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글러스 M. 켈리
Douglas M. Kelley · 1912–1958
미 육군 정신과 군의관 — 이 책의 주인공
이 책의 주인공. 33세 육군 정신과 군의관으로 파견돼 피고 22명을 검사했다. ‘악의 표지’를 찾으러 갔다가 찾지 못했다는 결론을 들고 돌아온다.
1945.11.20 — 1946.10.01 · 국제군사재판소
한 미국 육군 정신과 의사가 전범 22명의 감방을 드나들며 ‘악의 표지’를 찾았다. 찾지 못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 특별한 조건이었고, 그 조건은 독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다루는 것은 그가 관찰한 대상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결국 독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했다. 미군은 붙잡은 나치 지도부를 룩셈부르크의 한 호텔에 가뒀다. 수용소의 암호명은 애시캔(재떨이)이었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들을 재판에 세우려면 먼저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을 세운 재판은 재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군은 정신과 군의관을 보냈다. 33세의 더글러스 켈리 대위였다. 공식 임무는 법정 능력 판정 하나였다. 그러나 켈리는 그 자리에서 훨씬 큰 것을 보았다 —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를 조직한 사람들이 한 건물에 모여 있고, 자신이 아무 제약 없이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켈리의 가설은 단순했다. 이런 일을 한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정신병이든 성격장애든, 어떤 표지가 있다면 다음에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자기 전공인 로르샤흐 잉크반점 검사와 지능검사를 들고 감방을 돌았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길버트가 통역과 관찰을 맡아 함께 다녔다.
결과는 기대와 반대였다. 지능은 평균보다 훨씬 높았고, 정신질환자는 사실상 없었다. 로르샤흐 반응에도 이들만의 특징이 나오지 않았다. 켈리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 이들은 우리 모두가 그렇듯 환경의 산물이었다. 같은 조건이 갖춰지면 어디서든 같은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을 예외로 두지 않았다.
길버트는 같은 자료를 보고 다르게 말했다. 그는 이들에게서 공감 능력의 결여라는 공통점을 읽어 냈다. 두 사람은 그 뒤로 평생 화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1958년, 켈리는 괴링과 같은 방법 — 청산가리 — 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켈리의 결론이 맞다면,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나”가 아니라 “어떤 조건이 그들을 만들었나”가 된다. 조건은 사람보다 옮겨 다니기 쉽다. 성격은 국경을 넘지 않지만 패전·초인플레이션·대량 실업·모욕감·설명이 필요한 재난은 어디서든 다시 생긴다.
그래서 이 페이지의 무게 중심은 인물 열전이 아니라 조건에 있다. 두 차례의 전쟁이 무엇을 남겼는지, 돈이 어떻게 두 번 무너졌는지, 한 정당이 득표가 줄어드는 중에 어떻게 정권을 넘겨받았는지, 그리고 천 년 묵은 소문이 어떻게 국가의 행정 절차가 되었는지. 나치는 이 조건들의 결과다. 결과만 보고 원인을 안 보면, 다음에 같은 원인이 왔을 때 알아보지 못한다.
켈리가 1946년에 한 말이 이 책의 출발점이자 결론이다 — 그가 감방에서 만난 것은 독일에서만 자라는 병이 아니었다.
전체 인물은 맨 뒤 인물 장에 50명이 있다. 여기서는 이야기가 굴러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여섯만 세워 둔다.

Douglas M. Kelley · 1912–1958
미 육군 정신과 군의관 — 이 책의 주인공
이 책의 주인공. 33세 육군 정신과 군의관으로 파견돼 피고 22명을 검사했다. ‘악의 표지’를 찾으러 갔다가 찾지 못했다는 결론을 들고 돌아온다.
Gustave M. Gilbert · 1911–1977
미 육군 형무소 심리학자
형무소 심리학자.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해 통역 없이 피고들과 이야기했다. 같은 자료를 보고 켈리와 정반대 결론을 냈고, 두 사람은 평생 화해하지 않았다.

Hermann Göring · 1893–1946
제국원수 · 공군 총사령관 · 4개년계획 총책
피고석 첫 자리. 켈리가 가장 오래 관찰한 인물이고 IQ가 가장 높게 나온 축에 든다. ‘정신병자가 아니다’라는 판정이 이 책의 질문을 만든다.

Rudolf Heß · 1894–1987
총통 대리 (1933–41)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해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가 법정에서 다투어졌다. 정신과 의사들이 왜 이 재판에 필요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다.

Geoffrey Lawrence · 1880–1971
재판장 (영국)
영국 판사, 재판장. 네 나라의 법 전통이 부딪히는 자리에서 절차를 굴러가게 만들었다. 피고에게 발언 기회를 준 것이 이 재판을 보복이 아닌 재판으로 만들었다.

Robert H. Jackson · 1892–1954
미국 수석검사 · 연방대법관
미국 수석검사. 처칠과 스탈린이 즉결 처형을 말할 때 재판을 관철시킨 사람이다. 개정 연설에서 “권력에 취한 승자가 패자를 벌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책은 인물 이름과 사건을 설명 없이 지나간다. 왼쪽 목차에서 한 장(章)씩 골라 본다 — 한 번에 한 주제만 떠서 필요한 것만 읽으면 된다. 각 장 첫머리의 번호 붙은 요약만 읽어도 그 장의 흐름은 잡히도록 해 두었다.
검색창에 이름이나 사건을 넣으면 장 구분을 넘어 페이지 전체에서 그 대목만 뽑아 준다. 나이는 모두 재판 개시일(1945년 11월 20일) 기준이다. 책에서 “쉰둘의 괴링”, “서른셋의 켈리”가 어떤 그림인지 감을 잡는 데 쓰라고 넣었다.


1914–1918. 이 전쟁을 모르면 나치를 설명할 수 없다. 피고인 대부분이 이 전쟁의 참전자이고, 히틀러의 정치는 이 전쟁의 패배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1918년 11월, 독일군은 아직 프랑스 땅 위에 있었고 독일 본토는 한 번도 침공당하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정전이 왔다. 그래서 독일 안에서는 “우리는 전장에서 지지 않았다, 후방이 등 뒤에서 찔렀다”는 설명이 퍼졌다. 사실이 아니다 — 군 수뇌부가 먼저 정부에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신화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을 20년 내내 갉아먹었고, ‘찌른 자’로 지목된 유대인·사회주의자가 나치의 첫 표적이 된다.
1914.06.2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살해됐다. 암살 자체는 지역 사건이었다. 그것을 세계대전으로 바꾼 것은 이미 유럽을 둘로 갈라 놓은 동맹의 그물이었다.

1914.08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자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고, 독일이 러시아와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이 참전했다. 5주 만에 유럽 강대국 전부가 전쟁에 들어갔다.

1914.09
독일은 서부에서 프랑스를 6주 안에 무너뜨리고 동부로 돌아설 계획이었다. 마른 전투에서 저지당하면서 계획은 깨졌고, 양측은 스위스 국경에서 북해까지 700km의 참호선을 팠다. 이후 3년 반 동안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1916
베르됭에서 약 70만, 솜에서 약 100만의 사상자가 났다. 솜 전투 첫날 하루에만 영국군 사상자가 5만 7천 명이었다. 이 전쟁은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누가 먼저 인력을 소진하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1917.04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과 짐머만 전보가 미국을 끌어들였다. 윌슨 대통령은 이 전쟁을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하게 만드는' 전쟁으로 규정했다. 이 명분이 훗날 국제연맹과 뉘른베르크의 사상적 뿌리가 된다.

1917.11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전쟁에서 이탈했다. 독일은 동부의 병력을 서부로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이 혁명은 이후 20년간 독일 우파에게 '유대–볼셰비즘'이라는 적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1918.11.11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빌헬름 2세가 퇴위했다. 정전은 콩피에뉴 숲의 열차 객차에서 조인됐다. 독일군은 아직 프랑스·벨기에 영토 안에 있었고, 독일 본토는 한 번도 침공당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배후중상설'이라는 신화의 재료가 된다.

