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독본

1945.11.20 — 1946.10.01 · 국제군사재판소

같은 인간에게서
다른 것을 찾으려 했다

한 미국 육군 정신과 의사가 전범 22명의 감방을 드나들며 ‘악의 표지’를 찾았다. 찾지 못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 특별한 조건이었고, 그 조건은 독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피고석에 앉은 피고인들
피고석. 앞줄 왼쪽부터 괴링·헤스·리벤트로프·카이텔·칼텐브루너·로젠베르크·프랑크·프리크·슈트라이허·풍크·샤흐트.
24기소된 피고인
실제 심리 22명
403공개 심리 회기
216일간
4죄목
공모·침략·전쟁범죄·인도에 반한 죄
12사형 선고
10명 집행, 1명 자살, 1명 궐석
3무죄
샤흐트·파펜·프리체
00

악의 표지는 없었다

이 책은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다루는 것은 그가 관찰한 대상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결국 독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했다. 미군은 붙잡은 나치 지도부를 룩셈부르크의 한 호텔에 가뒀다. 수용소의 암호명은 애시캔(재떨이)이었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들을 재판에 세우려면 먼저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을 세운 재판은 재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군은 정신과 군의관을 보냈다. 33세의 더글러스 켈리 대위였다. 공식 임무는 법정 능력 판정 하나였다. 그러나 켈리는 그 자리에서 훨씬 큰 것을 보았다 —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를 조직한 사람들이 한 건물에 모여 있고, 자신이 아무 제약 없이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찾으려 한 것

켈리의 가설은 단순했다. 이런 일을 한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정신병이든 성격장애든, 어떤 표지가 있다면 다음에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자기 전공인 로르샤흐 잉크반점 검사와 지능검사를 들고 감방을 돌았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길버트가 통역과 관찰을 맡아 함께 다녔다.

결과는 기대와 반대였다. 지능은 평균보다 훨씬 높았고, 정신질환자는 사실상 없었다. 로르샤흐 반응에도 이들만의 특징이 나오지 않았다. 켈리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 이들은 우리 모두가 그렇듯 환경의 산물이었다. 같은 조건이 갖춰지면 어디서든 같은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을 예외로 두지 않았다.

길버트는 같은 자료를 보고 다르게 말했다. 그는 이들에게서 공감 능력의 결여라는 공통점을 읽어 냈다. 두 사람은 그 뒤로 평생 화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1958년, 켈리는 괴링과 같은 방법 — 청산가리 — 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래서 이 페이지는 나치를 본다

켈리의 결론이 맞다면,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나”가 아니라 “어떤 조건이 그들을 만들었나”가 된다. 조건은 사람보다 옮겨 다니기 쉽다. 성격은 국경을 넘지 않지만 패전·초인플레이션·대량 실업·모욕감·설명이 필요한 재난은 어디서든 다시 생긴다.

그래서 이 페이지의 무게 중심은 인물 열전이 아니라 조건에 있다. 두 차례의 전쟁이 무엇을 남겼는지, 돈이 어떻게 두 번 무너졌는지, 한 정당이 득표가 줄어드는 중에 어떻게 정권을 넘겨받았는지, 그리고 천 년 묵은 소문이 어떻게 국가의 행정 절차가 되었는지. 나치는 이 조건들의 결과다. 결과만 보고 원인을 안 보면, 다음에 같은 원인이 왔을 때 알아보지 못한다.

켈리가 1946년에 한 말이 이 책의 출발점이자 결론이다 — 그가 감방에서 만난 것은 독일에서만 자라는 병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의 여섯 사람

전체 인물은 맨 뒤 인물 장에 50명이 있다. 여기서는 이야기가 굴러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여섯만 세워 둔다.

더글러스 M. 켈리
더글러스 M. 켈리

Douglas M. Kelley · 1912–1958

미 육군 정신과 군의관 — 이 책의 주인공

감방 쪽재판 당시 33세

이 책의 주인공. 33세 육군 정신과 군의관으로 파견돼 피고 22명을 검사했다. ‘악의 표지’를 찾으러 갔다가 찾지 못했다는 결론을 들고 돌아온다.

구스타프 M. 길버트

Gustave M. Gilbert · 1911–1977

미 육군 형무소 심리학자

감방 쪽재판 당시 34세

형무소 심리학자.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해 통역 없이 피고들과 이야기했다. 같은 자료를 보고 켈리와 정반대 결론을 냈고, 두 사람은 평생 화해하지 않았다.

헤르만 괴링
헤르만 괴링

Hermann Göring · 1893–1946

제국원수 · 공군 총사령관 · 4개년계획 총책

피고석재판 당시 52세

피고석 첫 자리. 켈리가 가장 오래 관찰한 인물이고 IQ가 가장 높게 나온 축에 든다. ‘정신병자가 아니다’라는 판정이 이 책의 질문을 만든다.

루돌프 헤스
루돌프 헤스

Rudolf Heß · 1894–1987

총통 대리 (1933–41)

피고석재판 당시 51세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해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가 법정에서 다투어졌다. 정신과 의사들이 왜 이 재판에 필요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다.

제프리 로런스
제프리 로런스

Geoffrey Lawrence · 1880–1971

재판장 (영국)

법대재판 당시 64세

영국 판사, 재판장. 네 나라의 법 전통이 부딪히는 자리에서 절차를 굴러가게 만들었다. 피고에게 발언 기회를 준 것이 이 재판을 보복이 아닌 재판으로 만들었다.

로버트 H. 잭슨
로버트 H. 잭슨

Robert H. Jackson · 1892–1954

미국 수석검사 · 연방대법관

검사석재판 당시 53세

미국 수석검사. 처칠과 스탈린이 즉결 처형을 말할 때 재판을 관철시킨 사람이다. 개정 연설에서 “권력에 취한 승자가 패자를 벌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페이지의 사용법

책은 인물 이름과 사건을 설명 없이 지나간다. 왼쪽 목차에서 한 장(章)씩 골라 본다 — 한 번에 한 주제만 떠서 필요한 것만 읽으면 된다. 각 장 첫머리의 번호 붙은 요약만 읽어도 그 장의 흐름은 잡히도록 해 두었다.

검색창에 이름이나 사건을 넣으면 장 구분을 넘어 페이지 전체에서 그 대목만 뽑아 준다. 나이는 모두 재판 개시일(1945년 11월 20일) 기준이다. 책에서 “쉰둘의 괴링”, “서른셋의 켈리”가 어떤 그림인지 감을 잡는 데 쓰라고 넣었다.

폐허가 된 뉘른베르크
뉘른베르크는 폭격으로 91%가 파괴됐다. 그런데 법원 청사와 붙어 있는 형무소는 살아남았다. 피고를 바깥으로 옮기지 않고 법정에 세울 수 있는 건물이 유럽에 여기뿐이었다.
뉘른베르크 법원 청사
뉘른베르크 법원 청사, 1945년 11월 17일. 개정 사흘 전이다.
01

제1차 세계대전

1914–1918. 이 전쟁을 모르면 나치를 설명할 수 없다. 피고인 대부분이 이 전쟁의 참전자이고, 히틀러의 정치는 이 전쟁의 패배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 지역에서 벌어진 암살 하나가 이미 짜여 있던 동맹의 그물을 타고 세계대전이 됐다.
  • 4년 반 동안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양쪽이 인력을 소진하는 싸움이 되었다.
  • 독일은 본토가 침공당하기 전에 정전에 응했다 — 이 사실이 뒷날 “지지 않았는데 등 뒤에서 찔렸다”는 신화의 재료가 된다.
  • 베르사유 조약이 전쟁 책임을 독일에 돌리고 갚기 어려운 배상금을 물렸다.
  • 전범을 처벌하려는 첫 시도가 있었고 실패했다. 뉘른베르크의 설계자들은 그 실패를 알고 있었다.
먼저 세울 개념 — 배후중상설

1918년 11월, 독일군은 아직 프랑스 땅 위에 있었고 독일 본토는 한 번도 침공당하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정전이 왔다. 그래서 독일 안에서는 “우리는 전장에서 지지 않았다, 후방이 등 뒤에서 찔렀다”는 설명이 퍼졌다. 사실이 아니다 — 군 수뇌부가 먼저 정부에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신화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을 20년 내내 갉아먹었고, ‘찌른 자’로 지목된 유대인·사회주의자가 나치의 첫 표적이 된다.

1914.06.28

사라예보 총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살해됐다. 암살 자체는 지역 사건이었다. 그것을 세계대전으로 바꾼 것은 이미 유럽을 둘로 갈라 놓은 동맹의 그물이었다.

사라예보 총성
가브릴로 프린치프. 19세로 사형 연령에 못 미쳐 20년형을 받았고 1918년 옥사했다.

1914.08

동맹의 연쇄 발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자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고, 독일이 러시아와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이 참전했다. 5주 만에 유럽 강대국 전부가 전쟁에 들어갔다.

동맹의 연쇄 발화
1914년 유럽의 진영. 삼국협상(초록)과 동맹국(적갈색).

1914.09

슐리펜 계획의 좌절

독일은 서부에서 프랑스를 6주 안에 무너뜨리고 동부로 돌아설 계획이었다. 마른 전투에서 저지당하면서 계획은 깨졌고, 양측은 스위스 국경에서 북해까지 700km의 참호선을 팠다. 이후 3년 반 동안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1916

베르됭과 솜 — 소모전의 얼굴

베르됭에서 약 70만, 솜에서 약 100만의 사상자가 났다. 솜 전투 첫날 하루에만 영국군 사상자가 5만 7천 명이었다. 이 전쟁은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누가 먼저 인력을 소진하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베르됭과 솜 — 소모전의 얼굴
솜 전투의 영국군 참호, 1916년.

1917.04

미국 참전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과 짐머만 전보가 미국을 끌어들였다. 윌슨 대통령은 이 전쟁을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하게 만드는' 전쟁으로 규정했다. 이 명분이 훗날 국제연맹과 뉘른베르크의 사상적 뿌리가 된다.

미국 참전
우드로 윌슨. 그의 14개조는 국제연맹으로 이어졌지만 미국 상원이 가입을 거부했다.

1917.11

러시아 혁명과 동부전선 붕괴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전쟁에서 이탈했다. 독일은 동부의 병력을 서부로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이 혁명은 이후 20년간 독일 우파에게 '유대–볼셰비즘'이라는 적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1918.11.11

콩피에뉴 정전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빌헬름 2세가 퇴위했다. 정전은 콩피에뉴 숲의 열차 객차에서 조인됐다. 독일군은 아직 프랑스·벨기에 영토 안에 있었고, 독일 본토는 한 번도 침공당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배후중상설'이라는 신화의 재료가 된다.

콩피에뉴 정전
정전이 조인된 콩피에뉴의 객차. 1940년 히틀러는 프랑스의 항복을 바로 이 객차에서 받아낸다.

1919.06.28

베르사유 조약

1914년 사라예보 암살로부터 꼭 5년 되는 날에 조인됐다. 독일은 영토의 13%와 인구 10%, 모든 식민지를 잃고 군대는 10만 명으로 제한됐다. 제231조는 전쟁 책임을 독일과 그 동맹에 돌렸고, 배상금은 1320억 금마르크로 정해졌다. 독일에서는 '명령된 평화'로 불리며 어떤 정부도 옹호할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
윌리엄 오펜, 「베르사유 거울의 방에서의 강화 조인」.

1919.06

전범 처벌의 첫 시도 — 그리고 실패

조약 제227조는 빌헬름 2세를 '국제 도덕과 조약의 신성함에 대한 최고의 범죄'로 기소하도록 규정했다. 네덜란드가 신병 인도를 거부해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독일 자체 전범재판은 901명 중 13명만 유죄를 냈다. 뉘른베르크의 설계자들은 이 실패를 알고 있었다.

1919–1923

제국들이 사라진 자리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러시아 네 제국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신생 국가들이 들어섰다. 국경은 민족 분포와 어긋났고, 어느 나라 안에나 소수민족이 남았다. 히틀러가 1938년부터 쓰게 될 명분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제국들이 사라진 자리
1923년의 유럽. 새로 그어진 국경이 1930년대의 분쟁선이 된다.

이 전쟁이 만든 세 개의 얼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 —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위 계승자. 그의 죽음이 도화선이 됐지만, 정작 그는 제국 안에서 슬라브계에 유화적인 축이었다.
빌헬름 2세
빌헬름 2세 — 독일 황제. 베르사유 조약 제227조가 그를 기소하도록 정했지만 네덜란드가 인도를 거부해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뉘른베르크 설계자들은 이 실패를 기억하고 있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
에리히 루덴도르프 — 1918년 항복을 먼저 요구한 장군이 뒤에 배후중상설을 퍼뜨렸다. 1923년 뮌헨 폭동에 히틀러와 함께 참여한다.
1차 대전 후 독일이 잃은 영토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이 잃은 영토. 이 지도의 모든 조각이 1930년대 히틀러의 요구 목록이 된다.
02

바이마르에서 제3제국으로

1919–1939. 민주주의가 어떻게 합법적인 절차만 밟아 독재로 바뀌는지를 보여 준 20년이다.

  •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이 출발부터 좌우 양쪽의 공격을 받았다.
  • 초인플레이션(1923)과 대공황(1929)이 중산층의 기반을 두 번 무너뜨렸다.
  • 나치는 그 무너진 자리에서 자랐다 — 이념이 이긴 것이 아니라 경제가 무너진 것이다.
  • 히틀러는 선거가 아니라 임명으로 총리가 됐고, 여섯 달 만에 일당국가가 되었다.
  • 그 과정의 절차는 대부분 합법이었다. 이 시기의 핵심이 그것이다.
먼저 세울 개념 — 나치는 선거로 이기지 않았다

나치당이 자유선거에서 얻은 최고 득표율은 37.3%(1932년 7월)다. 과반을 넘긴 적이 없다. 히틀러가 총리가 된 것은 선거 결과가 아니라, 그를 이용해 좌파를 누를 수 있다고 믿은 보수 엘리트들의 계산 때문이다. 파펜이 힌덴부르크를 설득했고, 자기가 부총리로 히틀러를 통제하겠다고 말했다. 파펜은 뉘른베르크에서 무죄를 받는다.

