카뮈는 자기 작업을 연작으로 묶어 계획했다. 각 연작은 소설 하나, 산문 하나, 희곡 하나로 이뤄진다.
첫 번째는 부조리다. 『이방인』,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나왔다. 카뮈가 이 말로 가리킨 것은 세상에 의미를 묻는 사람과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세상 사이의 어긋남이다.
두 번째는 반항이다. 『페스트』, 『반항하는 인간』, 『정의로운 사람들』. 카뮈는 이 연작을 1942년 말, 독일군이 북아프리카에 닿을 무렵 시작했다. 『반항하는 인간』에서 그는 이 말을 한 줄로 적었다 —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카뮈는 흔히 사르트르와 함께 실존주의로 묶였지만, 스스로는 그 딱지를 거부했다. 1951년 『반항하는 인간』이 나온 뒤 두 사람은 공개 논쟁 끝에 갈라섰다.
『La Peste』라는 제목, 책을 여는 남의 문장 하나, 그리고 첫 문장의 낱말 하나.
la peste는 라틴어 pestis(역병·재앙)에서 왔다. 정관사가 붙어 「그 페스트」가 된다. 특정한 한 번의 유행을 가리키는 말투다.
프랑스어 발음을 그대로 옮겼다. 「흑사병」과는 쓰임이 다르다 — 흑사병은 14세기 유럽의 그 유행을 가리키는 역사 용어이고, 페스트는 병 자체의 이름이다.
plague는 이 병만이 아니라 「재앙·창궐」 일반을 뜻한다. 번역은 세 번 나왔다 — 스튜어트 길버트(1948), 로빈 버스(2001), 로라 매리스(2021).
일본어도 병명을 음으로 옮겼다. 독일어 Pest를 거친 말이다.
독일어에서 Pest는 이 병을 가리키는 일상어다. 프랑스어와 어원이 같다.
「쥐의 역병」. 병을 옮기는 경로를 이름에 넣었다. 다만 정확히 말하면 쥐가 아니라 쥐에 붙은 벼룩의 병이다.
소설 앞에 인용 하나가 놓여 있다. 지은이는 대니얼 디포다.
« Il est aussi raisonnable de représenter une espèce d’emprisonnement par une autre que de représenter n’importe quelle chose qui existe réellement par quelque chose qui n’existe pas. »
어떤 갇힘을 다른 갇힘으로 나타내는 것은, 실제로 있는 무엇인가를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내는 것만큼이나 온당한 일이다.
— 이 페이지의 번역. 원문은 프랑스어 판본에서 그대로 옮겼다.
이 문장의 출처는 디포가 1720년에 낸 『로빈슨 크루소』 3부 『진지한 성찰』의 서문이다. 크루소 이야기가 사실이냐는 물음에 디포는 그것이 「강요된 갇힘의 상태」를 섬에 갇힌 삶으로 나타낸 이야기라고 답하면서 이 문장을 썼다. 영어 원문은 “it is as reasonable to represent one kind of imprisonment by another, as it is to represent any Thing that really exists by that which exists not.”이다.


디포는 1722년에 『전염병 연대기』를 냈다. 1665년 런던 대역병을 한 사람의 목격담처럼 적은 책인데, 디포는 1665년에 다섯 살이었다. 실제로는 삼촌의 기록에 기댄 소설로 본다.
그런데 디포는 거리 이름과 집 위치를 짚고 사망자 표까지 실어, 읽는 사람이 진짜 기록으로 믿게 만들었다. 1720년 마르세유 유행(05장) 소식에 영국이 다시 페스트를 걱정하던 무렵에 나온 책이다.
첫 문장은 이렇다 — 「이 연대기의 주제가 되는 기이한 사건들은 194X년, 오랑에서 일어났다.」 원문은 « en 194. », 연도의 마지막 한 자리가 없다.
프랑스어 chronique는 그리스어 chronos(시간)에서 온 말로, 일어난 일을 시간 순서대로 적은 기록이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처럼 왕국과 전쟁의 역사를 적은 책을 이렇게 불렀다. 오늘날에는 신문의 정기 칼럼도 chronique라 부른다.
카뮈는 1938년부터 수첩에 재료를 모았다. 1943년의 원고에는 서술자가 네 사람이었다. 저마다 자기가 본 것을 말하는 구성이었고, 그중에는 투키디데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역병 기록에 주석을 다는 라틴어·그리스어 교사도 있었다.
1947년의 출간본은 서술자 한 사람의 기록이라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책은 그해 6월 갈리마르에서 나와 곧바로 비평가상을 받았다.
두 줄기다. 하나는 이 병과 방역 제도가 걸어온 길, 다른 하나는 이 책이 만들어진 길.
541–549
동로마와 사산 제국을 덮쳤다. 황제의 이름을 따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 부른다. 542년 봄 콘스탄티노플에 닿은 뒤 항구를 타고 지중해를 한 바퀴 돌았다. 사망자 추정은 6세기 한 번의 유행만 세면 2,500만 명, 두 세기에 걸친 재발까지 세면 5,000만 명이다.
1347. 10.
흑해의 교역항 카파에서 출발한 배들이 시칠리아에 닿았다. 유럽의 두 번째 대유행이 여기서 시작된다. 그보다 몇 달 앞선 1347년 여름, 콘스탄티노플이 먼저 당했다.