1919.06.28
1914년 사라예보 암살로부터 꼭 5년 되는 날에 조인됐다. 독일은 영토의 13%와 인구 10%, 모든 식민지를 잃고 군대는 10만 명으로 제한됐다. 제231조는 전쟁 책임을 독일과 그 동맹에 돌렸고, 배상금은 1320억 금마르크로 정해졌다. 독일에서는 '명령된 평화'로 불리며 어떤 정부도 옹호할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1919.06
조약 제227조는 빌헬름 2세를 '국제 도덕과 조약의 신성함에 대한 최고의 범죄'로 기소하도록 규정했다. 네덜란드가 신병 인도를 거부해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독일 자체 전범재판은 901명 중 13명만 유죄를 냈다. 뉘른베르크의 설계자들은 이 실패를 알고 있었다.
1919–1923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러시아 네 제국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신생 국가들이 들어섰다. 국경은 민족 분포와 어긋났고, 어느 나라 안에나 소수민족이 남았다. 히틀러가 1938년부터 쓰게 될 명분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1919–1939. 민주주의가 어떻게 합법적인 절차만 밟아 독재로 바뀌는지를 보여 준 20년이다.
나치당이 자유선거에서 얻은 최고 득표율은 37.3%(1932년 7월)다. 과반을 넘긴 적이 없다. 히틀러가 총리가 된 것은 선거 결과가 아니라, 그를 이용해 좌파를 누를 수 있다고 믿은 보수 엘리트들의 계산 때문이다. 파펜이 힌덴부르크를 설득했고, 자기가 부총리로 히틀러를 통제하겠다고 말했다. 파펜은 뉘른베르크에서 무죄를 받는다.
1919.01
독일 최초의 의회민주주의가 출발부터 두 방향의 공격을 받았다. 좌파는 혁명이 배신당했다고 보았고, 우파는 공화국이 등 뒤에서 군을 찔렀다고 보았다. 헌법 제48조는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주었고, 이 조항이 결국 민주주의를 합법적으로 끝내는 통로가 된다.
1923
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독일이 소극적 저항으로 맞서면서 통화가 붕괴했다. 1달러가 4조 2천억 마르크까지 갔다. 11월 히틀러가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해 수감됐고,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구술했다. 프리크·괴링·헤스·프랑크가 모두 이 폭동에 관여했다.

1924–1929
도스 안과 미국 자본이 들어오면서 경제가 회복됐고, 나치당의 득표율은 2~3%대로 떨어졌다. 슈트레제만의 외교로 독일은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이 5년만 놓고 보면 바이마르는 성공한 공화국처럼 보였다.
1929.10
월가 붕괴로 미국 단기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갔다. 독일 실업자는 1932년 600만 명을 넘었다. 나치당 득표율은 1928년 2.6%에서 1930년 18.3%, 1932년 7월 37.3%로 뛴다. 나치의 부상은 이념의 승리가 아니라 경제 붕괴의 함수였다.

1933.01.30
나치당은 과반을 얻은 적이 없다. 히틀러는 선거로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그를 이용할 수 있다고 믿은 보수 엘리트들의 계산으로 임명됐다. 파펜이 힌덴부르크를 설득했고 '두 달이면 히틀러를 구석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1933.02.27
방화 다음 날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언론·집회·통신의 자유가 정지됐다. 이 명령은 1945년까지 한 번도 해제되지 않았다. 제3제국은 사실상 12년 내내 비상사태 상태로 통치됐다.
1933.03.23
의회가 스스로 입법권을 정부에 넘겼다. 공산당 의원은 이미 체포되거나 도주한 상태였고 중앙당이 찬성으로 돌아섰다. 사민당만 반대했다. 이후 독재는 '합법적'이라는 외피를 쓴다 — 뉘른베르크에서 피고들이 반복해 들고 나오게 될 외피다.

1933–1934
정당·노조·주정부·언론·직능단체가 차례로 해산되거나 나치 조직에 흡수됐다. 5월 노조가 해산되고 라이의 독일노동전선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5월 10일 베를린 등지에서 분서가 벌어졌다. 1934년 6월 장검의 밤으로 돌격대(SA) 지도부가 숙청되면서 친위대(SS)가 권력의 중심이 된다.

1935.09.15
제국시민법과 독일인의 혈통·명예 보호법이 나치당 전당대회가 열린 뉘른베르크에서 공포됐다. 유대인은 시민권을 잃었고 독일인과의 혼인·성관계가 금지됐다. 누가 유대인인가는 종교가 아니라 조부모의 수로 정의됐다.

1936–1938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조약 위반, 서방은 움직이지 않았다), 1936~39년 스페인 내전 개입,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서방이 매번 물러서면서 히틀러는 '저들은 싸우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는다.

1938.09.30
영국·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겼다. 체코는 협상 테이블에 없었다. 체임벌린은 '우리 시대의 평화'를 들고 런던으로 돌아왔고, 6개월 뒤 독일은 체코 전체를 삼켰다.

1938.11.09
독일 전역에서 시나고그 1400여 곳이 불타고 유대인 상점이 파괴됐다. 최소 91명이 살해되고 3만 명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피해자인 유대인 공동체에 10억 마르크의 '속죄금'이 부과됐다. 차별에서 폭력으로 넘어가는 문턱이었다.
1939.08.23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가 모스크바에서 조약에 서명했다. 비밀의정서로 폴란드와 발트 3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념적 원수였던 두 체제가 손을 잡으면서 폴란드 침공의 마지막 걸림돌이 사라졌다.


바이마르 공화국
제3제국
세 층은 양쪽 다 남아 있다. 다른 것은 층과 층을 잇는 두 연결이다. 왼쪽에서는 국민이 의회를 만들고 의회가 정부를 만든다 — 권력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오른쪽에서는 그 두 연결이 모두 끊겨, 이름만 같은 세 층 사이로 권력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
국민투표는 남아 있었다. 1934년 총통 겸직, 1936년 라인란트,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이 모두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찬성률은 매번 90%를 넘었다. 고를 것이 하나뿐인 투표는 결정이 아니라 이미 한 일을 추인하는 절차다. 1934년에는 주 의회도 폐지돼 지방에서 올라오는 견제까지 사라졌다.
1919–1933. 득표율만 따라가면 이야기가 거꾸로 읽힌다 — 결정적인 자리는 투표소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헌법을 정면으로 어긴 대목은 놀랄 만큼 적다. 대통령의 임명권, 헌법 제48조의 비상대권, 의회의 표결 — 전부 바이마르 헌법이 준 도구였다. 민주주의를 끝낸 것은 그 민주주의가 스스로 쥐여 준 열쇠였다. 그래서 “법을 어겼는가”는 이 시기를 읽는 데 별로 쓸모 있는 질문이 아니다. 물어야 할 것은 누가 그 열쇠를 넘겨주었고 무엇을 얻으려 했는가다.
1919.09
뮌헨의 작은 모임 '독일노동자당'에 육군이 정보원을 보냈다. 그 정보원이 상병 아돌프 히틀러였다. 감시하러 갔다가 연설을 하고 입당했다. 당원 수가 두 자리이던 시절이다.
1920.02.24
당명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으로 바꾸고 강령을 발표했다. 베르사유 조약 파기, 대(大)독일 통합, 그리고 유대인은 국민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이 여기 이미 들어 있다. 이 강령은 끝까지 개정되지 않는다.
1921.07
히틀러가 당수 자리를 요구하며 탈당을 걸었다. 그가 나가면 당이 없어지는 상태였으므로 요구가 관철됐다. 이때부터 당의 결정 구조가 토론에서 지도자 원리로 바뀐다. 8월에는 준군사조직 돌격대(SA)가 만들어진다.
1923.11
뮌헨의 맥주홀에서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경찰의 총격으로 하루 만에 끝났다. 히틀러는 5년형을 받고 9개월 만에 풀려났다. 감옥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방법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 총으로 국가를 뒤엎는 대신, 선거로 들어가서 안에서 부순다.