1919.01

바이마르 공화국의 출발

독일 최초의 의회민주주의가 출발부터 두 방향의 공격을 받았다. 좌파는 혁명이 배신당했다고 보았고, 우파는 공화국이 등 뒤에서 군을 찔렀다고 보았다. 헌법 제48조는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주었고, 이 조항이 결국 민주주의를 합법적으로 끝내는 통로가 된다.

1923

초인플레이션과 뮌헨 폭동

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독일이 소극적 저항으로 맞서면서 통화가 붕괴했다. 1달러가 4조 2천억 마르크까지 갔다. 11월 히틀러가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해 수감됐고,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구술했다. 프리크·괴링·헤스·프랑크가 모두 이 폭동에 관여했다.

초인플레이션과 뮌헨 폭동
1923년, 다발로 묶인 지폐가 저울에 달려 거래됐다.

1924–1929

황금의 20년대

도스 안과 미국 자본이 들어오면서 경제가 회복됐고, 나치당의 득표율은 2~3%대로 떨어졌다. 슈트레제만의 외교로 독일은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이 5년만 놓고 보면 바이마르는 성공한 공화국처럼 보였다.

1929.10

대공황

월가 붕괴로 미국 단기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갔다. 독일 실업자는 1932년 600만 명을 넘었다. 나치당 득표율은 1928년 2.6%에서 1930년 18.3%, 1932년 7월 37.3%로 뛴다. 나치의 부상은 이념의 승리가 아니라 경제 붕괴의 함수였다.

대공황
1928~1935년 독일 실업률. 나치 득표율 곡선과 거의 겹친다.

1933.01.30

히틀러 총리 임명

나치당은 과반을 얻은 적이 없다. 히틀러는 선거로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그를 이용할 수 있다고 믿은 보수 엘리트들의 계산으로 임명됐다. 파펜이 힌덴부르크를 설득했고 '두 달이면 히틀러를 구석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히틀러 총리 임명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1934년 그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쳐 '총통'이 된다.

1933.02.27

국회의사당 방화

방화 다음 날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언론·집회·통신의 자유가 정지됐다. 이 명령은 1945년까지 한 번도 해제되지 않았다. 제3제국은 사실상 12년 내내 비상사태 상태로 통치됐다.

1933.03.23

수권법

의회가 스스로 입법권을 정부에 넘겼다. 공산당 의원은 이미 체포되거나 도주한 상태였고 중앙당이 찬성으로 돌아섰다. 사민당만 반대했다. 이후 독재는 '합법적'이라는 외피를 쓴다 — 뉘른베르크에서 피고들이 반복해 들고 나오게 될 외피다.

수권법
수권법 표결을 앞둔 히틀러의 연설, 1933년 3월 23일.

1933–1934

획일화(글라이히샬퉁)

정당·노조·주정부·언론·직능단체가 차례로 해산되거나 나치 조직에 흡수됐다. 5월 노조가 해산되고 라이의 독일노동전선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5월 10일 베를린 등지에서 분서가 벌어졌다. 1934년 6월 장검의 밤으로 돌격대(SA) 지도부가 숙청되면서 친위대(SS)가 권력의 중심이 된다.

획일화(글라이히샬퉁)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오페라광장의 분서.

1935.09.15

뉘른베르크 인종법

제국시민법과 독일인의 혈통·명예 보호법이 나치당 전당대회가 열린 뉘른베르크에서 공포됐다. 유대인은 시민권을 잃었고 독일인과의 혼인·성관계가 금지됐다. 누가 유대인인가는 종교가 아니라 조부모의 수로 정의됐다.

뉘른베르크 인종법
뉘른베르크법의 혈통 분류표. '유대인'은 조부모 세 명 이상이 유대교도인 사람으로 정의됐다.

1936–1938

재군비와 시험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조약 위반, 서방은 움직이지 않았다), 1936~39년 스페인 내전 개입,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서방이 매번 물러서면서 히틀러는 '저들은 싸우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는다.

재군비와 시험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 슈페어가 연출한 이 무대가 도시의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켰고, 그래서 재판 장소로 이 도시가 선택된다.

1938.09.30

뮌헨 협정

영국·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겼다. 체코는 협상 테이블에 없었다. 체임벌린은 '우리 시대의 평화'를 들고 런던으로 돌아왔고, 6개월 뒤 독일은 체코 전체를 삼켰다.

뮌헨 협정
뮌헨 협정 서명. 왼쪽부터 체임벌린, 달라디에, 히틀러, 무솔리니, 치아노.

1938.11.09

수정의 밤

독일 전역에서 시나고그 1400여 곳이 불타고 유대인 상점이 파괴됐다. 최소 91명이 살해되고 3만 명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피해자인 유대인 공동체에 10억 마르크의 '속죄금'이 부과됐다. 차별에서 폭력으로 넘어가는 문턱이었다.

1939.08.23

독소 불가침조약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가 모스크바에서 조약에 서명했다. 비밀의정서로 폴란드와 발트 3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념적 원수였던 두 체제가 손을 잡으면서 폴란드 침공의 마지막 걸림돌이 사라졌다.

독소 불가침조약
모스크바 크렘린, 조약 서명 직후. 스탈린과 리벤트로프.
1923년 뮌헨 폭동
1923년 11월 뮌헨 마리엔광장. 실패한 이 쿠데타로 히틀러는 5년형을 받았으나 9개월 만에 풀려났고, 그 뒤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는다”는 전략으로 바꾼다. 프리크·괴링·헤스·프랑크가 모두 이 자리에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국민20세 이상 남녀. 여러 정당 중에서 고른다.
제국의회법을 만들고,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다.
정부의회에 책임을 진다. 신임을 잃으면 물러난다.

제3제국

국민20세 이상 남녀. 1935년부터 유대인은 여기서 빠진다.
제국의회토론도 표결도 없다.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박수를 친다.
총통아무에게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의 말이 곧 법이다.

세 층은 양쪽 다 남아 있다. 다른 것은 층과 층을 잇는 두 연결이다. 왼쪽에서는 국민이 의회를 만들고 의회가 정부를 만든다 — 권력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오른쪽에서는 그 두 연결이 모두 끊겨, 이름만 같은 세 층 사이로 권력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

국민투표는 남아 있었다. 1934년 총통 겸직, 1936년 라인란트,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이 모두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찬성률은 매번 90%를 넘었다. 고를 것이 하나뿐인 투표는 결정이 아니라 이미 한 일을 추인하는 절차다. 1934년에는 주 의회도 폐지돼 지방에서 올라오는 견제까지 사라졌다.

뉘른베르크에서 “누가 무엇을 결정했나”를 가리기 어려웠던 이유가 여기 있다 — 결정하는 자리는 하나뿐인데 실행한 사람은 스물넷이었다.
03

나치당은 어떻게 집권했나

1919–1933. 득표율만 따라가면 이야기가 거꾸로 읽힌다 — 결정적인 자리는 투표소가 아니었다.

  • 1928년 총선 득표율 2.6%. 정치 관측자들이 끝난 것으로 본 당이었다.
  • 되살린 것은 나치가 아니라 대공황이었다.
  • 최고 득표율은 37.3%(1932년 7월)이고, 마지막 자유선거에서는 오히려 줄었다.
  • 그런데 두 달 뒤 총리가 됐다 — 그를 조종할 수 있다고 믿은 보수 엘리트의 계산으로.
  • 임명에서 일당국가까지 여섯 달이 걸렸다.
먼저 세울 개념 — 「합법」과 「정당」은 다른 말이다

이 과정에서 헌법을 정면으로 어긴 대목은 놀랄 만큼 적다. 대통령의 임명권, 헌법 제48조의 비상대권, 의회의 표결 — 전부 바이마르 헌법이 준 도구였다. 민주주의를 끝낸 것은 그 민주주의가 스스로 쥐여 준 열쇠였다. 그래서 “법을 어겼는가”는 이 시기를 읽는 데 별로 쓸모 있는 질문이 아니다. 물어야 할 것은 누가 그 열쇠를 넘겨주었고 무엇을 얻으려 했는가다.

1919.09

55번째 당원

뮌헨의 작은 모임 '독일노동자당'에 육군이 정보원을 보냈다. 그 정보원이 상병 아돌프 히틀러였다. 감시하러 갔다가 연설을 하고 입당했다. 당원 수가 두 자리이던 시절이다.

1920.02.24

25개조 강령

당명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으로 바꾸고 강령을 발표했다. 베르사유 조약 파기, 대(大)독일 통합, 그리고 유대인은 국민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이 여기 이미 들어 있다. 이 강령은 끝까지 개정되지 않는다.

1921.07

한 사람의 당이 되다

히틀러가 당수 자리를 요구하며 탈당을 걸었다. 그가 나가면 당이 없어지는 상태였으므로 요구가 관철됐다. 이때부터 당의 결정 구조가 토론에서 지도자 원리로 바뀐다. 8월에는 준군사조직 돌격대(SA)가 만들어진다.

1923.11

실패가 가르쳐 준 것

뮌헨의 맥주홀에서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경찰의 총격으로 하루 만에 끝났다. 히틀러는 5년형을 받고 9개월 만에 풀려났다. 감옥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방법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 총으로 국가를 뒤엎는 대신, 선거로 들어가서 안에서 부순다.

실패가 가르쳐 준 것
1923년 11월 뮌헨. 이 실패가 '합법 전술'로의 전환점이 된다.

1925–1928

거의 죽은 당

1925년 당을 재건하고 『나의 투쟁』을 냈다. 그러나 경제가 회복되던 이 시기에 나치는 팔리지 않았다. 1928년 총선 득표율 2.6%, 의석 12석. 정치 관측자들은 이 당을 끝난 것으로 보았다. 나치를 되살린 것은 나치가 아니라 대공황이다.

1929–1930

2.6%에서 18.3%로

1929년 배상금 재조정안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나치는 보수 언론 재벌 후겐베르크의 신문·영화망을 통해 전국에 얼굴을 알렸다. 이듬해 대공황이 닥쳤다. 1930년 9월 총선에서 18.3%, 단숨에 제2당이 된다.

2.6%에서 18.3%로
실업률과 나치 득표율은 거의 같은 곡선을 그린다.

1932

최고점, 그리고 하락

4월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36.8%로 힌덴부르크에게 졌다. 7월 총선에서 37.3%로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에는 크게 못 미쳤다. 그리고 11월 총선에서 33.1%로 표가 줄었다. 자금은 바닥났고 당 안에서 노선 다툼이 터졌다. 이 시점의 나치는 정점을 지난 당이었다.

1932.11–1933.01

결정은 투표소 밖에서 났다

표가 줄어드는 두 달 동안, 파펜은 힌덴부르크를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 히틀러를 총리로 앉히되 내각을 보수파로 채우면 우리가 그를 조종할 수 있다. 내각 11석 중 나치는 3석이었다. 파펜은 자기가 부총리로 곁에 앉으면 된다고 했고, '두 달이면 히틀러를 구석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정은 투표소 밖에서 났다
힌덴부르크 대통령. 그가 서명한 임명장 한 장이 절차의 전부였다.

1933.01.30

임명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됐다. 선거가 아니라 임명이다. 쿠데타도 아니었고 헌법 위반도 아니었다 — 바이마르 헌법이 대통령에게 준 권한 그대로였다. 나치가 자유선거에서 얻은 최고 득표율은 37.3%이고, 그 표는 이미 줄고 있었다.

1933.02–07

여섯 달

2월 의사당 방화 다음 날 긴급명령으로 기본권이 정지됐다. 3월 선거에서도 나치는 43.9%로 과반을 못 넘겼지만, 공산당 의원을 체포한 상태에서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5월 노조 해산, 6~7월 정당들이 차례로 해산하거나 스스로 문을 닫았다. 7월 14일, 나치당 외의 정당 창설을 금지하는 법이 나온다. 임명에서 일당국가까지 여섯 달이 걸렸다.

여섯 달
수권법 표결을 앞둔 히틀러, 1933년 3월 23일.

수권법은 어떻게 통과됐나

정식 이름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다. 이름에 ‘수권(授權)’이라는 말은 없다 — 권한을 넘긴다는 뜻으로 뒤에 붙은 별칭이다.

1933년 3월 23일 · 제국의회

넘어야 할 선헌법을 고치는 법률이라 재적 3분의 2가 출석하고, 그중 3분의 2가 찬성해야 했다. 나치는 288석. 연립 파트너를 더해도 340석, 절반을 갓 넘는다.
재적이 줄었다사람이 사라지면 3분의 2를 채우기 쉬워진다. 사민당 의원 일부도 이미 잡혀 있었다.
출석 정족수가 채워졌다오지 못한 사람이 온 것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표결의 성립 여부는 이미 정해졌다.
찬성 444 · 반대 94반대표는 전부 사회민주당이었다. 당수 벨스의 반대 연설이 제국의회에서 나온 마지막 반대 연설이었다.

헌법을 정면으로 어긴 대목이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정족수를 못 채운 것이 아니라, 정족수를 채우는 방법을 바꾼 것이다. 사람을 빼고 셈법을 고쳐서 만든 3분의 2였지만, 절차의 겉모습은 끝까지 유지됐다.

이 법으로 정부는 의회 없이 법률을 만들 수 있게 됐다. 헌법에 어긋나는 법률도 가능했고, 조약도 의회 동의 없이 맺을 수 있었다.