1348
1월에 제노바와 베네치아, 곧이어 피사. 1월 말에는 마르세유. 6월까지 프랑스·에스파냐·포르투갈·영국. 파리는 인구 10만 중 절반이 죽었다. 같은 해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튀니스, 메카까지 갔다.
1348
유행 첫해에 베네치아가 공중보건 감독관 세 명을 임명한다. 역병을 행정으로 다루기 시작한 기록의 첫머리다.
1377
달마티아의 라구사(오늘의 두브로브니크)가 들어오는 사람을 30일 동안 따로 머물게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탈리아어 「30」에서 온 trentino다. 검역의 첫 기록이다.
1423
베네치아가 석호의 섬 산타 마리아 디 나자렛에 역병 환자를 위한 시설을 세웠다. 섬 이름이 시설의 이름이 되고, 시설의 이름이 라자레토라는 보통명사가 된다.

1448
베네치아 원로원이 대기 기간을 40일로 늘린다. 이탈리아어 「40」에서 quarantena, 오늘날의 quarantine이 여기서 나왔다.
1556 · 1678
소설의 무대가 되는 도시에도 실제로 페스트가 있었다. 두 해가 특히 심했다고 기록된다. 1794년에는 메카에서 돌아온 순례자들이 옮겨 와 구시가가 거의 비었다.
1619
파리 유행 때의 기록에, 루이 13세의 시의 샤를 드 로름의 전기를 통해 그 모습이 처음 등장한다. 널리 퍼진 그림은 1656년의 판화와 그것을 베낀 풍자화다.

1665
영국의 마을 에이엄이 다른 마을로 병이 넘어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봉쇄했다. 14개월간 최소 260명이 죽었다. 교회 기록에는 273명으로 적혀 있다.

1720. 5.
레바논 시돈에서 출발해 스미르나·트리폴리·키프로스를 거친 상선이 마르세유에 닿았다. 리보르노는 입항을 거부했지만 마르세유는 받았다. 검역에 들어갔으나, 보케르 장에 비단과 면화를 내다 팔아야 했던 상인들이 압력을 넣어 검역이 풀렸다.

1720–1722
마르세유 시내에서 인구 9만 명 중 5만 명이 죽었다. 주변 프로방스에서 5만 명이 더 죽었다. 엑스 고등법원은 마르세유와 프로방스 사이의 왕래를 사형으로 금지하고, 그 금지를 집행하려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돌담을 쌓았다. 인구가 유행 전으로 돌아온 것은 1765년이다.

1855
중국 윈난에서 시작해 증기선을 타고 전 세계로 갔다. 사망자는 최소 1,500만 명, 그중 인도가 1,000만~1,200만 명이다. 이 유행은 거의 전부 선페스트의 모습이었다.
1894. 6.
홍콩.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의사 알렉상드르 예르생이 6월 15일에 도착해 6월 23일에 균을 분리했다. 일본의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는 6월 12일에 도착해 6월 14일에 먼저 찾았지만, 보고가 흔들렸다.

1897
발데마르 하프킨이 첫 페스트 백신을 만들었다. 1월 10일 자기 몸에 먼저 놓았다. 1897년부터 1925년까지 봄베이에서만 2,600만 회분이 나갔고, 사망률을 50~85% 낮춘 것으로 기록된다.

1898
카라치. 폴루이 시몽이 벼룩이 병을 옮긴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였다. 학계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인 것은 1907년이다. 증명에서 인정까지 9년이 걸렸다.