1925–1928
1925년 당을 재건하고 『나의 투쟁』을 냈다. 그러나 경제가 회복되던 이 시기에 나치는 팔리지 않았다. 1928년 총선 득표율 2.6%, 의석 12석. 정치 관측자들은 이 당을 끝난 것으로 보았다. 나치를 되살린 것은 나치가 아니라 대공황이다.
1929–1930
1929년 배상금 재조정안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나치는 보수 언론 재벌 후겐베르크의 신문·영화망을 통해 전국에 얼굴을 알렸다. 이듬해 대공황이 닥쳤다. 1930년 9월 총선에서 18.3%, 단숨에 제2당이 된다.

1932
4월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36.8%로 힌덴부르크에게 졌다. 7월 총선에서 37.3%로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에는 크게 못 미쳤다. 그리고 11월 총선에서 33.1%로 표가 줄었다. 자금은 바닥났고 당 안에서 노선 다툼이 터졌다. 이 시점의 나치는 정점을 지난 당이었다.
1932.11–1933.01
표가 줄어드는 두 달 동안, 파펜은 힌덴부르크를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 히틀러를 총리로 앉히되 내각을 보수파로 채우면 우리가 그를 조종할 수 있다. 내각 11석 중 나치는 3석이었다. 파펜은 자기가 부총리로 곁에 앉으면 된다고 했고, '두 달이면 히틀러를 구석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1933.01.30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됐다. 선거가 아니라 임명이다. 쿠데타도 아니었고 헌법 위반도 아니었다 — 바이마르 헌법이 대통령에게 준 권한 그대로였다. 나치가 자유선거에서 얻은 최고 득표율은 37.3%이고, 그 표는 이미 줄고 있었다.
1933.02–07
2월 의사당 방화 다음 날 긴급명령으로 기본권이 정지됐다. 3월 선거에서도 나치는 43.9%로 과반을 못 넘겼지만, 공산당 의원을 체포한 상태에서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5월 노조 해산, 6~7월 정당들이 차례로 해산하거나 스스로 문을 닫았다. 7월 14일, 나치당 외의 정당 창설을 금지하는 법이 나온다. 임명에서 일당국가까지 여섯 달이 걸렸다.

정식 이름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다. 이름에 ‘수권(授權)’이라는 말은 없다 — 권한을 넘긴다는 뜻으로 뒤에 붙은 별칭이다.
1933년 3월 23일 · 제국의회
헌법을 정면으로 어긴 대목이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정족수를 못 채운 것이 아니라, 정족수를 채우는 방법을 바꾼 것이다. 사람을 빼고 셈법을 고쳐서 만든 3분의 2였지만, 절차의 겉모습은 끝까지 유지됐다.
법을 만드는 권한과, 사람을 잡아 가두는 권한과, 군대를 묶어 두는 권한은 서로 다른 것이다. 셋이 각각 다른 문서에서 나왔다.
언론·집회·결사·통신·주거·신체의 자유를 정지시켰다. 영장 없이 잡아 무기한 가둘 수 있게 된 근거가 이것이다. 1945년까지 한 번도 해제되지 않았다 — 제3제국은 12년 내내 비상사태로 통치됐다.
정부가 의회 없이 법률을 만들 수 있게 했다. 헌법에 어긋나는 내용도 가능했다. 4년 시한이 붙어 있었고 1937·1939·1943년에 갱신된다 — 끝까지 형식은 지켜졌다.
총리직과 대통령직을 합쳐 총통이 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군이다 — 군인의 충성 서약이 헌법이 아니라 히틀러 개인에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군을 통해 그를 제어할 마지막 통로가 닫혔다.
맞지만 혼자서는 아니다. 수권법은 법을 만드는 권한을 줬을 뿐, 사람을 잡아 가두는 권한은 주지 않았다. 그것은 3주 앞선 화재령이 했다. 반대할 사람을 먼저 가둘 수 있었기 때문에 수권법이 통과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순서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 셋 중 의회 표결을 거친 것은 수권법 하나뿐이다. 나머지 둘은 대통령 긴급명령과, 대통령이 죽은 날 나온 정부 결정이었다. 「나치는 합법적으로 집권했다」는 말이 절반만 맞는 이유가 여기 있다 — 절차는 있었지만, 그 절차를 심사할 기관이 그때마다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1939–1945. 재판의 2번 죄목(침략전쟁)과 3번 죄목(전쟁범죄)의 사실관계가 여기 있다.
1939.09.01
독일이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국경 근처 글라이비츠 방송국 습격을 자작극으로 꾸며 명분을 만들었다. 9월 3일 영국·프랑스가 선전포고했고, 9월 17일 소련이 동쪽에서 진입했다. 뉘른베르크 2번 죄목(침략전쟁)의 출발점이다.

1940.04–06
덴마크·노르웨이(4월), 네덜란드·벨기에·프랑스(5~6월)가 차례로 무너졌다. 프랑스는 6주 만에 항복했고, 히틀러는 1918년 정전이 조인된 그 객차를 콩피에뉴로 끌어와 항복문서에 서명하게 했다.

1940.07–1941.05
괴링의 공군이 영국 제공권 장악에 실패했다. 히틀러는 상륙작전을 무기한 연기했다. 이어진 대공습으로 영국 민간인 4만여 명이 죽었지만 항복은 없었다. 괴링의 몰락은 여기서 시작된다.

1941.06.22
독일이 300만 병력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절멸전으로 기획됐다 — 정치위원 명령(포로로 잡은 공산당 정치위원을 즉결 처형하라)과 바르바로사 관할권 명령(민간인에 대한 범죄를 군법에서 면책)이 침공 전에 이미 하달돼 있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이 군대 뒤를 따라 들어갔다.

1941.12
12월 5일 소련이 모스크바 앞에서 반격에 성공해 전격전이 끝났다.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고, 12월 11일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이 시점에서 독일의 패배는 산업생산력의 문제로 확정된다.

1942.01.20
베를린 교외의 별장에서 15명의 고위 관료가 90분 동안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조정했다. 여기서 학살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이던 학살을 관료 기구 전체가 분담하기로 정리한 자리였다. 아이히만이 회의록을 작성했다.

1942–1943
엘알라메인(1942.10), 스탈린그라드(1943.2, 독일 6군 항복), 쿠르스크(1943.7). 세 전투로 세 전선에서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후 독일은 2년 넘게 지는 전쟁을 계속한다.

1944.06.06
서부에 제2전선이 열렸다. 6월 22일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중부집단군을 궤멸시켰다.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시도가 실패하고 5천여 명이 처형된다.

1945.02
처칠·루스벨트·스탈린이 전후 질서를 합의했다. 여기서 주요 전범의 처리 방침도 논의됐다. 처칠은 한때 즉결 처형을 선호했고, 스탈린은 '5만 명을 총살하자'고 말한 적이 있다. 재판을 관철시킨 것은 미국이었다.

1945.05.08
4월 30일 히틀러 자살, 5월 2일 베를린 함락, 5월 7~8일 무조건 항복. 유럽에서만 군인·민간인 약 4천만 명이 죽었다. 되니츠의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5월 23일 체포되면서 독일 국가기구가 소멸한다.