그런데 수권법 하나로는 통치가 안 된다

법을 만드는 권한과, 사람을 잡아 가두는 권한과, 군대를 묶어 두는 권한은 서로 다른 것이다. 셋이 각각 다른 문서에서 나왔다.

1933.02.28 · 대통령 긴급명령
제국의회 화재령

언론·집회·결사·통신·주거·신체의 자유를 정지시켰다. 영장 없이 잡아 무기한 가둘 수 있게 된 근거가 이것이다. 1945년까지 한 번도 해제되지 않았다 — 제3제국은 12년 내내 비상사태로 통치됐다.

1933.03.23 · 의회 의결
수권법

정부가 의회 없이 법률을 만들 수 있게 했다. 헌법에 어긋나는 내용도 가능했다. 4년 시한이 붙어 있었고 1937·1939·1943년에 갱신된다 — 끝까지 형식은 지켜졌다.

1934.08.02 · 힌덴부르크 사망 당일
대통령직 합병

총리직과 대통령직을 합쳐 총통이 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군이다 — 군인의 충성 서약이 헌법이 아니라 히틀러 개인에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군을 통해 그를 제어할 마지막 통로가 닫혔다.

그래서 「수권법이 기반이었나」에 답하면

맞지만 혼자서는 아니다. 수권법은 법을 만드는 권한을 줬을 뿐, 사람을 잡아 가두는 권한은 주지 않았다. 그것은 3주 앞선 화재령이 했다. 반대할 사람을 먼저 가둘 수 있었기 때문에 수권법이 통과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순서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 셋 중 의회 표결을 거친 것은 수권법 하나뿐이다. 나머지 둘은 대통령 긴급명령과, 대통령이 죽은 날 나온 정부 결정이었다. 「나치는 합법적으로 집권했다」는 말이 절반만 맞는 이유가 여기 있다 — 절차는 있었지만, 그 절차를 심사할 기관이 그때마다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04

제2차 세계대전

1939–1945. 재판의 2번 죄목(침략전쟁)과 3번 죄목(전쟁범죄)의 사실관계가 여기 있다.

  •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됐다. 명분으로 쓴 국경 습격은 자작극이었다.
  • 1941년 소련 침공은 처음부터 절멸전으로 기획됐다 — 민간인 살해를 면책하는 명령이 침공 전에 이미 하달돼 있었다.
  • 같은 해 12월 미국이 들어오면서 독일의 패배는 생산력의 문제로 확정된다.
  • 재판 2번 죄목(침략전쟁)과 3번 죄목(전쟁범죄)의 사실관계가 이 장에 있다.

1939.09.01

폴란드 침공

독일이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국경 근처 글라이비츠 방송국 습격을 자작극으로 꾸며 명분을 만들었다. 9월 3일 영국·프랑스가 선전포고했고, 9월 17일 소련이 동쪽에서 진입했다. 뉘른베르크 2번 죄목(침략전쟁)의 출발점이다.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1일, 폴란드 국경의 차단봉을 부수는 독일군.

1940.04–06

서부전선 붕괴

덴마크·노르웨이(4월), 네덜란드·벨기에·프랑스(5~6월)가 차례로 무너졌다. 프랑스는 6주 만에 항복했고, 히틀러는 1918년 정전이 조인된 그 객차를 콩피에뉴로 끌어와 항복문서에 서명하게 했다.

서부전선 붕괴
1940년 5월의 유럽. 회색이 독일과 그 통제 아래 들어간 지역.

1940.07–1941.05

영국 본토 항공전과 대공습

괴링의 공군이 영국 제공권 장악에 실패했다. 히틀러는 상륙작전을 무기한 연기했다. 이어진 대공습으로 영국 민간인 4만여 명이 죽었지만 항복은 없었다. 괴링의 몰락은 여기서 시작된다.

영국 본토 항공전과 대공습
대공습 속의 세인트폴 대성당, 1940년 12월.

1941.06.22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이 300만 병력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절멸전으로 기획됐다 — 정치위원 명령(포로로 잡은 공산당 정치위원을 즉결 처형하라)과 바르바로사 관할권 명령(민간인에 대한 범죄를 군법에서 면책)이 침공 전에 이미 하달돼 있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이 군대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바르바로사 작전
1941~42년, 추축국 지배 영역의 최대 판도.

1941.12

전쟁의 세계화

12월 5일 소련이 모스크바 앞에서 반격에 성공해 전격전이 끝났다.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고, 12월 11일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이 시점에서 독일의 패배는 산업생산력의 문제로 확정된다.

전쟁의 세계화
진주만에서 불타는 USS 애리조나, 1941년 12월 7일.

1942.01.20

반제 회의

베를린 교외의 별장에서 15명의 고위 관료가 90분 동안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조정했다. 여기서 학살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이던 학살을 관료 기구 전체가 분담하기로 정리한 자리였다. 아이히만이 회의록을 작성했다.

반제 회의
반제 회의가 열린 베를린 교외의 별장. 현재는 기념관이다.

1942–1943

전환점

엘알라메인(1942.10), 스탈린그라드(1943.2, 독일 6군 항복), 쿠르스크(1943.7). 세 전투로 세 전선에서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후 독일은 2년 넘게 지는 전쟁을 계속한다.

전환점
스탈린그라드의 폐허, 1943년.

1944.06.06

노르망디 상륙

서부에 제2전선이 열렸다. 6월 22일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중부집단군을 궤멸시켰다.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시도가 실패하고 5천여 명이 처형된다.

노르망디 상륙
오마하 해변으로 향하는 미군, 1944년 6월 6일.

1945.02

얄타 회담

처칠·루스벨트·스탈린이 전후 질서를 합의했다. 여기서 주요 전범의 처리 방침도 논의됐다. 처칠은 한때 즉결 처형을 선호했고, 스탈린은 '5만 명을 총살하자'고 말한 적이 있다. 재판을 관철시킨 것은 미국이었다.

얄타 회담
얄타의 세 정상, 1945년 2월.

1945.05.08

유럽 전쟁 종결

4월 30일 히틀러 자살, 5월 2일 베를린 함락, 5월 7~8일 무조건 항복. 유럽에서만 군인·민간인 약 4천만 명이 죽었다. 되니츠의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5월 23일 체포되면서 독일 국가기구가 소멸한다.

유럽 전쟁 종결
제국의회 의사당 위의 소련 국기, 1945년 5월.

1945.08

전쟁의 끝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고 9월 2일 일본이 항복했다. 그 사이 8월 8일, 런던에서 4개국이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에 서명한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재판의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의 끝
나가사키, 1945년 8월 9일.

맞은편에 있던 사람들

네빌 체임벌린
네빌 체임벌린

Neville Chamberlain · 1869–1940

영국 총리 (1937–40)

1938년 뮌헨 협정 당시 69세유화
배경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유화정책의 얼굴이다. 1938년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넘기고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선언했다. 6개월 뒤 독일이 체코 전체를 삼키면서 그 판단은 무너졌고, 1940년 노르웨이 전역 실패 후 사임했다. 뉘른베르크에서 '침략전쟁의 계획'을 입증할 때, 히틀러가 서방의 후퇴를 어떻게 읽었는지가 핵심 논거가 된다.
윈스턴 처칠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 1874–1965

영국 총리 (1940–45, 1951–55)

1945년 당시 70세연합국
배경
1940년 5월 체임벌린을 이어 총리가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 처칠은 주요 전범을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하는 안을 오래 지지했다. 재판을 관철시킨 것은 미국이다. 1945년 7월 총선에서 패해 포츠담 회담 도중 자리를 물러났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Franklin D. Roosevelt · 1882–1945

미국 대통령 (1933–45)

1945년 4월 12일 사망 (63세)연합국
배경
전쟁을 끝까지 이끌었으나 승리도 재판도 보지 못하고 1945년 4월에 죽었다. 그의 재무장관 모겐소는 독일을 농업국으로 되돌리는 강경안을 냈고, 전쟁장관 스팀슨이 재판안으로 맞섰다. 후임 트루먼이 스팀슨의 손을 들어 주면서 뉘른베르크가 가능해졌다.
이오시프 스탈린
이오시프 스탈린

Joseph Stalin · 1878–1953

소련 공산당 서기장

1945년 당시 66세연합국
배경
1939년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어 폴란드를 나눠 가졌고, 1941년 침공당한 뒤 최대의 인명 피해를 치르며 독일을 무너뜨렸다. 뉘른베르크에서는 소련이 저지른 카틴 학살을 독일 소행으로 기소하게 했고, 증거가 무너져 판결문에서 빠졌다. '승자의 정의'라는 비판이 가장 날카롭게 겨누는 지점이다.
1942년 독일 제국과 점령지 지도
1942년, 독일이 직접 지배하거나 병합한 영역.
1941~1942년 유럽 전황 지도
추축국 지배가 최대에 이른 1942년의 유럽·북아프리카.
05

홀로코스트

4번 죄목 ‘인도에 반한 죄’의 실체. 이 재판을 위해 새로 만들어야 했던 죄목이다.

  • 살해가 처음부터 정책이었던 것은 아니다. 배제(1933) → 격리(1939) → 살해(1941)로 단계가 있었다.
  • 총살로 시작해 가스로 바뀌었다. 방법을 바꾼 이유 중 하나가 집행자의 심리적 부담이었다.
  • 유럽 전역에서 열차로 사람을 실어 왔다. 한 부서가 아니라 관료 기구 전체가 분담했다.
  • 살해된 유대인은 약 600만 명. 여기에 소련군 포로·폴란드 민간인·로마·장애인·정치범이 더해진다.
  • 재판 4번 죄목 인도에 반한 죄가 여기서 나온다.
먼저 세울 개념 — 한 번에 정해진 계획이 아니었다

‘최종 해결’은 어느 날 회의에서 결정돼 그대로 집행된 것이 아니다. 배제 → 격리 → 총살 → 산업적 절멸로 단계가 옮겨 갔고, 각 단계마다 현장의 실행이 정책보다 앞서 나가고 그것이 사후에 정책으로 승인되는 일이 반복됐다. 이 구조 때문에 뉘른베르크 검찰은 “누가 명령했는가”라는 하나의 문서를 끝내 제시하지 못했다. 대신 독일 관료제가 스스로 남긴 방대한 서류로 입증했다.

1933–1939

배제

공직 추방(1933), 분서, 사업 몰수(아리아화), 뉘른베르크법(1935), 수정의 밤(1938). 6년에 걸쳐 유대인은 법적으로 독일 사회 바깥에 놓였다. 살해는 아직 정책이 아니었다 — 목표는 이민 압박이었고, 실제로 독일 유대인 절반가량이 1939년까지 국외로 떠났다.

1939–1941

격리

폴란드 점령 후 유대인이 게토에 집단 수용됐다. 바르샤바 게토에는 40만 명이 원래 인구의 몇 배 밀도로 갇혔다. 기아와 질병으로 게토에서만 수십만 명이 죽었다.

격리
바르샤바 게토의 아이, 1941년.

1941.06–

총알에 의한 홀로코스트

바르바로사와 함께 아인자츠그루펜 4개 부대가 소련 점령지에 들어가 유대인을 마을 단위로 모아 구덩이 앞에서 총살했다. 1941년 9월 키이우 바비야르에서 이틀 동안 3만 3771명이 살해됐다. 이 단계에서만 약 150만 명이 죽었다.

총알에 의한 홀로코스트
이반호로드, 우크라이나, 1942년.

1942–1944

산업적 절멸

라인하르트 작전으로 베우제츠·소비보르·트레블린카가 세워졌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와 헤움노가 가동됐다. 총살에서 가스로 방법이 바뀐 이유 중 하나는 '집행자의 심리적 부담'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열차로 사람을 실어 왔다.

산업적 절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하차장의 선별, 1944년.

1943.04

바르샤바 게토 봉기

마지막 남은 게토 주민들이 무장 저항에 나섰다. 한 달 가까이 버텼고 게토는 완전히 파괴됐다. 진압을 지휘한 슈트로프가 만든 사진 보고서는 뉘른베르크에서 검찰 증거로 제출됐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
슈트로프 보고서의 사진. 뉘른베르크 법정에 증거로 제출됐다.

1945

해방과 숫자

1945년 1월 아우슈비츠, 4월 베르겐–벨젠·부헨발트·다하우가 해방됐다. 연합군이 촬영한 필름은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상영됐고, 피고들의 반응을 길버트가 기록으로 남겼다. 살해된 유대인은 약 600만 명, 여기에 소련군 포로 300만여 명, 폴란드 민간인, 로마·신티, 장애인, 정치범이 더해진다.

해방과 숫자
해방 직후의 베르겐–벨젠, 1945년 4월.
국가별 유대인 사망률 도표
국가별 유대인 인구 대비 사망률. 독일군의 지배가 깊고 오래갈수록 비율이 올라간다.
베우제츠·소비보르·트레블린카 누적 살해 도표
라인하르트 작전 3개 절멸수용소의 누적 살해 수, 1942년 1월~1943년 2월. 14개월에 집중돼 있다.
06

돈으로 본 독일

1871–1945. 앞의 연표가 “무슨 일이 있었나”라면, 이 장은 같은 기간을 “돈이 어떻게 움직였나”로 다시 본다.

  • 제국은 프랑스 배상금으로 시작했고, 그 돈이 만든 거품이 1873년에 터졌다.
  • 1차 대전을 세금이 아니라 빚으로 치렀는데, 갚을 재원(승전 배상금)이 사라졌다.
  • 1923년 초인플레이션이 중산층의 저축과 연금을 통째로 지웠다.
  • 1920년대 후반의 안정은 미국 단기자금 위에 서 있었고, 그 돈은 1929년에 빠져나갔다.
  • 나치는 재군비로 실업을 흡수했다 — 처음에는 장부 밖의 어음으로, 나중에는 약탈과 강제노동으로.
먼저 세울 개념 — 나치의 부상은 경제 지표의 함수였다

1928년과 1932년 사이에 독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 아니다. 바뀐 것은 실업률이다. 나치 득표율 곡선과 실업률 곡선은 거의 겹친다. 그래서 이 장은 인물의 성격이나 이념보다 앞에 놓인다 — 켈리가 감방에서 확인하게 될 결론, “이들은 환경의 산물이었다”는 말의 ‘환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가 여기 있다.