1910–11
폐페스트가 만주를 덮쳐 4만 5,000~6만 명이 죽었다. 청 조정이 보낸 우롄더가 이 병이 공기로 옮는다는 것을 알아보고 천으로 된 호흡기를 만들어 쓰게 했다.

1921 · 1931 · 1944
20세기 알제리에도 페스트가 있었다. 큰 유행이 세 번 — 1921년 185건, 1931년 76건, 1944년 95건. 두 건을 빼고는 전부 항구에서 났고, 보건 당국은 늘 배를 타고 들어온 것으로 봤다. 마지막 환자는 1946년 오랑에서 나왔다.
1943. 10.
럿거스 대학 셀먼 왁스먼의 실험실에서 대학원생 앨버트 샤츠가 흙 속 방선균에서 분리했다. 이듬해 1월에 발표됐지만 양이 없어 사람에게 쓰기까지 몇 해가 더 걸렸다. 동물실험에 쓸 수 있었던 양이 10그램이었다.

1947
스트렙토마이신을 페스트 환자에게 쓰기 시작했다. 그 전 10년 남짓은 설파제가 주된 약이었고, 그 전에는 혈청뿐이었다.
1945
마지막 큰 발생이 페루와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다. 세계보건기구는 연간 사망자가 200명 아래로 떨어진 1960년을 대유행의 끝으로 본다.
2003. 6.
오랑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마을에서 선페스트 환자 18명이 나왔다. 알제리에서 57년 만이었다. 첫 환자를 빼고 모두 항생제로 나았다.
이 작가의 삶은 소설의 줄거리와 겹치지 않는다.
1913. 11. 7.
프랑스령 알제리 몽도비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아버지가 1차 대전에서 전사하고, 귀가 어두운 어머니와 외할머니 밑에서 알제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다.

1930
열일곱에 결핵 진단을 받는다. 축구를 그만두고, 옮는 병이라 집을 나와 삼촌 집에 머문다. 이 병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군 입대도, 교수 자격시험도 막는다.
1938
『페스트』의 재료를 수첩(Carnets)에 흩어진 생각으로 적기 시작한다.
1940. 12. 3.
리옹에서 프랑신 포르와 결혼한다. 오랑 출신이다. 두 사람은 1941년 초 알제리로 돌아가 오랑의 처가에 머문다. 카뮈는 오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중에는 비시 정부의 법으로 공립학교에서 쫓겨난 유대인 아이들도 있었다.

1941. 4.
수첩에 페스트에 관한 생각을 적는다. 프랑스어 표현 그대로 la peste libératrice, 「해방하는 페스트」다. 이때 이미 구상이 서 있었다.
1942. 3. 13.
앙드레 말로에게 「페스트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다고 알린다. 덧붙인 말이 남아 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만, 이 주제가 내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1942
점령하의 파리에서 두 책이 나온다. 부조리를 다룬 첫 번째 연작이 이것으로 닫힌다. 같은 해 결핵이 다시 심해져 오트루아르 산간의 르 파늘리에로 요양을 간다.
1942–43
요양지 르 파늘리에는 르 샹봉쉬르리뇽에서 몇 킬로미터 거리다. 17세기부터 개신교도가 모여 살던 이 고원 마을들은 전쟁 동안 유대인과 난민을 숨겼다. 숨겨 준 사람 수는 800명에서 5,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카뮈는 여기서 『페스트』의 첫 원고를 썼다.

1942. 11.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는 횃불 작전이 벌어진다. 오랑도 이때 넘어간다. 카뮈는 프랑스 본토에 있었고, 아내와 어머니가 있는 알제리로 돌아갈 길이 끊긴다. 바로 다음 날 독일군이 프랑스 남쪽의 비점령 지역까지 밀고 들어온다.

1943
재료는 거의 모였지만 형식이 정해지지 않았다. 이때 원고에는 서술자가 넷이었다. 그중에는 투키디데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역병 기록에 주석을 다는 라틴어·그리스어 교사도 있었다. 1947년의 출간본에는 서술자 하나만 남는다.
1943~
파리로 옮겨 지하신문 『콩바』에서 일한다. 가명으로 쓰고 가짜 신분증을 들고 다녔다. 1944년 8월 파리 해방 때 편집장으로 신문을 공개 발행하고, 1947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947. 6. 6.
갈리마르에서 나왔다. 곧바로 비평가상을 받는다. 갈리마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가운데 『어린 왕자』와 『이방인』 다음 자리다.
1951
두 번째 연작 「반항」의 산문이 나온다. 이 책을 두고 이듬해 사르트르와 공개 논쟁 끝에 갈라선다.
1957
마흔넷. 역대 두 번째로 젊은 수상자이고,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첫 문학상 수상자다.