1945.08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고 9월 2일 일본이 항복했다. 그 사이 8월 8일, 런던에서 4개국이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에 서명한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재판의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Neville Chamberlain · 1869–1940
영국 총리 (1937–40)

Winston Churchill · 1874–1965
영국 총리 (1940–45, 1951–55)

Franklin D. Roosevelt · 1882–1945
미국 대통령 (1933–45)

Joseph Stalin · 1878–1953
소련 공산당 서기장


4번 죄목 ‘인도에 반한 죄’의 실체. 이 재판을 위해 새로 만들어야 했던 죄목이다.
‘최종 해결’은 어느 날 회의에서 결정돼 그대로 집행된 것이 아니다. 배제 → 격리 → 총살 → 산업적 절멸로 단계가 옮겨 갔고, 각 단계마다 현장의 실행이 정책보다 앞서 나가고 그것이 사후에 정책으로 승인되는 일이 반복됐다. 이 구조 때문에 뉘른베르크 검찰은 “누가 명령했는가”라는 하나의 문서를 끝내 제시하지 못했다. 대신 독일 관료제가 스스로 남긴 방대한 서류로 입증했다.
1933–1939
공직 추방(1933), 분서, 사업 몰수(아리아화), 뉘른베르크법(1935), 수정의 밤(1938). 6년에 걸쳐 유대인은 법적으로 독일 사회 바깥에 놓였다. 살해는 아직 정책이 아니었다 — 목표는 이민 압박이었고, 실제로 독일 유대인 절반가량이 1939년까지 국외로 떠났다.
1939–1941
폴란드 점령 후 유대인이 게토에 집단 수용됐다. 바르샤바 게토에는 40만 명이 원래 인구의 몇 배 밀도로 갇혔다. 기아와 질병으로 게토에서만 수십만 명이 죽었다.

1941.06–
바르바로사와 함께 아인자츠그루펜 4개 부대가 소련 점령지에 들어가 유대인을 마을 단위로 모아 구덩이 앞에서 총살했다. 1941년 9월 키이우 바비야르에서 이틀 동안 3만 3771명이 살해됐다. 이 단계에서만 약 150만 명이 죽었다.

1942–1944
라인하르트 작전으로 베우제츠·소비보르·트레블린카가 세워졌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와 헤움노가 가동됐다. 총살에서 가스로 방법이 바뀐 이유 중 하나는 '집행자의 심리적 부담'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열차로 사람을 실어 왔다.

1943.04
마지막 남은 게토 주민들이 무장 저항에 나섰다. 한 달 가까이 버텼고 게토는 완전히 파괴됐다. 진압을 지휘한 슈트로프가 만든 사진 보고서는 뉘른베르크에서 검찰 증거로 제출됐다.

1945
1945년 1월 아우슈비츠, 4월 베르겐–벨젠·부헨발트·다하우가 해방됐다. 연합군이 촬영한 필름은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상영됐고, 피고들의 반응을 길버트가 기록으로 남겼다. 살해된 유대인은 약 600만 명, 여기에 소련군 포로 300만여 명, 폴란드 민간인, 로마·신티, 장애인, 정치범이 더해진다.



1871–1945. 앞의 연표가 “무슨 일이 있었나”라면, 이 장은 같은 기간을 “돈이 어떻게 움직였나”로 다시 본다.
1928년과 1932년 사이에 독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 아니다. 바뀐 것은 실업률이다. 나치 득표율 곡선과 실업률 곡선은 거의 겹친다. 그래서 이 장은 인물의 성격이나 이념보다 앞에 놓인다 — 켈리가 감방에서 확인하게 될 결론, “이들은 환경의 산물이었다”는 말의 ‘환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가 여기 있다.
1871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이기고 독일 제국이 섰다. 프랑스가 문 배상금 50억 프랑이 한꺼번에 들어왔고, 그 금으로 제국은 통화를 마르크로 통일하고 금본위제를 깔았다. 돈이 넘치면서 회사 설립 붐이 일었다 — 이 몇 해를 '창업 시대(그륀더차이트)'라 부른다.

1873
5월 빈 증시가 무너지면서 붐이 끝났다. 설립된 회사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불황이 20여 년 이어졌다. 이때 처음으로 경제 실패의 책임을 유대인 금융가에게 돌리는 주장이 정치적으로 팔리기 시작한다. 6년 뒤 '반유대주의'라는 말이 만들어진다.
1914–1918
영국이 전비의 상당 부분을 증세로 조달한 것과 달리 독일은 대부분을 국채로 메웠다. 전제는 하나였다 — 이기면 상대에게 배상금을 물려 갚는다. 1918년 러시아에 그렇게 했다(브레스트–리토프스크). 그런데 진 쪽이 독일이 되었다. 빚은 남았고 갚을 재원은 사라졌다.
1921.05
런던 지불안이 배상 총액을 1320억 금마르크로 정했다. 실제로 즉시 갚아야 하는 몫은 그보다 훨씬 작게 설계됐지만(A·B·C 세 종류 채권으로 나눠 C는 사실상 유보), 독일에서 유통된 것은 1320억이라는 숫자 하나였다. 갚을 수 없는 액수라는 감각이 정치의 재료가 된다.
1923
프랑스가 배상 지연을 이유로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했다. 독일 정부는 노동자에게 파업을 지시하고 그 임금을 돈을 찍어서 지급했다. 1달러가 4조 2천억 마르크까지 갔다. 아침에 산 빵값이 저녁에 달랐고, 저축과 연금이 통째로 증발했다. 11월 렌텐마르크가 나오면서 1조 마르크가 1렌텐마르크로 교환됐다 — 화폐를 믿지 않게 된 중산층이 이 시기의 산물이다.

1924–1929
도스 안으로 배상 일정이 완화되고 미국 자본이 들어왔다. 도시가 재건되고 문화가 꽃폈다. 그러나 들어온 돈의 상당량이 언제든 빼 갈 수 있는 단기 자금이었다. 번영은 실적이 아니라 대출 위에 서 있었다.
1929–1932
월가가 무너지자 단기 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갔다. 브뤼닝 총리는 여기에 긴축으로 대응했다 — 지출을 깎고 임금을 내렸다. 초인플레이션의 기억 때문에 돈을 푸는 선택지가 정치적으로 봉쇄돼 있었다. 실업자는 600만을 넘었다. 나치 득표율은 1928년 2.6%에서 1932년 7월 37.3%로 뛴다.

1933–1936
히틀러는 재군비로 실업을 흡수했다. 문제는 그 돈을 어디서 났는지가 드러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자 열강을 자극한다). 제국은행 총재 샤흐트가 유령회사 이름의 어음(메포 어음)을 만들어 군수 대금을 결제했다. 약 120억 라이히스마르크가 국가 예산에 잡히지 않고 움직였다. 뉘른베르크에서 샤흐트가 무죄를 받은 것은 이 재군비가 '침략 공모'인지 판단이 갈렸기 때문이다.

1936
괴링이 4개년계획 전권위원이 되면서 경제 운용이 채산성에서 자급자족으로 넘어갔다. 수입에 의존하는 원유·고무를 국내 합성으로 대체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쏟았다. 목표는 명시적이었다 — 4년 안에 전쟁을 할 수 있는 경제를 만든다. 샤흐트는 이 노선에 반대하다 1937년 경제장관에서 물러난다.
1939–1945
점령지에서 자원·식량·미술품이 빠져나갔고, 점령 비용까지 현지에 청구했다. 노동력은 끌어왔다 — 1944년 기준 독일 안에서 일한 외국인 노동자와 전쟁포로가 약 700만 명이다. 1942년 군수장관이 된 슈페어 아래에서 군수 생산은 오히려 늘었는데, 그 증산의 상당 부분이 강제노동 위에 서 있었다. 자우켈(노동력 동원)과 슈페어(생산)가 뉘른베르크에 선 이유다.