1871

배상금으로 시작한 제국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이기고 독일 제국이 섰다. 프랑스가 문 배상금 50억 프랑이 한꺼번에 들어왔고, 그 금으로 제국은 통화를 마르크로 통일하고 금본위제를 깔았다. 돈이 넘치면서 회사 설립 붐이 일었다 — 이 몇 해를 '창업 시대(그륀더차이트)'라 부른다.

배상금으로 시작한 제국
오토 폰 비스마르크. 통일과 함께 들어온 프랑스 배상금이 제국 경제의 종잣돈이 되었다.

1873

첫 거품이 터지다

5월 빈 증시가 무너지면서 붐이 끝났다. 설립된 회사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불황이 20여 년 이어졌다. 이때 처음으로 경제 실패의 책임을 유대인 금융가에게 돌리는 주장이 정치적으로 팔리기 시작한다. 6년 뒤 '반유대주의'라는 말이 만들어진다.

1914–1918

전쟁을 세금이 아니라 빚으로 치렀다

영국이 전비의 상당 부분을 증세로 조달한 것과 달리 독일은 대부분을 국채로 메웠다. 전제는 하나였다 — 이기면 상대에게 배상금을 물려 갚는다. 1918년 러시아에 그렇게 했다(브레스트–리토프스크). 그런데 진 쪽이 독일이 되었다. 빚은 남았고 갚을 재원은 사라졌다.

1921.05

1320억 금마르크

런던 지불안이 배상 총액을 1320억 금마르크로 정했다. 실제로 즉시 갚아야 하는 몫은 그보다 훨씬 작게 설계됐지만(A·B·C 세 종류 채권으로 나눠 C는 사실상 유보), 독일에서 유통된 것은 1320억이라는 숫자 하나였다. 갚을 수 없는 액수라는 감각이 정치의 재료가 된다.

1923

4조 2천억 마르크

프랑스가 배상 지연을 이유로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했다. 독일 정부는 노동자에게 파업을 지시하고 그 임금을 돈을 찍어서 지급했다. 1달러가 4조 2천억 마르크까지 갔다. 아침에 산 빵값이 저녁에 달랐고, 저축과 연금이 통째로 증발했다. 11월 렌텐마르크가 나오면서 1조 마르크가 1렌텐마르크로 교환됐다 — 화폐를 믿지 않게 된 중산층이 이 시기의 산물이다.

4조 2천억 마르크
1923년, 다발로 묶인 지폐가 저울에 달려 거래됐다.

1924–1929

미국 돈으로 산 안정

도스 안으로 배상 일정이 완화되고 미국 자본이 들어왔다. 도시가 재건되고 문화가 꽃폈다. 그러나 들어온 돈의 상당량이 언제든 빼 갈 수 있는 단기 자금이었다. 번영은 실적이 아니라 대출 위에 서 있었다.

1929–1932

빼 가는 데는 몇 달이면 됐다

월가가 무너지자 단기 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갔다. 브뤼닝 총리는 여기에 긴축으로 대응했다 — 지출을 깎고 임금을 내렸다. 초인플레이션의 기억 때문에 돈을 푸는 선택지가 정치적으로 봉쇄돼 있었다. 실업자는 600만을 넘었다. 나치 득표율은 1928년 2.6%에서 1932년 7월 37.3%로 뛴다.

빼 가는 데는 몇 달이면 됐다
1928~1935년 독일 실업률. 나치 득표율 곡선과 거의 겹친다.

1933–1936

샤흐트의 손 — 장부 밖의 재군비

히틀러는 재군비로 실업을 흡수했다. 문제는 그 돈을 어디서 났는지가 드러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자 열강을 자극한다). 제국은행 총재 샤흐트가 유령회사 이름의 어음(메포 어음)을 만들어 군수 대금을 결제했다. 약 120억 라이히스마르크가 국가 예산에 잡히지 않고 움직였다. 뉘른베르크에서 샤흐트가 무죄를 받은 것은 이 재군비가 '침략 공모'인지 판단이 갈렸기 때문이다.

샤흐트의 손 — 장부 밖의 재군비
햘마르 샤흐트. 뉘른베르크에서 무죄를 받은 세 사람 중 하나다.

1936

4개년계획 — 경제를 전쟁에 맞춘다

괴링이 4개년계획 전권위원이 되면서 경제 운용이 채산성에서 자급자족으로 넘어갔다. 수입에 의존하는 원유·고무를 국내 합성으로 대체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쏟았다. 목표는 명시적이었다 — 4년 안에 전쟁을 할 수 있는 경제를 만든다. 샤흐트는 이 노선에 반대하다 1937년 경제장관에서 물러난다.

1939–1945

약탈과 강제노동

점령지에서 자원·식량·미술품이 빠져나갔고, 점령 비용까지 현지에 청구했다. 노동력은 끌어왔다 — 1944년 기준 독일 안에서 일한 외국인 노동자와 전쟁포로가 약 700만 명이다. 1942년 군수장관이 된 슈페어 아래에서 군수 생산은 오히려 늘었는데, 그 증산의 상당 부분이 강제노동 위에 서 있었다. 자우켈(노동력 동원)과 슈페어(생산)가 뉘른베르크에 선 이유다.

약탈과 강제노동
프리츠 자우켈. 점령지에서 노동력을 끌어오는 일을 총괄했고 뉘른베르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07

유대인은 어떻게 적이 되었나

2세기–1945년. 혐오에는 근거가 없었지만 역사는 있었다. 그 역사가 어떻게 쌓였는지를 본다.

  • 나치가 발명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이미 있던 것을 국가가 넘겨받았다.
  • 종교적 비난에서 시작해, 중세에 대부업 이미지와 루머(혈액 비방·우물 독)가 붙었다.
  • 1879년 ‘반유대주의’라는 말이 만들어지면서 근거가 종교에서 인종으로 바뀐다 — 개종이라는 출구가 닫힌다.
  • 위조가 밝혀진 뒤에도 『시온 장로 의정서』는 계속 팔렸다. 반박은 소문을 못 이긴다.
  • 나치는 그 이미지에 예산과 법률과 경찰을 붙였을 뿐이다.
먼저 세울 개념 — 루머는 반박으로 죽지 않는다

이 장에 나오는 주장은 전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전부 당대에 이미 반박됐다. 교황이 칙서로 부정했고, 신문이 위조를 지면으로 폭로했고, 재판에서 무죄가 났다. 그런데도 이야기들은 살아남아 다음 세기로 넘어갔다. 소문이 도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 소문이 설명해 주는 불안이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전염병·공황·패전이 올 때마다 같은 이야기가 다시 나온 것이 그 증거다.

2~4세기

'그들이 죽였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 안에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로마가 아니라 유대인에게 돌리는 서술이 굳었다. 이 신살자(神殺者) 비난이 이후 천 년 넘게 모든 반유대 정서의 바탕에 깔린다. 종교적 주장이지 인종 주장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 개종하면 벗어날 수 있었다.

11~13세기

돈을 다루는 자리로 밀려나다

교회가 기독교인에게 이자 받는 대부를 금지했다. 동시에 유대인은 길드에서 배제돼 수공업·농업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남은 자리가 대부업이었다. 필요해서 불러 놓고, 빚을 갚을 때가 되면 미워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왕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세금원으로 삼았다가 빚이 커지면 추방했다.

1144

시신 하나에서 시작된 루머

잉글랜드 노리치에서 소년 윌리엄이 죽은 채 발견됐다. 유대인이 종교 의식을 위해 기독교 아이를 죽여 피를 썼다는 주장이 퍼졌다 — 기록에 남은 최초의 혈액 명예훼손이다. 근거는 없었지만 이야기 형태가 강력해서 유럽 전역으로 복제됐고, 20세기까지 재판과 학살의 명분으로 쓰였다.

1348–1350

우물에 독을 탔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죽었다. 원인을 모르는 재난 앞에서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349년 2월 스트라스부르에서는 페스트가 도시에 닿기도 전에 유대인 수백 명이 산 채로 불태워졌다. 교황이 두 차례 칙서로 근거 없음을 밝혔으나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우물에 독을 탔다
1349년 흑사병기의 유대인 학살을 그린 채색 필사본.

1290–1492

추방의 연쇄

1290년 잉글랜드, 1394년 프랑스, 그리고 1492년 스페인이 유대인을 추방했다. 스페인에서는 개종한 사람들까지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감시 대상이 되었다 — 개종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관념이 여기서 처음 제도화된다. 종교에서 혈통으로 넘어가는 첫 걸음이다.

1516

게토라는 말이 생기다

베네치아가 유대인 거주 구역을 한 섬으로 제한하고 밤에 문을 잠갔다. 그 구역의 이름이 게토였다. 격리는 '보호'라는 명분으로 시작됐지만 결과는 하나였다 — 유대인은 이웃이 아니라 구경거리가 되었고,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되면 어떤 이야기든 믿을 수 있게 된다.

1791–1871

해방, 그리고 반발

프랑스 혁명이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었고, 독일에서는 1871년 제국 성립과 함께 법적 평등이 완성됐다. 유대인이 대학·언론·금융·의료로 빠르게 진출했다. 그러자 성공 자체가 새로운 혐의가 되었다 — 소수인데 왜 눈에 띄는 자리에 많은가, 라는 물음이 음모의 형태로 답을 얻는다.

1879

'반유대주의'라는 말이 만들어지다

언론인 빌헬름 마르가 이 단어를 대중화하고 '반유대 연맹'을 세웠다. 새로운 것은 근거였다. 종교가 아니라 인종을 든 것이다. 유대인은 믿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 종족으로 규정됐다. 이 전환이 결정적이다 — 개종이 출구였던 천 년이 여기서 닫힌다. 1873년 공황의 기억이 이 주장에 청중을 만들어 주었다.

1894–1906

드레퓌스 사건

프랑스 육군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간첩으로 몰려 유배됐다. 진범이 드러난 뒤에도 군은 판결을 지키려 했다. 12년 만에 무죄가 확정됐지만, 이 사건은 법치가 자리 잡은 공화국에서도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었다.

1903–1921

시온 장로 의정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세계 지배를 모의한 회의록이라는 문서가 러시아에서 나왔다. 위조였다. 1921년 런던 타임스가 1864년 프랑스 풍자문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임을 지면으로 밝혔다. 그런데도 판매는 늘었다. 미국에서는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자기 신문에 연재하고 소책자로 50만 부를 뿌렸다. 히틀러는 뮌헨에서 그 독일어판을 읽었다.

시온 장로 의정서
시온 장로 의정서. 위조가 밝혀진 뒤에도 20개 언어 이상으로 번역돼 팔렸다.

1918–1919

패전의 설명이 되다

독일군은 본토가 침공당하기 전에 정전에 응했다. 그 사실이 배후중상설의 재료가 됐다 — 군은 지지 않았는데 후방의 유대인과 사회주의자가 등을 찔렀다는 이야기다. 1919년 힌덴부르크가 의회 조사에서 이 주장을 입에 올리면서 신화에 권위가 붙었다. 같은 시기 러시아 혁명이 '유대–볼셰비즘'이라는 또 하나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1923–1945

국가가 루머를 넘겨받다

슈트라이허가 창간한 주간지 슈튀르머는 혈액 명예훼손을 포함해 중세의 소문을 그대로 되살려 실었다. 나치가 발명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 이미 있던 것을 국가가 예산과 법률과 경찰을 붙여 집행했을 뿐이다. 1935년 뉘른베르크법이 '유대인'을 조부모의 수로 정의하면서, 천 년 동안 말이던 것이 행정 절차가 되었다.

국가가 루머를 넘겨받다
슈튀르머 게시판. 슈트라이허는 이 신문 하나로 뉘른베르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08

뉘른베르크 재판

국제군사재판소(IMT). 1945년 11월 20일 개정, 1946년 10월 1일 판결.

국제군사재판소 문장
국제군사재판소의 문장. 4개국의 이름이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1. 재판을 열 것인가, 쏘아 버릴 것인가

재판이 당연한 결론은 아니었다. 처칠은 주요 전범을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하는 안을 지지했다. 스탈린은 독일군 장교 5만 명을 총살하자고 말한 적이 있고, 미국 재무장관 모겐소는 독일을 농업국으로 되돌리는 안을 냈다. 재판을 관철시킨 것은 미국, 그중에서도 로버트 잭슨이었다.

잭슨의 논거는 실용적이었다. 총살은 승자의 보복으로 남지만, 재판은 기록을 남긴다. 독일이 스스로 만든 문서로 유죄를 입증하면 훗날 누구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뉘른베르크의 증거는 생존자 증언이 아니라 독일 관청의 서류가 중심이 되었다.

2. 런던 헌장 — 없던 법을 만들다

1945년 8월 8일, 4개국이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에 서명했다. 여기서 세 가지 죄가 처음으로 성문화됐고, 두 가지 방어논리가 미리 봉쇄됐다.

죄목 1
공모 (Conspiracy)

다른 세 죄를 저지르기 위한 공동계획에 참여한 죄. 가장 논란이 컸고 판사들 사이에서도 반대가 많아, 결국 ‘침략전쟁을 위한 공모’로 좁혀졌다. 22명 중 8명만 유죄.

죄목 2
평화에 반한 죄

침략전쟁의 계획·준비·개시·수행. 재판부는 이것을 “최고의 국제범죄”라 불렀다 — 다른 모든 범죄의 악을 그 안에 누적해 담고 있기 때문이다. 12명 유죄.