1960. 1. 4.
빌블르뱅 근처에서 죽었다. 마흔여섯이었다. 뤼마랭에 묻혔다.

2020
코로나19 유행 동안 이 책이 다시 팔렸다. 영국 출판사는 주문을 못 따라갔다고 했고, 이탈리아에서는 판매가 세 배가 되어 봉쇄 기간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었다.
읽다 걸리는 낱말들. 위쪽 검색창에 넣어도 여기로 잡힌다.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라는 세균이 일으키는 병. 라틴어 pestis는 원래 「역병·재앙」을 두루 뜻했다. 한국어에서 「흑사병」은 이 병 가운데 14세기 유럽의 유행만을 가리키는 역사 용어다.
페스트를 일으키는 그람음성 세균. 양쪽 끝만 진하게 물들어 현미경에서 안전핀처럼 보인다. 햇빛과 건조, 40도가 넘는 열에 아주 빨리 죽는다.
가장 흔한 형태. 벼룩에 물린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림프절이 붓는다.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옮지 않는다.
부어오른 림프절. 그리스어 βουβών(사타구니)에서 온 말이라 가장 흔한 자리도 사타구니다. 겨드랑이와 목에도 생긴다. 매끄럽고 몹시 아프며, 터질 지경까지 커진다. 크기를 적은 옛 기록은 보카치오의 것뿐이다 — 「어떤 것은 흔한 사과만 하고, 어떤 것은 달걀만 했다.」
가장 드물지만 유일하게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옮는 형태. 기침과 침방울로 간다. 치료하지 않으면 거의 다 죽고, 빠르면 36시간 만이다.
균이 피를 타고 도는 형태. 온몸에 작은 핏덩이가 생겼다가 응고 인자가 바닥나 피부와 장기에서 피가 난다. 진행이 너무 빨라 멍울이 잡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페스트를 가장 잘 옮기는 벼룩. 균이 벼룩의 앞위에 덩어리져 길을 막으면 벼룩은 굶주려 계속 물고, 물 때마다 막힌 것을 게워 내며 균을 상처에 밀어 넣는다. 벼룩은 결국 굶어 죽는다.
쥐는 병을 옮기는 쪽이 아니라 먼저 죽는 쪽이다. 벼룩이 사람을 무는 것은 그 동네 쥐가 다 죽어 숙주가 사라졌을 때다. 그래서 사람의 유행 앞에는 언제나 쥐의 유행이 먼저 온다.
병에 걸린 짐승의 피에서 뽑은 항체를 사람에게 놓는 치료. 예방 접종과 다르다. 예르생이 1895년에 만들었고, 실제 성적은 좋지 않았다.
1935년부터 쓰인, 페니실린보다 먼저 나온 항균제. 균을 죽이지 않고 엽산을 못 만들게 해서 더 늘지 못하게 막는다. 페스트에는 1930년대 후반부터 쓰였고, 선페스트에는 들었지만 폐페스트에는 약했다.
1943년 10월에 흙 속 방선균에서 분리된 항생물질. 페니실린이 잘 듣지 않는 그람음성균에 듣는다. 발견 직후에는 만들 수 있는 양이 적었고, 페스트 환자에게 처음 쓴 것은 1947년이다. 그 뒤 오래도록 페스트의 표준 치료였다.
세균을 보라색 염료로 물들이는 그람 염색에서 물이 빠지는 세균. 바깥에 막이 한 겹 더 있어 초기의 페니실린이 잘 듣지 않았다. 페스트균이 여기 속한다.
아직 병에 걸렸는지 모르는 사람을 일정 기간 떼어 두는 것. 1377년 라구사의 30일에서 시작해 1448년 베네치아가 40일로 늘렸다. 이탈리아어 「40」이 그대로 말이 됐다.
검역과 다르다. 검역은 모르는 사람을 떼어 두는 것이고, 격리는 걸린 것이 확인된 사람을 떼어 놓는 것이다.
검역 시설. 1423년 베네치아가 석호의 섬 산타 마리아 디 나자렛에 세운 것이 처음이다. 섬 이름 나자레토가 라자레토로 바뀐 데는 나병 환자 병원을 성 라자로에게 바치던 관습이 얽혔다고 본다. 어떤 라자레토에서는 편지까지 소독했고, 드물게는 1936년까지도 그랬다.
위생 저지선. 한 지역의 안팎으로 사람이 오가지 못하게 막는 선이다. 이 말은 1821년 프랑스가 에스파냐에서 번지던 황열병을 막는다며 피레네 국경에 군대를 세운 데서 나왔다. 그 배치에는 에스파냐의 자유주의 사상을 막으려는 뜻이 더 컸다는 평도 있다.
1720년 마르세유 유행 때 엑스 고등법원이 왕래를 사형으로 금지하고, 그 금지를 물리적으로 집행하려고 들판에 쌓은 담. 마른돌로 높이 2미터, 두께 70센티미터. 조금 물러난 자리에 초소를 뒀다.
도시가 고용해서 돈 없는 사람까지 보게 한 의사. 정작 하는 일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과 걸린 사람의 수를 적는 것이었다. 계약서에는 페스트 환자만 보고 그 뒤에는 스스로 검역에 들어간다는 조항이 있었다.