2세기–1945년. 혐오에는 근거가 없었지만 역사는 있었다. 그 역사가 어떻게 쌓였는지를 본다.
이 장에 나오는 주장은 전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전부 당대에 이미 반박됐다. 교황이 칙서로 부정했고, 신문이 위조를 지면으로 폭로했고, 재판에서 무죄가 났다. 그런데도 이야기들은 살아남아 다음 세기로 넘어갔다. 소문이 도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 소문이 설명해 주는 불안이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전염병·공황·패전이 올 때마다 같은 이야기가 다시 나온 것이 그 증거다.
2~4세기
초기 기독교가 로마 안에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로마가 아니라 유대인에게 돌리는 서술이 굳었다. 이 신살자(神殺者) 비난이 이후 천 년 넘게 모든 반유대 정서의 바탕에 깔린다. 종교적 주장이지 인종 주장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 개종하면 벗어날 수 있었다.
11~13세기
교회가 기독교인에게 이자 받는 대부를 금지했다. 동시에 유대인은 길드에서 배제돼 수공업·농업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남은 자리가 대부업이었다. 필요해서 불러 놓고, 빚을 갚을 때가 되면 미워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왕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세금원으로 삼았다가 빚이 커지면 추방했다.
1144
잉글랜드 노리치에서 소년 윌리엄이 죽은 채 발견됐다. 유대인이 종교 의식을 위해 기독교 아이를 죽여 피를 썼다는 주장이 퍼졌다 — 기록에 남은 최초의 혈액 명예훼손이다. 근거는 없었지만 이야기 형태가 강력해서 유럽 전역으로 복제됐고, 20세기까지 재판과 학살의 명분으로 쓰였다.
1348–1350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죽었다. 원인을 모르는 재난 앞에서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349년 2월 스트라스부르에서는 페스트가 도시에 닿기도 전에 유대인 수백 명이 산 채로 불태워졌다. 교황이 두 차례 칙서로 근거 없음을 밝혔으나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1290–1492
1290년 잉글랜드, 1394년 프랑스, 그리고 1492년 스페인이 유대인을 추방했다. 스페인에서는 개종한 사람들까지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감시 대상이 되었다 — 개종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관념이 여기서 처음 제도화된다. 종교에서 혈통으로 넘어가는 첫 걸음이다.
1516
베네치아가 유대인 거주 구역을 한 섬으로 제한하고 밤에 문을 잠갔다. 그 구역의 이름이 게토였다. 격리는 '보호'라는 명분으로 시작됐지만 결과는 하나였다 — 유대인은 이웃이 아니라 구경거리가 되었고,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되면 어떤 이야기든 믿을 수 있게 된다.
1791–1871
프랑스 혁명이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었고, 독일에서는 1871년 제국 성립과 함께 법적 평등이 완성됐다. 유대인이 대학·언론·금융·의료로 빠르게 진출했다. 그러자 성공 자체가 새로운 혐의가 되었다 — 소수인데 왜 눈에 띄는 자리에 많은가, 라는 물음이 음모의 형태로 답을 얻는다.
1879
언론인 빌헬름 마르가 이 단어를 대중화하고 '반유대 연맹'을 세웠다. 새로운 것은 근거였다. 종교가 아니라 인종을 든 것이다. 유대인은 믿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 종족으로 규정됐다. 이 전환이 결정적이다 — 개종이 출구였던 천 년이 여기서 닫힌다. 1873년 공황의 기억이 이 주장에 청중을 만들어 주었다.
1894–1906
프랑스 육군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간첩으로 몰려 유배됐다. 진범이 드러난 뒤에도 군은 판결을 지키려 했다. 12년 만에 무죄가 확정됐지만, 이 사건은 법치가 자리 잡은 공화국에서도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었다.
1903–1921
유대인 지도자들이 세계 지배를 모의한 회의록이라는 문서가 러시아에서 나왔다. 위조였다. 1921년 런던 타임스가 1864년 프랑스 풍자문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임을 지면으로 밝혔다. 그런데도 판매는 늘었다. 미국에서는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자기 신문에 연재하고 소책자로 50만 부를 뿌렸다. 히틀러는 뮌헨에서 그 독일어판을 읽었다.

1918–1919
독일군은 본토가 침공당하기 전에 정전에 응했다. 그 사실이 배후중상설의 재료가 됐다 — 군은 지지 않았는데 후방의 유대인과 사회주의자가 등을 찔렀다는 이야기다. 1919년 힌덴부르크가 의회 조사에서 이 주장을 입에 올리면서 신화에 권위가 붙었다. 같은 시기 러시아 혁명이 '유대–볼셰비즘'이라는 또 하나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1923–1945
슈트라이허가 창간한 주간지 슈튀르머는 혈액 명예훼손을 포함해 중세의 소문을 그대로 되살려 실었다. 나치가 발명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 이미 있던 것을 국가가 예산과 법률과 경찰을 붙여 집행했을 뿐이다. 1935년 뉘른베르크법이 '유대인'을 조부모의 수로 정의하면서, 천 년 동안 말이던 것이 행정 절차가 되었다.

국제군사재판소(IMT). 1945년 11월 20일 개정, 1946년 10월 1일 판결.

재판이 당연한 결론은 아니었다. 처칠은 주요 전범을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하는 안을 지지했다. 스탈린은 독일군 장교 5만 명을 총살하자고 말한 적이 있고, 미국 재무장관 모겐소는 독일을 농업국으로 되돌리는 안을 냈다. 재판을 관철시킨 것은 미국, 그중에서도 로버트 잭슨이었다.
잭슨의 논거는 실용적이었다. 총살은 승자의 보복으로 남지만, 재판은 기록을 남긴다. 독일이 스스로 만든 문서로 유죄를 입증하면 훗날 누구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뉘른베르크의 증거는 생존자 증언이 아니라 독일 관청의 서류가 중심이 되었다.
1945년 8월 8일, 4개국이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에 서명했다. 여기서 세 가지 죄가 처음으로 성문화됐고, 두 가지 방어논리가 미리 봉쇄됐다.
다른 세 죄를 저지르기 위한 공동계획에 참여한 죄. 가장 논란이 컸고 판사들 사이에서도 반대가 많아, 결국 ‘침략전쟁을 위한 공모’로 좁혀졌다. 22명 중 8명만 유죄.
침략전쟁의 계획·준비·개시·수행. 재판부는 이것을 “최고의 국제범죄”라 불렀다 — 다른 모든 범죄의 악을 그 안에 누적해 담고 있기 때문이다. 12명 유죄.
포로 살해, 인질 처형, 민간인 강제노동, 약탈, 무의미한 파괴. 기존 헤이그·제네바 협약에 근거가 있어 법적으로 가장 단단했다. 16명 유죄.
민간인에 대한 살해·절멸·노예화·박해. 뉘른베르크에서 새로 만들어진 개념이고 오늘날 국제형사재판소까지 이어진다. 16명 유죄.
제7조 — 국가원수나 정부 고관이라는 지위는 책임을 면하게 하지 않는다. 제8조 — 상급자의 명령에 따랐다는 사실은 책임을 면하게 하지 않으며, 양형에서만 참작될 수 있다. 이 두 조항이 없었다면 카이텔과 요들의 방어는 성립했을 것이다.
영어·독일어·프랑스어·러시아어가 동시에 오갔다. IBM이 장비를 댔고 법정 전원이 헤드폰을 썼다. 대규모 동시통역이 국제재판에 쓰인 첫 사례이고, 오늘날 국제회의 통역 방식의 원형이다.
미군이 압수한 독일 관청 문서가 증거의 뼈대였다. 프랑크는 자기 일기 38권을 스스로 제출해 최대의 자기 유죄 증거를 만들었다. 검찰이 부른 증인은 33명뿐이다.
4개국이 정판사·예비판사를 각 1명씩 냈다. 유죄와 양형 모두 정판사 4명의 다수결로 정했고 가부동수면 재판장 쪽이 이겼다. 세 건의 무죄는 표가 갈린 결과다.
개인만이 아니라 조직도 심판 대상이었다. 나치당 지도부·친위대·게슈타포·보안국이 범죄조직으로 판정됐고, 돌격대·내각·군 총사령부는 인정되지 않았다.


1945.05–08
룩셈부르크 몬도르프레뱅의 팰리스 호텔이 나치 지도부 수용소가 되었다. 앤드러스 대령이 지휘했고 켈리가 정신과의로 배치됐다. 전기 철조망과 감시탑이 둘러싼 호텔에서 괴링의 마약 중독을 끊기는 일이 켈리의 첫 임무였다.