죄목 3
전쟁범죄

포로 살해, 인질 처형, 민간인 강제노동, 약탈, 무의미한 파괴. 기존 헤이그·제네바 협약에 근거가 있어 법적으로 가장 단단했다. 16명 유죄.

죄목 4
인도에 반한 죄

민간인에 대한 살해·절멸·노예화·박해. 뉘른베르크에서 새로 만들어진 개념이고 오늘날 국제형사재판소까지 이어진다. 16명 유죄.

봉쇄된 두 가지 방어

제7조 — 국가원수나 정부 고관이라는 지위는 책임을 면하게 하지 않는다. 제8조 — 상급자의 명령에 따랐다는 사실은 책임을 면하게 하지 않으며, 양형에서만 참작될 수 있다. 이 두 조항이 없었다면 카이텔과 요들의 방어는 성립했을 것이다.

3. 법정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갔나

언어
동시통역 4개 국어

영어·독일어·프랑스어·러시아어가 동시에 오갔다. IBM이 장비를 댔고 법정 전원이 헤드폰을 썼다. 대규모 동시통역이 국제재판에 쓰인 첫 사례이고, 오늘날 국제회의 통역 방식의 원형이다.

증거
독일이 남긴 서류

미군이 압수한 독일 관청 문서가 증거의 뼈대였다. 프랑크는 자기 일기 38권을 스스로 제출해 최대의 자기 유죄 증거를 만들었다. 검찰이 부른 증인은 33명뿐이다.

판사
배심 없는 다수결

4개국이 정판사·예비판사를 각 1명씩 냈다. 유죄와 양형 모두 정판사 4명의 다수결로 정했고 가부동수면 재판장 쪽이 이겼다. 세 건의 무죄는 표가 갈린 결과다.

조직
단체를 범죄로 판정

개인만이 아니라 조직도 심판 대상이었다. 나치당 지도부·친위대·게슈타포·보안국이 범죄조직으로 판정됐고, 돌격대·내각·군 총사령부는 인정되지 않았다.

뉘른베르크 재판 판사석 컬러 사진
600호 법정의 판사석. 4개국 판사와 예비판사가 함께 앉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취재하는 기자들
기자석. 전 세계 250여 명의 기자가 상주했다.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재판의 목적 절반이었다.

4. 재판의 시간표

1945.05–08

애시캔

룩셈부르크 몬도르프레뱅의 팰리스 호텔이 나치 지도부 수용소가 되었다. 앤드러스 대령이 지휘했고 켈리가 정신과의로 배치됐다. 전기 철조망과 감시탑이 둘러싼 호텔에서 괴링의 마약 중독을 끊기는 일이 켈리의 첫 임무였다.

애시캔
더글러스 켈리, 33세. 미국에서 로르샤흐를 가장 잘 아는 정신과의 중 하나였다.

1945.08.08

런던 헌장

미·영·프·소 4개국이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에 서명했다. 세 가지가 처음으로 성문화됐다 —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그리고 두 가지 방어가 미리 봉쇄됐다: 국가원수라는 지위(제7조)와 상급자의 명령(제8조).

1945.08.20

뉘른베르크로 이송

도시의 91%가 폭격으로 파괴됐는데 법원 청사와 붙어 있는 형무소는 살아남았다. 피고를 옮기지 않고 법정에 세울 수 있는 건물이 유럽에 이곳뿐이었다. 나치 전당대회의 도시라는 상징성도 함께 고려됐다.

뉘른베르크로 이송
폐허가 된 뉘른베르크. 가운데 살아남은 것이 법원 청사다.

1945.10.18–19

기소장 송달

베를린에서 기소장이 제출되고, 뉘른베르크에서 에어리 니브가 피고 전원에게 직접 전달했다. 일주일 뒤 라이가 감방에서 자살한다.

기소장 송달
뉘른베르크 법원 청사, 1945년 11월 17일.

1945.11.20

개정

오전 10시, 로런스 재판장이 개정을 선언했다. 피고 21명이 2열로 앉았다. 잭슨의 개정 연설이 이날 오후에 나왔다.

개정
피고석. 앞줄 왼쪽부터 괴링·헤스·리벤트로프·카이텔·칼텐브루너·로젠베르크·프랑크·프리크·슈트라이허·풍크·샤흐트.

1945.11.29

「나치 강제수용소」 상영

검찰이 해방된 수용소의 기록영화를 법정에서 틀었다. 법정 조명을 끄고 피고석에만 조명을 남겼다. 길버트는 피고들의 표정을 하나씩 기록했다. 이날 밤 감방을 돌며 남긴 메모가 『뉘른베르크 일기』의 가장 유명한 대목이 된다.

「나치 강제수용소」 상영
검찰이 제출한 증거 문서. 재판은 증인이 아니라 독일 스스로 남긴 문서로 진행됐다.

1946.01

켈리의 이탈

켈리가 재판 도중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갔다. 길버트와의 갈등, 그리고 자료 출판을 둘러싼 경쟁이 배경으로 지목된다. 후임으로 레온 골든존이 왔다.

1946.03–04

괴링의 반격과 회스의 증언

3월, 괴링이 증언대에 서서 잭슨의 반대신문을 받아넘겼다. 법정 분위기가 한때 흔들렸고, 이후 영국의 맥스웰 파이프가 나서 그를 무너뜨렸다. 4월 15일 아우슈비츠 소장 회스가 증인으로 나와 자신이 지휘한 대량학살을 담담하게 진술했다.

괴링의 반격과 회스의 증언
증언대의 괴링.

1946.09.30–10.01

판결

이틀에 걸쳐 판결이 낭독됐다. 22명 중 12명 사형, 3명 종신형, 4명 유기징역, 3명 무죄. 조직 판정에서는 나치당 지도부·친위대·게슈타포·보안국이 범죄조직으로 인정됐고, 돌격대·내각·군 총사령부는 인정되지 않았다.

판결
판결이 낭독되는 법정.

1946.10.15

괴링의 자살

처형 두 시간여 전, 괴링이 청산가리 캡슐로 자살했다. 캡슐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12년 뒤 켈리도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끊는다.

1946.10.16

처형

오전 1시 11분부터 형무소 체육관에서 10명이 차례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집행은 존 C. 우즈 상사가 맡았다. 낙하 거리가 짧아 즉사하지 않은 사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시신은 뮌헨에서 화장돼 이자르 강에 뿌려졌다. 무덤이 순례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946–1949

후속 12개 재판

텔퍼드 테일러가 지휘한 미국 단독 재판 12건이 이어졌다. 의사 재판(인체실험), 법관 재판(사법부), 아인자츠그루펜 재판, IG 파르벤·크루프·플리크 재판(기업), 인질 재판, 고위사령부 재판 등이다. 185명이 기소돼 24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다수가 1950년대에 감형·석방됐다.

후속 12개 재판
텔퍼드 테일러. 후속 재판의 수석검사.

5. 재판을 향한 비판

비판 1
사후법 (nullum crimen sine lege)

‘평화에 반한 죄’와 ‘인도에 반한 죄’는 행위 당시 존재하지 않던 죄목이다. 재판부는 이 죄들이 이미 관습국제법 안에 있었고 헌장은 그것을 선언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지금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쟁점이다.

비판 2
승자의 정의

연합국의 행위는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다. 드레스덴·함부르크 폭격, 독소조약에 의한 폴란드 분할, 카틴 학살이 그렇다. 소련은 카틴을 독일 소행으로 기소했다가 증거가 무너져 판결문에서 빠졌다.

비판 3
‘깨끗한 국방군’ 신화

군 총사령부가 범죄조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 “군은 무관했다”로 오독됐다. 판결문은 그런 취지가 아니었고 카이텔·요들은 사형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 오독이 전후 서독에서 오래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남은 것

제노사이드 협약(1948), 제네바 협약 개정(1949), 국제형사재판소(2002)가 모두 뉘른베르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명령에 따랐다’가 방어가 되지 않는다는 원칙도 여기서 나왔다.

09

판결 일람

죄목별 결과와 형량. G 유죄 · I 기소되었으나 무죄 · — 해당 죄목 미기소.

국제군사재판소 판결, 1946년 10월 1일 — 나이는 개정일 1945.11.20 기준
피고인직위1 공모2 침략3 전쟁범죄4 인도에 반한 죄형량나이IQ
헤르만 괴링제국원수 · 공군 총사령관 · 4개년계획 총책GGGG교수형 — 집행 전날 자살52138
루돌프 헤스총통 대리 (1933–41)GGII종신형51120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외무장관 (1938–45)GGGG교수형52129
빌헬름 카이텔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총장GGGG교수형63129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국가보안본부(RSHA) 수장 (1943–45)I—GG교수형42113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나치 이념가 · 동방점령지역 장관GGGG교수형52127
한스 프랑크폴란드 총독부 총독 (1939–45)I—GG교수형45130
빌헬름 프리크내무장관 (1933–43)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IGGG교수형68124
율리우스 슈트라이허프랑켄 관구장 · 『슈튀르머』 발행인I——G교수형60106
발터 풍크경제장관 (1938–45) · 제국은행 총재IGGG종신형55124
햘마르 샤흐트제국은행 총재 · 경제장관 (1934–37)II——무죄68143
카를 되니츠U보트 사령관 · 해군 총사령관 · 최후의 제국 대통령IGG—금고 10년54138
에리히 레더해군 총사령관 (1928–43)GGG—종신형69134
발두어 폰 시라흐히틀러 유겐트 지도자 · 빈 관구장I——G금고 20년38130
프리츠 자우켈노동력 동원 전권위원 (1942–45)IIGG교수형51118
알프레트 요들OKW 작전부장 (1939–45)GGGG교수형55127
프란츠 폰 파펜전 총리 (1932) · 부총리 (1933–34)II——무죄66134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오스트리아 병합의 실행자 · 네덜란드 제국판무관IGGG교수형53141
알베르트 슈페어히틀러의 건축가 · 군수장관 (1942–45)IIGG금고 20년40128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외무장관 (1932–38)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GGGG금고 15년72125
한스 프리체선전부 방송국장I—II무죄45130
마르틴 보어만당 사무국장 · 히틀러 개인비서 — 궐석 재판I—GG궐석 사형45—
로베르트 라이독일노동전선 대표 — 재판 개시 전 자살I—II판결 없음 (재판 전 자살)55—
구스타프 크루프크루프 재벌 총수 — 건강 사유로 재판 불능I—II판결 없음 (재판 불능)75—
10

로르샤흐와 IQ — 검사가 답하지 못한 것

이 책의 핵심 장치. 켈리가 무엇을 하려 했고 왜 실패했는지를 알면 책이 훨씬 잘 읽힌다.

로르샤흐 검사란 무엇인가

좌우대칭 잉크반점 10장을 차례로 보여 주고 “무엇으로 보입니까”를 묻는다. 그림 자체에는 정답이 없다. 답이 없는 자극 앞에서 사람은 자기 안의 것을 꺼내 붙이는데, 그 붙이는 방식을 읽는다는 것이 이 검사의 발상이다.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반점의 어느 부분을 썼는가, 형태를 보았는가 색을 보았는가, 움직임을 넣었는가가 채점 대상이다.

1940년대에 이 검사는 지금과 위상이 달랐다. 성격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정밀 도구로 여겨졌고, 켈리는 미국에서 이 검사를 가장 잘 아는 소수에 속했다. 그가 “나치의 정신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은 데는 근거가 있었던 셈이다.

로르샤흐 카드 1번
카드 I. 첫 반응이 검사 전체의 기준선이 된다.
로르샤흐 카드 3번
카드 III. 두 사람이 마주 선 형태를 보는 것이 흔한 반응이다.
로르샤흐 카드 8번
카드 VIII. 처음으로 색이 크게 들어오는 카드다.

검사 결과 — 그리고 두 갈래의 해석

켈리와 길버트는 같은 자료를 놓고 정반대 결론에 도달했다.

켈리: 특징적인 것이 없다. 정신병자도 없다. 그러므로 ‘나치 성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들은 특정한 정치·사회 조건이 만들어 낸 평범한 야심가다. 그가 정말 무섭게 여긴 결론은 여기서 나온다 — 같은 조건이면 미국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길버트: 병명은 없지만 공통점은 있다. 공감 능력의 결여, 그리고 권위에 대한 도착적 복종. 그는 이것을 병리로 읽었다.

원자료는 이후 수십 년간 여러 연구자에게 재분석됐다. 1975년 몰리시와 하퍼는 이 자료를 익명으로 섞어 미국 표본과 함께 채점하게 했는데, 채점자들은 나치 기록을 골라내지 못했다. 논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

켈리가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찾을 것이 애초에 없었던 것인가. 후자라면 뉘른베르크 피고석에 앉았던 사람들과 그 바깥 사람들 사이에 심리적 경계선이 없다는 뜻이 된다. 15년 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보고 ‘악의 평범성’이라 부른 것, 그리고 밀그램의 복종 실험이 보여 준 것이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지능검사 결과

길버트가 웩슬러–벨뷰 척도로 측정한 값. 미국 성인 평균이 100이고 128 이상이 상위 2.2%에 해당한다. 21명의 평균은 128이었다.

웩슬러–벨뷰 지능검사, 길버트 측정 (1945–46) · 21명 평균 128
피고인IQ판결
햘마르 샤흐트143무죄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141교수형
헤르만 괴링138교수형 — 집행 전날 자살
카를 되니츠138금고 10년
에리히 레더134종신형
프란츠 폰 파펜134무죄
한스 프랑크130교수형
발두어 폰 시라흐130금고 20년
한스 프리체130무죄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29교수형
빌헬름 카이텔129교수형
알베르트 슈페어128금고 20년
알프레트 로젠베르크127교수형
알프레트 요들127교수형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125금고 15년
빌헬름 프리크124교수형
발터 풍크124종신형
루돌프 헤스120종신형
프리츠 자우켈118교수형
에른스트 칼텐브루너113교수형
율리우스 슈트라이허106교수형
숫자를 읽는 법

이 표가 말해 주는 것은 하나뿐이다 — 지능은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 최고점을 받은 샤흐트는 무죄를 받았고, 최저점을 받은 슈트라이허는 교수형을 받았다. 그 사이에 아무 상관관계도 없다. 켈리가 찾던 ‘표지’가 여기에도 없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11

재판이 남긴 것

1946년 10월 이후.