17세기의 물건이다. 부리 안에 말린 장미와 라벤더, 장뇌, 식초 적신 스펀지 따위를 채웠다. 나쁜 냄새가 병을 옮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진품은 전 세계에 두 점뿐이고 둘 다 독일에서 나왔다. 일부 역사가는 이 의사가 원래 허구였다가 나중에 진짜 옷차림에 영향을 줬다고 본다. 14세기 흑사병의 그림으로 쓰면 틀린다.
나쁜 공기가 병을 만든다는 생각. 냄새로 알아볼 수 있다고 여겼다. 라자레토를 바람 잘 드는 곳에 지은 이유이고, 부리에 향료를 채운 이유다.
배가 어느 항구를 거쳐 왔는지 적은 문서. 마르세유는 깨끗한 증명서를 가진 배에도 최소 18일의 검역을 매겼다. 의심스러우면 50~60일이었다.
541년부터의 첫 번째 대유행. 동로마 황제의 이름이 붙었다. 황제 자신도 걸렸다가 살아났다.
1346~1353년의 두 번째 대유행. 당대에는 어느 유럽어로도 「검은」이라 부르지 않았다. 영어 Black death는 1755년에야 처음 쓰인 말이고, 덴마크어를 옮긴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그냥 「역병」이라 불렀다.
1855년 윈난에서 시작해 증기선을 타고 세계로 간 유행. 최소 1,500만 명이 죽었다. 세균과 벼룩이 밝혀진 것이 바로 이 유행 중이다.
세 번째 대유행 때의 방역 원칙 — Isolation(격리), Incineration(소각), Inoculation(접종). 소각은 불이 번지는 문제를 낳았다. 1900년 호놀룰루에서는 방역 소각이 대화재가 되어 7,000명이 넘는 중국인·일본인 주민이 집을 잃었다.
역병에는 언제나 누군가를 지목하는 일이 따라왔다. 1349년 2월 스트라스부르에서 유대인 약 2,000명이 살해됐고, 1351년까지 유대인 공동체 60곳이 파괴됐다. 탁발수사, 외국인, 거지, 순례자, 나병 환자도 표적이 됐다.
알제리 북서부의 항구. 알제 다음가는 도시다. 이름은 베르베르어 wa-iharan, 「사자들의 땅」에서 왔다고 본다. 시청 앞에 사자 상 두 마리가 서 있다.
도시 서쪽 에두르산 꼭대기, 바다에서 300미터 위에 선 요새. 1563년 에스파냐의 산타크루스 후작이 쌓았다.
오랑에서 서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군항. 1940년 7월, 프랑스 함대가 독일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영국 해군이 포격했다. 같은 편이던 나라끼리의 일이다.
1942년 11월,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미군이 유럽·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처음 벌인 작전이다. 오랑도 이때 넘어갔다.
알제리에서 태어나 살던 유럽계 주민. 오랑은 북아프리카에서 유럽계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축에 들었다. 1962년 독립과 함께 대부분 프랑스로 건너갔다.
프랑스의 지방 행정 단위. 한국의 도(道)쯤 된다. 알제리는 1848년부터 알제·오랑·콩스탕틴 세 데파르트망으로 나뉘어 법으로는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의 일부로 다뤄졌다. 오랑은 그 도청 소재지였다.
1870년 알제리의 유대인 약 3만 5,000명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준 법령. 무슬림 주민은 빠졌다. 비시 정부가 1940년 10월 7일 폐지했고, 1943년 10월에 되살아났다.
1940년 6월 독일에 진 뒤 페탱 원수가 세운 프랑스 정부. 온천 도시 비시에 자리 잡아 이렇게 부른다. 독일과 협력했고 알제리도 그 아래 있었다.
1940년 휴전으로 프랑스를 독일 점령 지역과 비점령 지역으로 가른 약 1,200km의 선. 건너려면 독일 당국의 통행증이 있어야 했다. 1942년 11월 독일군이 남쪽까지 들어오며 의미를 잃었다.
두 지역 사이에 편지가 막힌 뒤 1940년 9월에 나온 엽서. 문장이 미리 인쇄돼 있어 지우거나 몇 낱말을 채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13줄짜리였다.
1941년 말에 시작된 레지스탕스의 지하신문. 카뮈가 1943년부터 일했고, 1944년 8월 파리 해방 때부터 1947년까지 편집장이었다.