1945.08.08
미·영·프·소 4개국이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에 서명했다. 세 가지가 처음으로 성문화됐다 —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그리고 두 가지 방어가 미리 봉쇄됐다: 국가원수라는 지위(제7조)와 상급자의 명령(제8조).
1945.08.20
도시의 91%가 폭격으로 파괴됐는데 법원 청사와 붙어 있는 형무소는 살아남았다. 피고를 옮기지 않고 법정에 세울 수 있는 건물이 유럽에 이곳뿐이었다. 나치 전당대회의 도시라는 상징성도 함께 고려됐다.

1945.10.18–19
베를린에서 기소장이 제출되고, 뉘른베르크에서 에어리 니브가 피고 전원에게 직접 전달했다. 일주일 뒤 라이가 감방에서 자살한다.

1945.11.20
오전 10시, 로런스 재판장이 개정을 선언했다. 피고 21명이 2열로 앉았다. 잭슨의 개정 연설이 이날 오후에 나왔다.

1945.11.29
검찰이 해방된 수용소의 기록영화를 법정에서 틀었다. 법정 조명을 끄고 피고석에만 조명을 남겼다. 길버트는 피고들의 표정을 하나씩 기록했다. 이날 밤 감방을 돌며 남긴 메모가 『뉘른베르크 일기』의 가장 유명한 대목이 된다.

1946.01
켈리가 재판 도중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갔다. 길버트와의 갈등, 그리고 자료 출판을 둘러싼 경쟁이 배경으로 지목된다. 후임으로 레온 골든존이 왔다.
1946.03–04
3월, 괴링이 증언대에 서서 잭슨의 반대신문을 받아넘겼다. 법정 분위기가 한때 흔들렸고, 이후 영국의 맥스웰 파이프가 나서 그를 무너뜨렸다. 4월 15일 아우슈비츠 소장 회스가 증인으로 나와 자신이 지휘한 대량학살을 담담하게 진술했다.

1946.09.30–10.01
이틀에 걸쳐 판결이 낭독됐다. 22명 중 12명 사형, 3명 종신형, 4명 유기징역, 3명 무죄. 조직 판정에서는 나치당 지도부·친위대·게슈타포·보안국이 범죄조직으로 인정됐고, 돌격대·내각·군 총사령부는 인정되지 않았다.

1946.10.15
처형 두 시간여 전, 괴링이 청산가리 캡슐로 자살했다. 캡슐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12년 뒤 켈리도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끊는다.
1946.10.16
오전 1시 11분부터 형무소 체육관에서 10명이 차례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집행은 존 C. 우즈 상사가 맡았다. 낙하 거리가 짧아 즉사하지 않은 사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시신은 뮌헨에서 화장돼 이자르 강에 뿌려졌다. 무덤이 순례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946–1949
텔퍼드 테일러가 지휘한 미국 단독 재판 12건이 이어졌다. 의사 재판(인체실험), 법관 재판(사법부), 아인자츠그루펜 재판, IG 파르벤·크루프·플리크 재판(기업), 인질 재판, 고위사령부 재판 등이다. 185명이 기소돼 24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다수가 1950년대에 감형·석방됐다.

‘평화에 반한 죄’와 ‘인도에 반한 죄’는 행위 당시 존재하지 않던 죄목이다. 재판부는 이 죄들이 이미 관습국제법 안에 있었고 헌장은 그것을 선언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지금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쟁점이다.
연합국의 행위는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다. 드레스덴·함부르크 폭격, 독소조약에 의한 폴란드 분할, 카틴 학살이 그렇다. 소련은 카틴을 독일 소행으로 기소했다가 증거가 무너져 판결문에서 빠졌다.
군 총사령부가 범죄조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 “군은 무관했다”로 오독됐다. 판결문은 그런 취지가 아니었고 카이텔·요들은 사형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 오독이 전후 서독에서 오래 살아남았다.
제노사이드 협약(1948), 제네바 협약 개정(1949), 국제형사재판소(2002)가 모두 뉘른베르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명령에 따랐다’가 방어가 되지 않는다는 원칙도 여기서 나왔다.
죄목별 결과와 형량. G 유죄 · I 기소되었으나 무죄 · — 해당 죄목 미기소.
| 피고인 | 직위 | 1 공모 | 2 침략 | 3 전쟁범죄 | 4 인도에 반한 죄 | 형량 | 나이 | IQ |
|---|---|---|---|---|---|---|---|---|
| 헤르만 괴링 | 제국원수 · 공군 총사령관 · 4개년계획 총책 | G | G | G | G | 교수형 — 집행 전날 자살 | 52 | 138 |
| 루돌프 헤스 | 총통 대리 (1933–41) | G | G | I | I | 종신형 | 51 | 120 |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 외무장관 (1938–45) | G | G | G | G | 교수형 | 52 | 129 |
| 빌헬름 카이텔 |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총장 | G | G | G | G | 교수형 | 63 | 129 |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국가보안본부(RSHA) 수장 (1943–45) | I | — | G | G | 교수형 | 42 | 113 |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나치 이념가 · 동방점령지역 장관 | G | G | G | G | 교수형 | 52 | 127 |
| 한스 프랑크 | 폴란드 총독부 총독 (1939–45) | I | — | G | G | 교수형 | 45 | 130 |
| 빌헬름 프리크 | 내무장관 (1933–43)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 | I | G | G | G | 교수형 | 68 | 124 |
|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 프랑켄 관구장 · 『슈튀르머』 발행인 | I | — | — | G | 교수형 | 60 | 106 |
| 발터 풍크 | 경제장관 (1938–45) · 제국은행 총재 | I | G | G | G | 종신형 | 55 | 124 |
| 햘마르 샤흐트 | 제국은행 총재 · 경제장관 (1934–37) | I | I | — | — | 무죄 | 68 | 143 |
| 카를 되니츠 | U보트 사령관 · 해군 총사령관 · 최후의 제국 대통령 | I | G | G | — | 금고 10년 | 54 | 138 |
| 에리히 레더 | 해군 총사령관 (1928–43) | G | G | G | — | 종신형 | 69 | 134 |
| 발두어 폰 시라흐 | 히틀러 유겐트 지도자 · 빈 관구장 | I | — | — | G | 금고 20년 | 38 | 130 |
| 프리츠 자우켈 | 노동력 동원 전권위원 (1942–45) | I | I | G | G | 교수형 | 51 | 118 |
| 알프레트 요들 | OKW 작전부장 (1939–45) | G | G | G | G | 교수형 | 55 | 127 |
| 프란츠 폰 파펜 | 전 총리 (1932) · 부총리 (1933–34) | I | I | — | — | 무죄 | 66 | 134 |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오스트리아 병합의 실행자 · 네덜란드 제국판무관 | I | G | G | G | 교수형 | 53 | 141 |
| 알베르트 슈페어 | 히틀러의 건축가 · 군수장관 (1942–45) | I | I | G | G | 금고 20년 | 40 | 128 |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 외무장관 (1932–38)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 | G | G | G | G | 금고 15년 | 72 | 125 |
| 한스 프리체 | 선전부 방송국장 | I | — | I | I | 무죄 | 45 | 130 |
| 마르틴 보어만 | 당 사무국장 · 히틀러 개인비서 — 궐석 재판 | I | — | G | G | 궐석 사형 | 45 | — |
| 로베르트 라이 | 독일노동전선 대표 — 재판 개시 전 자살 | I | — | I | I | 판결 없음 (재판 전 자살) | 55 | — |
| 구스타프 크루프 | 크루프 재벌 총수 — 건강 사유로 재판 불능 | I | — | I | I | 판결 없음 (재판 불능) | 75 | — |
이 책의 핵심 장치. 켈리가 무엇을 하려 했고 왜 실패했는지를 알면 책이 훨씬 잘 읽힌다.
좌우대칭 잉크반점 10장을 차례로 보여 주고 “무엇으로 보입니까”를 묻는다. 그림 자체에는 정답이 없다. 답이 없는 자극 앞에서 사람은 자기 안의 것을 꺼내 붙이는데, 그 붙이는 방식을 읽는다는 것이 이 검사의 발상이다.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반점의 어느 부분을 썼는가, 형태를 보았는가 색을 보았는가, 움직임을 넣었는가가 채점 대상이다.
1940년대에 이 검사는 지금과 위상이 달랐다. 성격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정밀 도구로 여겨졌고, 켈리는 미국에서 이 검사를 가장 잘 아는 소수에 속했다. 그가 “나치의 정신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은 데는 근거가 있었던 셈이다.