1946.10.16
처형

오전 1시 11분부터 형무소 체육관에서 10명이 차례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존 C. 우즈 상사가 집행했고 낙하 거리가 짧아 즉사하지 않은 사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시신은 뮌헨에서 화장돼 이자르 강에 뿌려졌다 — 무덤이 순례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947–1966
슈판다우

유기·종신형 7명이 베를린 슈판다우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66년 슈페어와 시라흐가 나간 뒤 헤스 한 사람을 위해 4개국이 21년간 감옥을 운영했고, 1987년 헤스가 죽자마자 철거됐다.

1946–1949
후속 12개 재판

텔퍼드 테일러가 지휘한 미국 단독 재판. 의사 재판·법관 재판·아인자츠그루펜 재판·기업 재판(IG 파르벤, 크루프, 플리크) 등 185명이 기소돼 24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다수가 1950년대에 감형·석방됐다.

1947
의사 재판과 뉘른베르크 강령

인체실험을 자행한 의사 23명을 심판한 재판에서 뉘른베르크 강령이 나왔다. 피험자의 자발적 동의를 의학 연구의 절대 조건으로 삼은 이 열 개 조항이 오늘날 연구윤리(IRB)의 뿌리다.

1948–2002
국제법

제노사이드 협약(1948), 제네바 협약 개정(1949), 구유고·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1993·1994), 국제형사재판소 설립(2002)이 모두 뉘른베르크의 연장선에 있다.

1958.01.01
켈리

뉘른베르크를 떠난 지 12년 뒤, 켈리는 가족이 보는 앞에서 청산가리를 삼켰다. 45세였다. 경찰은 캡슐이 뉘른베르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추정했고 가족은 부인했다. 그가 나치에게서 찾지 못한 답이 그를 어디로 데려갔는지가 이 책의 마지막 질문이다.

12

용어 사전

책에 설명 없이 나오는 조직·개념·법률 용어.

나치당 (NSDAP)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조직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1920년 독일노동자당(DAP)에서 개칭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당 지도부'(Leadership Corps)가 범죄조직으로 판정됐지만 일반 당원 전체는 아니었다.

친위대 (SS)Schutzstaffel조직

직역하면 '보호대'. 히틀러 개인 경호대로 출발해 힘러 아래에서 경찰·정보·강제수용소·무장부대를 모두 거느린 국가 안의 국가가 되었다. 뉘른베르크에서 범죄조직으로 판정됐다.

돌격대 (SA)Sturmabteilung조직

'폭풍대'. 나치당 초기의 거리 폭력을 담당한 준군사조직이다. 1934년 장검의 밤으로 지도부가 숙청된 뒤 껍데기만 남았고, 그래서 뉘른베르크에서는 범죄조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게슈타포Geheime Staatspolizei조직

'비밀국가경찰'의 줄임말. 괴링이 프로이센에서 만들었고 곧 힘러에게 넘어갔다. 영장 없는 '보호구금' 권한이 핵심이었다. 범죄조직 판정을 받았다.

보안국 (SD)Sicherheitsdienst조직

나치당의 정보기관. 하이드리히가 이끌었고 나중에 국가보안본부에 흡수됐다. 범죄조직 판정을 받았다.

국가보안본부 (RSHA)Reichssicherheitshauptamt조직

1939년 게슈타포·형사경찰(Kripo)·보안국을 하나로 묶은 기구. 하이드리히→칼텐브루너로 이어졌고 홀로코스트의 실행 사령부였다. 아이히만의 유대인 담당과(IV B4)가 여기 속했다.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조직

'특별출동집단'. 소련 침공과 함께 군대 뒤를 따라 들어가 유대인·공산당 간부·로마인을 총살한 이동학살부대다. 4개 집단(A~D)이 100만 명 이상을 살해했다.

국방군 최고사령부 (OKW)Oberkommando der Wehrmacht조직

1938년 히틀러가 국방부를 없애고 만든 군 최고기구. 총장이 카이텔, 작전부장이 요들이었다. 뉘른베르크에서 범죄조직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 판정이 훗날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근거로 오독된다.

총통 (퓌러)Führer개념

'지도자'. 1934년 힌덴부르크 사후 히틀러가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쳐 쓴 칭호다. 함께 온 것이 지도자원리(Führerprinzip) — 명령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고 책임은 오직 지도자에게만 있다는 원칙이다. 뉘른베르크 피고들이 반복해 기댄 논리이자, 헌장 제8조가 미리 막아 둔 논리다.

획일화Gleichschaltung개념

전기 용어에서 온 말로 '같은 회로에 맞춰 정렬시킨다'는 뜻이다. 1933~34년에 정당·노조·언론·주정부·직능단체를 나치 조직에 흡수하거나 해산시킨 과정을 가리킨다.

생활권Lebensraum개념

'삶의 공간'. 독일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동유럽으로 확장해 그곳 주민을 몰아내거나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다. 바르바로사 작전과 동부 절멸정책의 이념적 근거다.

최종 해결Endlösung개념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유럽 유대인 절멸 정책을 가리키는 나치의 관료적 완곡어다. 문서에 학살이라는 말 대신 이런 표현만 남았다는 점이 뉘른베르크 검찰의 입증 과제이기도 했다.

배후중상설Dolchstoßlegende개념

'등 뒤의 칼' 신화. 1차 대전에서 독일군은 전장에서 지지 않았고 후방의 유대인·사회주의자·공화주의자가 배신해서 졌다는 주장이다. 사실이 아니지만 바이마르 내내 우파의 결집 논리였고, 나치 반유대주의의 기둥이 되었다.

병합Anschluss사건

1938년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오스트리아 총리로서 독일군 진주를 '요청'하는 형식이 취해졌다.

수정의 밤Kristallnacht사건

1938년 11월 9~10일의 전국적 유대인 습격. 깨진 유리창이 거리에 반짝였다는 데서 온 이름인데, 사건의 성격을 미화하는 표현이라 요즘은 '11월 포그롬'으로 부르기도 한다.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사건

1934년 6월 30일~7월 2일, 히틀러가 돌격대 지도부 룀 등을 숙청한 사건. 이 유혈 숙청이 사후에 '국가긴급방위'로 합법화되면서 법치의 마지막 형식이 사라졌다.

애시캔Camp Ashcan / CCPWE No. 32장소

룩셈부르크 몬도르프레뱅의 팰리스 호텔에 설치된 고위 나치 수용소. 1945년 5~8월에 86명이 수용됐다. 이 책의 1막이 벌어지는 곳이다. 영국이 운영한 기술자 수용소는 '더스트빈'이라 불렸다.

600호 법정Saal 600장소

뉘른베르크 법원 청사의 법정. 피고석·판사석·통역 부스를 넣기 위해 개조됐다. 지금도 남아 있고 기념관으로 공개된다.

슈판다우 형무소Spandau장소

베를린의 형무소. 유기·종신형을 받은 7명이 여기서 복역했다. 1966년 슈페어와 시라흐가 나간 뒤 헤스 한 사람을 위해 4개국이 21년간 운영했고, 1987년 헤스가 죽자 곧바로 철거됐다.

런던 헌장London Charter / Nuremberg Charter법

1945년 8월 8일 4개국이 서명한 국제군사재판소의 설립 근거. 세 죄목을 정의하고, 국가원수 면책(제7조)과 상급자 명령(제8조)을 방어사유에서 배제했다.

평화에 반한 죄Crimes against Peace법

침략전쟁의 계획·개시·수행. 재판부는 이것을 '최고의 국제범죄'라고 불렀다 — 다른 모든 전쟁범죄의 악을 그 안에 누적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죄목 1(공모)과 2가 여기 해당한다.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법

민간인에 대한 살해·절멸·노예화·박해. 뉘른베르크에서 처음 성문화된 개념이고, 오늘날 국제형사재판소(ICC)까지 이어진다. 다만 재판부는 1939년 이전 독일 국내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는 침략전쟁과의 연결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할 밖으로 두었다.

소급처벌 금지nullum crimen sine lege법

'법 없이 범죄 없다'. 뉘른베르크에 대한 가장 강한 법적 비판이다 — 행위 당시 존재하지 않던 죄목으로 처벌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 죄들이 이미 관습국제법에 있었다고 답했다.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법

재판을 이긴 쪽만 열었고 연합국의 범죄(드레스덴 폭격, 카틴 학살, 독소조약의 폴란드 분할)는 다뤄지지 않았다는 비판. 실제로 소련은 카틴을 독일 소행으로 기소했다가 증거가 약해 판결문에서 빠졌다.

로르샤흐 검사Rorschach Test검사

좌우대칭 잉크반점 10장을 보여주고 무엇이 보이는지 묻는 투사검사. 켈리는 이것으로 '나치의 정신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검사 결과의 해석을 두고 켈리와 길버트가 갈라졌고, 원자료는 이후 수십 년간 여러 연구자에게 재분석되며 논쟁을 이어갔다.

배심 없는 재판법

뉘른베르크에는 배심이 없었다. 4개국이 각각 정판사 1명과 예비판사 1명을 냈고, 유죄와 양형 모두 판사 4명의 다수결로 정했다. 가부동수면 재판장이 속한 쪽이 이겼기 때문에, 세 건의 무죄는 표가 갈린 결과다.

동시통역Simultaneous interpretation기술

뉘른베르크는 4개 언어(영·독·불·러) 동시통역이 대규모로 쓰인 첫 국제재판이다. IBM이 장비를 댔고 법정 전원이 헤드폰을 썼다. 오늘날 국제회의 통역 방식의 원형이다.

13

출처와 더 읽을거리

이 책과 직접 이어지는 1차 사료
  • Douglas M. Kelley, 『22 Cells in Nuremberg』(1947) — 켈리 본인이 쓴 책.
  • G. M. Gilbert, 『Nuremberg Diary』(1947) — 길버트의 감방 일지. 재판을 다루는 거의 모든 저작이 인용한다.
  • Leon Goldensohn, 『The Nuremberg Interviews』(2004) — 켈리의 후임이 남긴 137건의 면담 기록. 사후 출간.
  • Burton C. Andrus, 『The Infamous of Nuremberg』(1969) — 형무소장의 회고.
  • Avalon Project (Yale Law School) — 재판 속기록과 판결문 전문. avalon.law.yale.edu
배경으로 읽을 만한 것
  • Telford Taylor, 『The Anatomy of the Nuremberg Trials』(1992) — 검사 본인이 쓴 재판사.
  • Joel Dimsdale, 『Anatomy of Malice』(2016) — 같은 소재를 정신의학자가 다시 다룬 책.
  • Hannah Arendt,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 ‘악의 평범성’.
  • Christopher Browning, 『아주 평범한 사람들』(1992) — 101 예비경찰대대 연구. 켈리의 결론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한다.
  • Richard J. Evans, 제3제국 3부작 — 나치 독일 통사의 표준.
  • USHMM Holocaust Encyclopedia — encyclopedia.ushmm.org
이 페이지의 사실과 이미지
  • 인물 정보·판결·연표는 영어 위키백과(Nuremberg trials, List of defendants at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및 각 인물 문서)와 위 1차 사료를 대조해 정리했다.
  • 사진과 지도는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가져왔다. 대부분 퍼블릭 도메인(미 육군·NARA·IWM 촬영)이며, Bundesarchiv 소장 사진은 CC BY-SA 3.0 de, 일부 지도·도표는 CC BY-SA 2.5/3.0/4.0이다. 원본과 저작자 표시는 각 파일의 공용 페이지에 있다.
  • 길버트와 골든존은 자유 이용 가능한 사진이 없어 이니셜로 대신했다.
  • 재판 당시 나이는 개정일 1945년 11월 20일을 기준으로 계산했다.
잭 엘하이(Jack El-Hai),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채재용 옮김, 히포크라테스) 독서 보조 자료.
원제 The Nazi and the Psychiatrist: Hermann Göring, Dr. Douglas M. Kelley, and a Fatal Meeting of Minds at the End of WWII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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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

감방 쪽 사람들. 네 명이 이 책의 축이다.