일어난 일을 시간 순서대로 적은 기록. 프랑스어에서는 중세의 역사 기록(프루아사르의 『연대기』 같은)을 부르던 이름이고, 오늘날에는 신문의 정기 칼럼도 이렇게 부른다. 이 책은 첫 문장에서 스스로를 이 말로 부른다.
책 첫머리에 놓는 남의 글귀. 이 책의 제사는 대니얼 디포의 것이다.
디포가 1722년에 낸 책. 1665년 런던 대역병을 겪은 한 사람의 기록처럼 쓰였지만 소설이다. 디포는 1665년에 다섯 살이었다. 거리와 집 이름, 사망자 표까지 적어 진짜 기록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카뮈가 평생 쓴 작업 노트. 1938년부터 이 소설의 재료가 여기 쌓였고, 1941년 4월에 「해방하는 페스트」라는 구절이 적혔다.
세상에 의미를 묻는 사람과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세상 사이의 어긋남.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가 속한 첫 번째 연작의 주제다.
두 번째 연작의 주제. 『페스트』·『반항하는 인간』·『정의로운 사람들』이 여기 속한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이것을 한 줄로 적었다 —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카뮈는 1942년 말, 독일군이 북아프리카에 닿을 무렵 이 연작을 시작했다.
1947년에 이 책이 받은 상. 출간 직후였다.
오트루아르의 요양지. 카뮈가 1942년부터 머물며 이 소설의 첫 원고를 썼다.
르 파늘리에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고원 마을. 17세기부터 개신교도(위그노)가 모여 살았고, 전쟁 동안 유대인과 난민 800~5,000명을 숨겼다. 1990년 야드바솀이 마을 전체를 「열방의 의인」으로 기렸다. 그런 마을은 둘뿐이다.
1947년에 이 책을 낸 출판사. 카뮈의 책들이 여기서 나왔다.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1940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 카뮈는 자주 여기 묶였지만 스스로는 이 딱지를 거부했다.
사실은 기억이 아니라 문헌에서 확인해 적었다.
01장의 지도 두 장은 Natural Earth(퍼블릭 도메인) 경계 데이터로 이 페이지가 직접 그렸다. 거리는 두 도시 사이의 대원거리(직선거리)를 계산한 값이다.
사진과 그림은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받았고 전부 퍼블릭 도메인이거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다. 원본 파일명은 build/data/peste/manifest.py에 그대로 적어 두었다.
Albert Camus, La Peste, Gallimard, 1947. 한국어판 『페스트』, 김화영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이 페이지의 색은 이 판의 표지 — 에드바르 뭉크의 「임종의 자리 곁에서」와 청록색 띠 — 에서 뽑았다.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 위해 만든 배경자료다. 소설을 해설하지 않고, 소설이 딛고 선 세계 — 도시, 병, 방역의 역사, 점령기 — 를 설명한다. 스포일러를 넣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원칙이다. 소설 안의 이야기는 첫 장의 도시 묘사까지만 다루었고, 등장인물의 이름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위키백과의 이 소설 문서들은 첫 문단부터 줄거리의 중요한 부분을 밝힌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찾아보지 않기를 권한다.
실존 인물과 배의 이름 가운데 소설 인물의 이름과 겹치는 것은 겹치는 부분을 빼고 적었다 — 1720년 마르세유에 닿은 배는 「생탕투안호」로, 그 유행을 그린 화가는 성으로만 적었다.
제사와 첫 문장의 한국어는 이 페이지가 원문에서 직접 옮겼다. 카뮈는 한국에서 저작권 보호 기간 중이라 인용은 짧게 한정했다. 영화는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