켈리와 길버트는 같은 자료를 놓고 정반대 결론에 도달했다.
켈리: 특징적인 것이 없다. 정신병자도 없다. 그러므로 ‘나치 성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들은 특정한 정치·사회 조건이 만들어 낸 평범한 야심가다. 그가 정말 무섭게 여긴 결론은 여기서 나온다 — 같은 조건이면 미국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길버트: 병명은 없지만 공통점은 있다. 공감 능력의 결여, 그리고 권위에 대한 도착적 복종. 그는 이것을 병리로 읽었다.
원자료는 이후 수십 년간 여러 연구자에게 재분석됐다. 1975년 몰리시와 하퍼는 이 자료를 익명으로 섞어 미국 표본과 함께 채점하게 했는데, 채점자들은 나치 기록을 골라내지 못했다. 논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켈리가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찾을 것이 애초에 없었던 것인가. 후자라면 뉘른베르크 피고석에 앉았던 사람들과 그 바깥 사람들 사이에 심리적 경계선이 없다는 뜻이 된다. 15년 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보고 ‘악의 평범성’이라 부른 것, 그리고 밀그램의 복종 실험이 보여 준 것이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길버트가 웩슬러–벨뷰 척도로 측정한 값. 미국 성인 평균이 100이고 128 이상이 상위 2.2%에 해당한다. 21명의 평균은 128이었다.
| 피고인 | IQ | 판결 | |
|---|---|---|---|
| 햘마르 샤흐트 | 143 | 무죄 | |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141 | 교수형 | |
| 헤르만 괴링 | 138 | 교수형 — 집행 전날 자살 | |
| 카를 되니츠 | 138 | 금고 10년 | |
| 에리히 레더 | 134 | 종신형 | |
| 프란츠 폰 파펜 | 134 | 무죄 | |
| 한스 프랑크 | 130 | 교수형 | |
| 발두어 폰 시라흐 | 130 | 금고 20년 | |
| 한스 프리체 | 130 | 무죄 | |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 129 | 교수형 | |
| 빌헬름 카이텔 | 129 | 교수형 | |
| 알베르트 슈페어 | 128 | 금고 20년 | |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127 | 교수형 | |
| 알프레트 요들 | 127 | 교수형 | |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 125 | 금고 15년 | |
| 빌헬름 프리크 | 124 | 교수형 | |
| 발터 풍크 | 124 | 종신형 | |
| 루돌프 헤스 | 120 | 종신형 | |
| 프리츠 자우켈 | 118 | 교수형 | |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113 | 교수형 | |
|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 106 | 교수형 |
이 표가 말해 주는 것은 하나뿐이다 — 지능은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 최고점을 받은 샤흐트는 무죄를 받았고, 최저점을 받은 슈트라이허는 교수형을 받았다. 그 사이에 아무 상관관계도 없다. 켈리가 찾던 ‘표지’가 여기에도 없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1946년 10월 이후.
오전 1시 11분부터 형무소 체육관에서 10명이 차례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존 C. 우즈 상사가 집행했고 낙하 거리가 짧아 즉사하지 않은 사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시신은 뮌헨에서 화장돼 이자르 강에 뿌려졌다 — 무덤이 순례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유기·종신형 7명이 베를린 슈판다우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66년 슈페어와 시라흐가 나간 뒤 헤스 한 사람을 위해 4개국이 21년간 감옥을 운영했고, 1987년 헤스가 죽자마자 철거됐다.
텔퍼드 테일러가 지휘한 미국 단독 재판. 의사 재판·법관 재판·아인자츠그루펜 재판·기업 재판(IG 파르벤, 크루프, 플리크) 등 185명이 기소돼 24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다수가 1950년대에 감형·석방됐다.
인체실험을 자행한 의사 23명을 심판한 재판에서 뉘른베르크 강령이 나왔다. 피험자의 자발적 동의를 의학 연구의 절대 조건으로 삼은 이 열 개 조항이 오늘날 연구윤리(IRB)의 뿌리다.
제노사이드 협약(1948), 제네바 협약 개정(1949), 구유고·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1993·1994), 국제형사재판소 설립(2002)이 모두 뉘른베르크의 연장선에 있다.
뉘른베르크를 떠난 지 12년 뒤, 켈리는 가족이 보는 앞에서 청산가리를 삼켰다. 45세였다. 경찰은 캡슐이 뉘른베르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추정했고 가족은 부인했다. 그가 나치에게서 찾지 못한 답이 그를 어디로 데려갔는지가 이 책의 마지막 질문이다.
책에 설명 없이 나오는 조직·개념·법률 용어.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1920년 독일노동자당(DAP)에서 개칭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당 지도부'(Leadership Corps)가 범죄조직으로 판정됐지만 일반 당원 전체는 아니었다.
직역하면 '보호대'. 히틀러 개인 경호대로 출발해 힘러 아래에서 경찰·정보·강제수용소·무장부대를 모두 거느린 국가 안의 국가가 되었다. 뉘른베르크에서 범죄조직으로 판정됐다.
'폭풍대'. 나치당 초기의 거리 폭력을 담당한 준군사조직이다. 1934년 장검의 밤으로 지도부가 숙청된 뒤 껍데기만 남았고, 그래서 뉘른베르크에서는 범죄조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비밀국가경찰'의 줄임말. 괴링이 프로이센에서 만들었고 곧 힘러에게 넘어갔다. 영장 없는 '보호구금' 권한이 핵심이었다. 범죄조직 판정을 받았다.
나치당의 정보기관. 하이드리히가 이끌었고 나중에 국가보안본부에 흡수됐다. 범죄조직 판정을 받았다.
1939년 게슈타포·형사경찰(Kripo)·보안국을 하나로 묶은 기구. 하이드리히→칼텐브루너로 이어졌고 홀로코스트의 실행 사령부였다. 아이히만의 유대인 담당과(IV B4)가 여기 속했다.
'특별출동집단'. 소련 침공과 함께 군대 뒤를 따라 들어가 유대인·공산당 간부·로마인을 총살한 이동학살부대다. 4개 집단(A~D)이 100만 명 이상을 살해했다.
1938년 히틀러가 국방부를 없애고 만든 군 최고기구. 총장이 카이텔, 작전부장이 요들이었다. 뉘른베르크에서 범죄조직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 판정이 훗날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근거로 오독된다.
'지도자'. 1934년 힌덴부르크 사후 히틀러가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쳐 쓴 칭호다. 함께 온 것이 지도자원리(Führerprinzip) — 명령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고 책임은 오직 지도자에게만 있다는 원칙이다. 뉘른베르크 피고들이 반복해 기댄 논리이자, 헌장 제8조가 미리 막아 둔 논리다.
전기 용어에서 온 말로 '같은 회로에 맞춰 정렬시킨다'는 뜻이다. 1933~34년에 정당·노조·언론·주정부·직능단체를 나치 조직에 흡수하거나 해산시킨 과정을 가리킨다.
'삶의 공간'. 독일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동유럽으로 확장해 그곳 주민을 몰아내거나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다. 바르바로사 작전과 동부 절멸정책의 이념적 근거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유럽 유대인 절멸 정책을 가리키는 나치의 관료적 완곡어다. 문서에 학살이라는 말 대신 이런 표현만 남았다는 점이 뉘른베르크 검찰의 입증 과제이기도 했다.
'등 뒤의 칼' 신화. 1차 대전에서 독일군은 전장에서 지지 않았고 후방의 유대인·사회주의자·공화주의자가 배신해서 졌다는 주장이다. 사실이 아니지만 바이마르 내내 우파의 결집 논리였고, 나치 반유대주의의 기둥이 되었다.
1938년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오스트리아 총리로서 독일군 진주를 '요청'하는 형식이 취해졌다.
1938년 11월 9~10일의 전국적 유대인 습격. 깨진 유리창이 거리에 반짝였다는 데서 온 이름인데, 사건의 성격을 미화하는 표현이라 요즘은 '11월 포그롬'으로 부르기도 한다.
1934년 6월 30일~7월 2일, 히틀러가 돌격대 지도부 룀 등을 숙청한 사건. 이 유혈 숙청이 사후에 '국가긴급방위'로 합법화되면서 법치의 마지막 형식이 사라졌다.
룩셈부르크 몬도르프레뱅의 팰리스 호텔에 설치된 고위 나치 수용소. 1945년 5~8월에 86명이 수용됐다. 이 책의 1막이 벌어지는 곳이다. 영국이 운영한 기술자 수용소는 '더스트빈'이라 불렸다.
뉘른베르크 법원 청사의 법정. 피고석·판사석·통역 부스를 넣기 위해 개조됐다. 지금도 남아 있고 기념관으로 공개된다.
베를린의 형무소. 유기·종신형을 받은 7명이 여기서 복역했다. 1966년 슈페어와 시라흐가 나간 뒤 헤스 한 사람을 위해 4개국이 21년간 운영했고, 1987년 헤스가 죽자 곧바로 철거됐다.
1945년 8월 8일 4개국이 서명한 국제군사재판소의 설립 근거. 세 죄목을 정의하고, 국가원수 면책(제7조)과 상급자 명령(제8조)을 방어사유에서 배제했다.
침략전쟁의 계획·개시·수행. 재판부는 이것을 '최고의 국제범죄'라고 불렀다 — 다른 모든 전쟁범죄의 악을 그 안에 누적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죄목 1(공모)과 2가 여기 해당한다.
민간인에 대한 살해·절멸·노예화·박해. 뉘른베르크에서 처음 성문화된 개념이고, 오늘날 국제형사재판소(ICC)까지 이어진다. 다만 재판부는 1939년 이전 독일 국내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는 침략전쟁과의 연결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할 밖으로 두었다.
'법 없이 범죄 없다'. 뉘른베르크에 대한 가장 강한 법적 비판이다 — 행위 당시 존재하지 않던 죄목으로 처벌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 죄들이 이미 관습국제법에 있었다고 답했다.
재판을 이긴 쪽만 열었고 연합국의 범죄(드레스덴 폭격, 카틴 학살, 독소조약의 폴란드 분할)는 다뤄지지 않았다는 비판. 실제로 소련은 카틴을 독일 소행으로 기소했다가 증거가 약해 판결문에서 빠졌다.
좌우대칭 잉크반점 10장을 보여주고 무엇이 보이는지 묻는 투사검사. 켈리는 이것으로 '나치의 정신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검사 결과의 해석을 두고 켈리와 길버트가 갈라졌고, 원자료는 이후 수십 년간 여러 연구자에게 재분석되며 논쟁을 이어갔다.
뉘른베르크에는 배심이 없었다. 4개국이 각각 정판사 1명과 예비판사 1명을 냈고, 유죄와 양형 모두 판사 4명의 다수결로 정했다. 가부동수면 재판장이 속한 쪽이 이겼기 때문에, 세 건의 무죄는 표가 갈린 결과다.
뉘른베르크는 4개 언어(영·독·불·러) 동시통역이 대규모로 쓰인 첫 국제재판이다. IBM이 장비를 댔고 법정 전원이 헤드폰을 썼다. 오늘날 국제회의 통역 방식의 원형이다.
감방 쪽 사람들. 네 명이 이 책의 축이다.