더글러스 M. 켈리
더글러스 M. 켈리

Douglas M. Kelley · 1912–1958

미 육군 정신과 군의관 — 이 책의 주인공

재판 당시 33세정신의학
나치 이전
캘리포니아 트러키 태생. UC 버클리와 UC 샌프란시스코에서 의학을 마치고, 컬럼비아대에서 로르샤흐 검사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로르샤흐를 가장 잘 아는 소수 중 하나였다. 아마추어 마술사이기도 해서 마술을 정신과 환자의 작업치료에 쓰는 논문을 발표했다.
나치에서
1945년 5월, 룩셈부르크 몬도르프레뱅의 수용소 '애시캔'에 배치돼 나치 지도부 22명을 맡았다. 임무는 치료가 아니라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 판정하는 것이었다. 8월 뉘른베르크로 함께 옮겨 형무소 수석 정신과의가 되었다. 수감자들과 보낸 시간은 80~90시간에 이른다.
재판에서
로르샤흐 검사·IQ 검사·자서전 작성을 시켰다. 괴링의 파라코데인 중독을 끊게 하면서 가까워졌고, 괴링은 그를 '나의 정신과 의사'라 불렀다. 켈리가 도달한 결론은 그가 기대한 것과 정반대였다 — 이들에게서 공통된 병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은 우리 모두가 그렇듯 환경의 산물이었을 뿐'이고, 같은 조건이면 미국에서도 같은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 이후
1946년 1월, 재판 도중 갑자기 뉘른베르크를 떠났다. 1947년 『뉘른베르크의 22개 감방』을 출간했다. 이후 UC 버클리 범죄학과 교수로 거짓말탐지기·자백약을 연구했고 경찰과 산쿠엔틴 교도소에 자문했다. 1958년 1월 1일, 가족이 보는 앞에서 청산가리를 삼켰다. 45세였다. 괴링과 같은 방식이었다는 사실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구스타프 M. 길버트

Gustave M. Gilbert · 1911–1977

미 육군 형무소 심리학자

재판 당시 34세심리학
나치 이전
뉴욕에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이민자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컬럼비아대 심리학 박사(1939). 독일어에 능통해 통역 장교로 파견됐다.
나치에서
뉘른베르크 형무소 심리학자로 임명돼 켈리와 함께 일했다. 켈리와 달리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해 통역 없이 피고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이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뒤틀었다. 켈리가 떠난 뒤 재판이 끝날 때까지 남았다.
재판에서
피고들의 감방을 매일 드나들며 대화를 기록했다. 켈리와는 자료의 소유권과 출판 우선권을 두고 갈등했다. 두 사람은 같은 검사 결과를 놓고 정반대 결론을 냈다 — 길버트는 나치 지도부에게 공통된 병리, 특히 공감 능력의 결여가 있다고 보았다.
그 이후
1947년 『뉘른베르크 일기』를 냈다. 이 책은 지금도 재판을 다루는 거의 모든 저작이 인용하는 1차 사료다. 1950년 『독재의 심리학』을 썼고, 1961년 예루살렘 아이히만 재판에 증인으로 섰다. 롱아일랜드대 심리학과장을 지냈다.
레온 골든존

Leon Goldensohn · 1911–1961

켈리의 후임 정신과 군의관 (1946년 1월~)

재판 당시 34세정신의학
나치 이전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 오하이오 주립대를 거쳐 조지워싱턴대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분석 훈련을 받았다.
나치에서
1943년 입대해 프랑스·독일에서 63사단 정신과의로 복무했다. 1946년 1월 켈리가 떠난 자리를 이어받았다.
재판에서
6개월 넘게 피고 21명과 증인들을 만나 137건의 면담을 기록했다. 켈리·길버트와 달리 생전에 아무것도 출판하지 않았다.
그 이후
1961년 사망. 남긴 면담 기록은 동생 엘리가 정리해 2004년 『뉘른베르크 인터뷰』로 출간됐고, 원본은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기증됐다.
버턴 C. 앤드러스
버턴 C. 앤드러스

Burton C. Andrus · 1892–1977

애시캔·뉘른베르크 형무소장 (대령)

재판 당시 53세형무소
나치 이전
미 육군 직업군인.
나치에서
1945년 5월 룩셈부르크의 '애시캔'을 지휘했고, 8월 피고들과 함께 뉘른베르크로 옮겨 형무소장을 맡았다.
재판에서
자살 방지가 최우선 임무였다. 넥타이·면도날을 압수하고 감방마다 24시간 감시를 붙였다. 그럼에도 라이는 재판 전에, 괴링은 처형 전날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괴링의 청산가리 캡슐이 어떻게 감방에 들어갔는지는 앤드러스의 경력에 평생 남은 오점이 되었다.
그 이후
1969년 회고록 『뉘른베르크의 간수』를 출간했다.
15

피고인 24명

기소된 사람은 24명, 실제로 심리를 받은 사람은 22명이다. 라이는 재판 전에 자살했고 크루프는 건강 때문에 재판 자체가 열리지 않았으며 보어만은 궐석이었다. 순서는 나치 이전 경력 → 나치에서의 활동 → 재판 → 그 이후다.

헤르만 괴링
헤르만 괴링

Hermann Göring · 1893–1946

제국원수 · 공군 총사령관 · 4개년계획 총책

재판 당시 52세교수형 — 집행 전날 자살IQ 138
죄목
1 공모 · 유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바이에른 로젠하임의 판사·식민지 총독 집안에서 태어났다. 1차 대전 전투기 조종사로 22기를 격추해 최고 무공훈장 푸르 르 메리트를 받았고, 리히트호펜이 이끌던 제1전투비행단의 마지막 지휘관이 되었다. 전후 스웨덴에서 곡예비행 조종사로 일하다 부유한 스웨덴 귀족 카린과 결혼했다.
나치에서
1922년 히틀러를 만나 초기 돌격대(SA) 지휘관이 되었다. 1923년 뮌헨 폭동에서 사타구니에 총상을 입었고, 이때 처방된 모르핀이 평생의 중독으로 이어졌다. 1933년 프로이센 내무장관으로 게슈타포를 창설했고 최초의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1935년 공군 창설과 함께 총사령관, 1936년 4개년계획 전권위원으로 전시경제를 장악했다. 1939년 히틀러의 공식 후계자로 지명되고 1940년 그를 위해 신설된 계급 '제국원수'에 올랐다. 점령지 미술품 약탈로 유럽 최대의 개인 컬렉션을 모았다.
재판에서
4개 죄목 전부 유죄. 켈리가 가장 오래, 가장 깊이 관찰한 인물이다. 수감 당시 하루 파라코데인 40정을 복용하는 중독 상태였는데 켈리가 이를 끊게 했고, 체중 270파운드에서 약 60파운드를 감량시켰다. 법정에서는 잭슨 검사와의 반대신문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평이 나올 만큼 기민했다. 켈리는 그를 '정신병자가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그 이후
1946년 10월 15일 밤, 처형 두 시간여 전에 청산가리 캡슐로 자살했다. 캡슐의 입수 경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시신은 화장돼 이자르 강에 뿌려졌다.
루돌프 헤스
루돌프 헤스

Rudolf Heß · 1894–1987

총통 대리 (1933–41)

재판 당시 51세종신형IQ 120
죄목
1 공모 · 유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무죄4 인도에 반한 죄 · 무죄
나치 이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독일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차 대전에 보병으로 참전해 여러 번 부상했고 말년에는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 전후 뮌헨대학에서 지정학자 카를 하우스호퍼에게 배웠다.
나치에서
1920년 나치당 입당. 뮌헨 폭동에 가담해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됐고, 거기서 『나의 투쟁』을 받아썼다. 1933년 총통 대리로 임명돼 당 조직의 정점에 섰다.
재판에서
1941년 5월 단독으로 메서슈미트를 몰고 스코틀랜드에 착륙해 영국과의 강화를 시도했다. 이후 종전까지 영국에 억류됐다. 뉘른베르크에서는 기억상실을 주장했고, 법정 능력 심사가 열렸다. 켈리와 길버트는 히스테리성 기억상실로 보았고, 헤스는 재판 도중 기억이 돌아왔다고 스스로 선언했다. 22명 중 유일하게 '진짜 정신질환에 가깝다'고 평가된 인물이다.
그 이후
슈판다우 형무소에서 복역. 1966년 이후 21년간 이 감옥의 유일한 수감자였고, 1987년 93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Joachim von Ribbentrop · 1893–1946

외무장관 (1938–45)

재판 당시 52세교수형IQ 129
죄목
1 공모 · 유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직업군인의 아들. 캐나다에서 사업을 하다 1차 대전 발발과 함께 귀국해 참전했다. 전후 샴페인 수입상으로 성공했고, 귀족 부인의 이모에게 돈을 주고 성에 'von'을 붙였다.
나치에서
1932년 입당. 자기 별장 슐로스 푸슐에서 히틀러의 총리 임명을 성사시킨 비밀회동이 열렸다. 1936년 주영대사, 1938년 외무장관.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직접 체결했다.
재판에서
침략전쟁 준비와 점령지 유대인 절멸 정책 관여로 4개 죄목 전부 유죄. 동료 피고들조차 그를 무능하고 허세뿐이라 평했다.
그 이후
1946년 10월 16일 오전 1시 30분, 첫 번째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빌헬름 카이텔
빌헬름 카이텔

Wilhelm Keitel · 1882–1946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총장

재판 당시 63세교수형IQ 129
죄목
1 공모 · 유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하노버 지방 농장주의 아들로 직업군인이 되었다. 1차 대전에서 포병 장교로 참전해 중상을 입었고, 이후 참모본부에서 경력을 쌓았다.
나치에서
1935년 국방부 군무국장. 1938년 히틀러가 국방부를 해체하고 OKW를 세우자 그 총장이 되었다. 히틀러의 명령을 무조건 집행해 동료 장교들에게 '라카이텔'(하인 카이텔)이라 조롱당했다. 정치위원 명령, 코만도 명령, '밤과 안개' 포고 등 다수의 범죄적 명령에 서명했다.
재판에서
스스로 서명한 문서가 그대로 증거가 되었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항변은 헌장 제8조에 의해 인정되지 않았다.
그 이후
교수형. 군인답게 총살당하기를 청원했으나 기각됐다.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Ernst Kaltenbrunner · 1903–1946

국가보안본부(RSHA) 수장 (1943–45)

재판 당시 42세교수형IQ 113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미기소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오스트리아 변호사 집안. 그라츠대학에서 법학박사를 받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나치에서
1930년 입당, 1931년 친위대(SS) 가입. 오스트리아 병합 후 오스트리아 고위 SS·경찰 지휘관. 하이드리히 암살 후 1943년 1월 RSHA 수장이 되어 게슈타포·형사경찰·보안국(SD)을 총괄했다. 뉘른베르크에 선 최고위 SS 인물이다.
재판에서
강제수용소 체계와 절멸 작전의 실무 정점. 문서마다 남은 자기 서명을 '위조'라고 부인했다. 재판 중 뇌출혈로 한동안 결석했다.
그 이후
교수형.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Alfred Rosenberg · 1893–1946

나치 이념가 · 동방점령지역 장관

재판 당시 52세교수형IQ 127
죄목
1 공모 · 유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에스토니아 레발(탈린)의 발트 독일인 가정 출신. 모스크바에서 건축학을 공부했고 러시아 혁명을 피해 1918년 독일로 왔다.
나치에서
1920년대 초부터 나치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 편집장. 1930년 『20세기의 신화』로 인종주의 이념의 교본을 썼다(당 안에서도 읽은 사람이 드물었다). 1941년 동방점령지역 제국장관으로 소련 점령지 통치를 맡았고, 로젠베르크 특무대(ERR)를 통해 유럽의 유대인 문화재를 대규모로 약탈했다.
재판에서
이념이 곧 범죄의 설계도였다는 점이 쟁점이었다. 4개 죄목 전부 유죄.
그 이후
교수형.
한스 프랑크
한스 프랑크

Hans Frank · 1900–1946

폴란드 총독부 총독 (1939–45)

재판 당시 45세교수형IQ 130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미기소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카를스루에 태생.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다.
나치에서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DAP) 초기 당원. 뮌헨 폭동에 참가했고, 이후 히틀러 개인 변호사이자 당의 법률고문이 되었다. 1933년 제국법률지도자, 1939년 점령 폴란드의 총독부 총독. 그의 통치 아래 폴란드 유대인 절멸과 폴란드 지식인 학살이 진행됐다.
재판에서
38권짜리 개인 일기를 스스로 미군에 제출했고,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불리한 증거가 되었다. 수감 중 가톨릭으로 회심했고 법정에서 '천 년이 흘러도 독일의 죄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다만 뒤에 그 진술을 일부 철회했다.
그 이후
교수형.
빌헬름 프리크
빌헬름 프리크

Wilhelm Frick · 1877–1946

내무장관 (1933–43)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

재판 당시 68세교수형IQ 124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법학박사. 뮌헨 경찰청 형사국 간부로 일했다.
나치에서
경찰 간부이면서 뮌헨 폭동을 도왔다. 1930년 튀링겐 주 내무장관이 되어 독일 최초의 나치 각료가 되었다. 1933년 제국내무장관으로 수권법·공무원법·뉘른베르크 인종법 등 나치 체제의 법적 골격을 입안했다. 안락사 계획(T4)의 행정 근거도 그의 부처에서 나왔다.
재판에서
'법으로 만들어진 범죄'의 대표 사례. 법정에서 거의 발언하지 않았고 증언대에도 서지 않았다.
그 이후
교수형. 좁은 낙하문에 머리를 부딪혀 얼굴에 부상을 입은 채 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Julius Streicher · 1885–1946

프랑켄 관구장 · 『슈튀르머』 발행인

재판 당시 60세교수형IQ 106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미기소3 전쟁범죄 · 미기소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초등학교 교사. 1차 대전에 참전해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나치에서
1923년 반유대주의 주간지 『데어 슈튀르머』를 창간했다.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선정성과 유대인 의례살인 날조로 악명 높았고, 이 신문 하나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프랑켄 관구장으로서 부패와 사생활 추문이 심해 1940년 당의 모든 공직에서 해임됐다. 그럼에도 히틀러의 개인적 비호는 유지됐다.
재판에서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절멸을 알면서 선동을 계속했다는 이유로 인도에 반한 죄만으로 유죄. 피고인 중 IQ 최저를 기록했고, 켈리·길버트 모두 그를 병적인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형사책임을 면할 정신질환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검사에게 시종 반항적이었다.
그 이후
교수형. 교수대에서 '유대인의 축제일이군', '하일 히틀러'라고 외쳤다.
발터 풍크
발터 풍크

Walther Funk · 1890–1960

경제장관 (1938–45) · 제국은행 총재

재판 당시 55세종신형IQ 124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경제신문 편집자. 보수 경제지 『베를리너 뵈르젠차이퉁』 편집장이었다.
나치에서
1931년 입당해 히틀러와 재계를 잇는 통로 역할을 했다. 1933년 선전부 차관, 1938년 샤흐트 후임으로 경제장관, 1939년 제국은행 총재. 제국은행 금고에 수용소 희생자에게서 뜯어낸 금니·귀금속이 들어온 '멜머 예치'가 그의 재임 중 이뤄졌다.
재판에서
'금니가 든 상자가 은행 금고에 들어온 것을 몰랐다'는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 내내 눈에 띄게 위축돼 있었고 자주 울었다.
그 이후
1957년 건강 악화로 석방. 1960년 사망.
햘마르 샤흐트
햘마르 샤흐트