Douglas M. Kelley · 1912–1958
미 육군 정신과 군의관 — 이 책의 주인공
Gustave M. Gilbert · 1911–1977
미 육군 형무소 심리학자
Leon Goldensohn · 1911–1961
켈리의 후임 정신과 군의관 (1946년 1월~)

Burton C. Andrus · 1892–1977
애시캔·뉘른베르크 형무소장 (대령)
기소된 사람은 24명, 실제로 심리를 받은 사람은 22명이다. 라이는 재판 전에 자살했고 크루프는 건강 때문에 재판 자체가 열리지 않았으며 보어만은 궐석이었다. 순서는 나치 이전 경력 → 나치에서의 활동 → 재판 → 그 이후다.

Hermann Göring · 1893–1946
제국원수 · 공군 총사령관 · 4개년계획 총책

Rudolf Heß · 1894–1987
총통 대리 (1933–41)

Joachim von Ribbentrop · 1893–1946
외무장관 (1938–45)

Wilhelm Keitel · 1882–1946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총장

Ernst Kaltenbrunner · 1903–1946
국가보안본부(RSHA) 수장 (1943–45)

Alfred Rosenberg · 1893–1946
나치 이념가 · 동방점령지역 장관

Hans Frank · 1900–1946
폴란드 총독부 총독 (1939–45)

Wilhelm Frick · 1877–1946
내무장관 (1933–43)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

Julius Streicher · 1885–1946
프랑켄 관구장 · 『슈튀르머』 발행인

Walther Funk · 1890–1960
경제장관 (1938–45) · 제국은행 총재

Hjalmar Schacht · 1877–1970
제국은행 총재 · 경제장관 (1934–37)

Karl Dönitz · 1891–1980
U보트 사령관 · 해군 총사령관 · 최후의 제국 대통령

Erich Raeder · 1876–1960
해군 총사령관 (1928–43)

Baldur von Schirach · 1907–1974
히틀러 유겐트 지도자 · 빈 관구장

Fritz Sauckel · 1894–1946
노동력 동원 전권위원 (1942–45)

Alfred Jodl · 1890–1946
OKW 작전부장 (1939–45)

Franz von Papen · 1879–1969
전 총리 (1932) · 부총리 (1933–34)

Arthur Seyß-Inquart · 1892–1946
오스트리아 병합의 실행자 · 네덜란드 제국판무관

Albert Speer · 1905–1981
히틀러의 건축가 · 군수장관 (1942–45)

Konstantin von Neurath · 1873–1956
외무장관 (1932–38)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

Hans Fritzsche · 1900–1953
선전부 방송국장

Martin Bormann · 1900–1945
당 사무국장 · 히틀러 개인비서 — 궐석 재판

Robert Ley · 1890–1945
독일노동전선 대표 — 재판 개시 전 자살

Gustav Krupp von Bohlen und Halbach · 1870–1950
크루프 재벌 총수 — 건강 사유로 재판 불능
판사 4명, 검사 4개국. 이 재판을 없던 형식에서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Robert H. Jackson · 1892–1954
미국 수석검사 · 연방대법관

Geoffrey Lawrence · 1880–1971
재판장 (영국)

Francis Biddle · 1886–1968
판사 (미국) · 전 법무장관

Iona Nikitchenko · 1895–1967
판사 (소련)

Henri Donnedieu de Vabres · 1880–1952
판사 (프랑스)

Hartley Shawcross · 1902–2003
영국 수석검사 · 법무총감

Roman Rudenko · 1907–1981
소련 수석검사

Telford Taylor · 1908–1998
미국 검사 → 후속 12개 재판 수석검사

Airey Neave · 1916–1979
기소장 송달관
가장 책임이 큰 세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리고 증언대에 선 몇 사람이 재판의 성격을 바꿨다.

Adolf Hitler · 1889–1945
총통 겸 제국총리

Heinrich Himmler · 1900–1945
친위대 전국지도자 · 경찰 총수

Joseph Goebbels · 1897–1945
선전장관

Adolf Eichmann · 1906–1962
RSHA 유대인 담당과장

Rudolf Höß · 1901–1947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Otto Ohlendorf · 1907–1951
아인자츠그루페 D 지휘관

Erwin von Lahousen · 1897–1955
국방군 방첩부(아프베어) 장교

Hannah Arendt · 1906–1975
정치철학자

Hermann Rorschach · 1884–1922
스위스 정신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