Hjalmar Schacht · 1877–1970

제국은행 총재 · 경제장관 (1934–37)

재판 당시 68세무죄IQ 143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무죄3 전쟁범죄 · 미기소4 인도에 반한 죄 · 미기소
나치 이전
경제학 박사, 은행가. 1923년 초인플레이션을 렌텐마르크 도입으로 잡은 '통화 위원'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독일민주당(DDP) 공동창당자이기도 하다.
나치에서
1933년 제국은행 총재로 복귀해 메포 어음이라는 우회 금융기법으로 재군비 자금을 조달했다. 1936년부터 괴링의 4개년계획과 충돌해 밀려났고, 1939년 해임,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후 체포돼 종전까지 강제수용소에 있었다.
재판에서
피고인 중 IQ 최고점(143)을 기록했다. 재군비 자금을 만들었지만 침략전쟁을 의도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 세 무죄 판결은 모두 판사들의 표가 갈린 결과였다.
그 이후
1947년 독일 탈나치화 법정에서 8년 노동형을 받았으나 항소로 뒤집었다. 이후 개발도상국 금융 자문으로 활동하다 1970년 사망.
카를 되니츠
카를 되니츠

Karl Dönitz · 1891–1980

U보트 사령관 · 해군 총사령관 · 최후의 제국 대통령

재판 당시 54세금고 10년IQ 138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미기소
나치 이전
직업 해군장교. 1차 대전 때 잠수함 UB-68 함장으로 지중해에서 격침돼 영국군 포로가 되었다.
나치에서
잠수함대를 재건하고 이리떼 전술을 고안해 대서양 전투를 지휘했다. 1943년 해군 총사령관. 1945년 4월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제국 대통령이 되어 5월 8일 무조건 항복에 이르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이끌었다.
재판에서
침략전쟁 수행과 전쟁범죄로 유죄. 다만 무제한 잠수함전 부분은 미 해군도 태평양에서 같은 방식으로 싸웠다는 니미츠 제독의 진술서 때문에 양형에서 제외됐다. 10년은 가장 가벼운 실형이었다.
그 이후
1956년 만기 출소. 회고록에서 끝까지 후회를 표하지 않았고 1980년 사망.
에리히 레더
에리히 레더

Erich Raeder · 1876–1960

해군 총사령관 (1928–43)

재판 당시 69세종신형IQ 134
죄목
1 공모 · 유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미기소
나치 이전
제국해군 장교로 1차 대전에 참전했고, 유틀란트 해전에 참여한 뒤 해군 공식 전사를 집필했다.
나치에서
1928년 해군 총사령관. 베르사유 조약의 제한을 우회해 함대를 재건했고 1939년 최고 계급인 대제독에 올랐다. 히틀러와 전략을 두고 충돌해 1943년 사임했다.
재판에서
침략전쟁 계획과 조약 위반으로 유죄. 사형을 예상하다 종신형을 받자 충격을 받고, 차라리 총살해 달라는 청원을 법정에 냈다.
그 이후
1955년 건강 악화로 석방, 1960년 사망.
발두어 폰 시라흐
발두어 폰 시라흐

Baldur von Schirach · 1907–1974

히틀러 유겐트 지도자 · 빈 관구장

재판 당시 38세금고 20년IQ 130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미기소3 전쟁범죄 · 미기소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베를린 태생. 어머니가 미국인이라 미국 독립선언 서명자의 후손이기도 하다. 부유한 극장 감독 집안에서 자랐다.
나치에서
18세에 입당해 1931년 나치당 청소년 지도자, 1933년 제국청소년지도자가 되었다. 독일의 모든 청소년 단체를 히틀러 유겐트로 흡수해 한 세대를 체제 안에 편입시켰다. 1940년 빈 관구장 겸 제국총독으로 옮겨 빈 유대인 6만여 명의 동부 추방을 집행했다.
재판에서
독일 청소년을 세뇌한 책임이 아니라 빈에서의 추방 집행으로 인도에 반한 죄만 유죄. 피고인 중 유일하게 법정에서 히틀러를 명시적으로 비난하며 '독일 청년에게 인종적 증오를 가르친 것은 나의 죄'라고 말했다.
그 이후
1966년 만기 출소, 1974년 사망.
프리츠 자우켈
프리츠 자우켈

Fritz Sauckel · 1894–1946

노동력 동원 전권위원 (1942–45)

재판 당시 51세교수형IQ 118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무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어부의 아들로 15세부터 선원 생활을 했다. 1차 대전 중 프랑스에 적성국인으로 억류됐고, 전후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나치에서
1923년 입당, 1927년 튀링겐 관구장. 1942년 노동력 동원 전권위원으로 점령지에서 500만 명이 넘는 강제노동자를 독일로 끌어왔다. 그중 다수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재판에서
숫자 자체가 유죄의 증거였다. 슈페어와 같은 죄목으로 기소됐지만 자우켈은 사형, 슈페어는 20년을 받아 판결의 형평성 논란이 남았다.
그 이후
교수형.
알프레트 요들
알프레트 요들

Alfred Jodl · 1890–1946

OKW 작전부장 (1939–45)

재판 당시 55세교수형IQ 127
죄목
1 공모 · 유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바이에른 포병 장교 가문. 1차 대전에 포병 장교로 참전해 두 차례 부상했고 참모 교육을 받았다.
나치에서
1939년부터 종전까지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부장으로 히틀러의 군사 참모 역할을 했다. 코만도 명령과 정치위원 명령을 하달했고, 노르웨이 핀마르크의 초토화 작전을 지시했다. 1945년 5월 7일 랭스에서 독일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재판에서
4개 죄목 전부 유죄. '군인은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방어는 문서 앞에서 무너졌다.
그 이후
교수형. 1953년 독일 탈나치화 법정이 사후 명예회복을 결정했으나 이후 뒤집혔다.
프란츠 폰 파펜
프란츠 폰 파펜

Franz von Papen · 1879–1969

전 총리 (1932) · 부총리 (1933–34)

재판 당시 66세무죄IQ 134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무죄3 전쟁범죄 · 미기소4 인도에 반한 죄 · 미기소
나치 이전
베스트팔렌 가톨릭 귀족. 프로이센 육군 참모장교로 워싱턴 주재 무관을 지내다 사보타주 공작에 연루돼 추방됐다. 중앙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나치에서
1932년 총리. 1933년 1월 힌덴부르크를 설득해 히틀러를 총리로 앉히고 자신은 부총리가 되었다. '우리가 히틀러를 고용했다'는 판단은 6개월 만에 무너졌다. 1934년 장검의 밤에 측근이 살해되자 물러나 오스트리아·터키 대사로 밀려났다.
재판에서
히틀러를 권좌에 올린 결정적 인물이지만, 전쟁 자체를 계획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 방청석과 여론 모두 놀랐다.
그 이후
1947년 독일 탈나치화 법정에서 8년 노동형을 받았으나 항소로 뒤집었다. 1969년 사망.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Arthur Seyß-Inquart · 1892–1946

오스트리아 병합의 실행자 · 네덜란드 제국판무관

재판 당시 53세교수형IQ 141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모라비아 태생 오스트리아인. 1차 대전 때 오스트리아군 산악부대 장교로 참전해 훈장을 받았고, 전후 빈에서 성공한 변호사가 되었다.
나치에서
1938년 3월 독일의 압력으로 오스트리아 총리에 임명된 지 이틀 만에 독일군 진주를 '요청'해 병합을 완성했다. 1939년 폴란드에서 프랑크의 부총독, 1940년부터 종전까지 점령 네덜란드 제국판무관. 네덜란드 유대인 10만 명 이상이 그의 통치 아래 이송돼 살해됐다. 1944–45년 겨울 '기근의 겨울'에 대한 책임도 물었다.
재판에서
IQ 141로 샤흐트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4개 중 3개 죄목 유죄.
그 이후
교수형. 마지막으로 교수대에 오른 사람이다.
알베르트 슈페어
알베르트 슈페어

Albert Speer · 1905–1981

히틀러의 건축가 · 군수장관 (1942–45)

재판 당시 40세금고 20년IQ 128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무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건축가 집안의 아들로 건축을 전공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스스로 말했다.
나치에서
1931년 입당.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장의 '빛의 대성당' 연출로 히틀러의 눈에 들어 총통관저와 게르마니아(베를린 개조계획)를 설계했다. 1942년 군수장관이 되어 연합군의 폭격 아래에서도 군수생산을 배가시켰다. 그 생산은 자우켈이 끌어온 강제노동에 의존했다.
재판에서
강제노동 사용으로 유죄. 다만 법정에서 유일하게 '지도부의 집단 책임'을 인정했고, 판사들이 교화 가능성을 인정해 사형 대신 20년을 선고했다. 켈리와 길버트 모두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그 이후
슈판다우에서 20년을 채우고 1966년 출소. 『기억』 등 회고록으로 '몰랐던 기술관료'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 자기서사는 이후 사료로 반박됐다.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Konstantin von Neurath · 1873–1956

외무장관 (1932–38)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

재판 당시 72세금고 15년IQ 125
죄목
1 공모 · 유죄2 침략전쟁 · 유죄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슈바벤 귀족 가문. 1901년부터 직업 외교관으로 덴마크 공사, 이탈리아·영국 대사를 지냈다. 1차 대전에 참전해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나치에서
1932년 파펜 내각의 외무장관이 되어 히틀러 아래에서도 유임됐다. 나치 초기 외교의 '점잖은 얼굴' 역할을 했다. 1938년 리벤트로프에게 자리를 내주고 1939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이 되어 체코 저항을 탄압했다.
재판에서
72세로 피고인 중 최고령. 4개 죄목 전부 유죄지만 1939년 체코인 석방 개입과 1941년 이후 직무 이탈이 정상 참작됐다.
그 이후
1954년 심장병으로 조기 석방, 1956년 사망.
한스 프리체
한스 프리체

Hans Fritzsche · 1900–1953

선전부 방송국장

재판 당시 45세무죄IQ 130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미기소3 전쟁범죄 · 무죄4 인도에 반한 죄 · 무죄
나치 이전
언론인. 후겐베르크의 독일국가인민당(DNVP) 계열 통신사에서 일했다.
나치에서
1933년 소속 통신사가 괴벨스의 선전부에 흡수되면서 함께 들어갔다. 당대 독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라디오 목소리였다. 소련이 괴벨스 대신 세운 '대역'으로 피고석에 앉았다.
재판에서
선동은 했으나 잔학행위를 계획하거나 직접 선동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켈리·길버트 모두 그를 두고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기록을 남겼다.
그 이후
1947년 독일 탈나치화 법정에서 9년 노동형. 1950년 조기 석방돼 1953년 암으로 사망.
마르틴 보어만
마르틴 보어만

Martin Bormann · 1900–1945

당 사무국장 · 히틀러 개인비서 — 궐석 재판

재판 당시 45세궐석 사형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미기소3 전쟁범죄 · 유죄4 인도에 반한 죄 · 유죄
나치 이전
농장 관리인. 1922년 의용군(프라이코어)에 가담했고, 친구 루돌프 회스(훗날 아우슈비츠 소장)의 살인 사건 공범으로 1년 가까이 복역했다.
나치에서
히틀러의 개인비서로 총통에게 가는 정보와 접근을 통제해 막대한 권력을 쥐었다. 헤스가 영국으로 날아간 뒤 당 사무국장이 되었다. 교회 탄압과 동부 점령지 정책에서 강경파였다.
재판에서
연합국은 그의 생사를 몰라 궐석 재판을 열었고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 내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 이후
1972년 베를린에서 발견된 유해가 1998년 DNA로 그의 것으로 확인됐다. 1945년 5월 2일 베를린 탈출 중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 재판이 열리기 반년 전에 이미 죽어 있었다.
로베르트 라이
로베르트 라이

Robert Ley · 1890–1945

독일노동전선 대표 — 재판 개시 전 자살

재판 당시 55세판결 없음 (재판 전 자살)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미기소3 전쟁범죄 · 무죄4 인도에 반한 죄 · 무죄
나치 이전
화학 박사. 1차 대전에 참전해 격추당한 뒤 프랑스 포로가 되었고, 이때 입은 뇌 손상으로 평생 말을 더듬었다. 전후 IG 파르벤에서 식품화학자로 일했다.
나치에서
1933년 노동조합을 해산시키고 그 자리에 독일노동전선(DAF)을 세워 종전까지 이끌었다. 여가조직 '기쁨을 통한 힘'(KdF)과 폭스바겐 계획을 주도했다. 심한 알코올 중독과 기행으로 유명했다.
재판에서
켈리가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주목한 인물이다. 22명 중 유일하게 '임상적으로 이상하다'고 판단했고, 라이 스스로도 자기 뇌를 검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후
1945년 10월 25일, 재판 개시 26일 전에 감방에서 수건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 켈리는 그의 뇌를 미국으로 보내 부검을 의뢰했고, 전두엽 손상이 확인됐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설명하는지는 끝내 답이 나오지 않았다.
구스타프 크루프
구스타프 크루프

Gustav Krupp von Bohlen und Halbach · 1870–1950

크루프 재벌 총수 — 건강 사유로 재판 불능

재판 당시 75세판결 없음 (재판 불능)
죄목
1 공모 · 무죄2 침략전쟁 · 미기소3 전쟁범죄 · 무죄4 인도에 반한 죄 · 무죄
나치 이전
헤이그 태생 외교관. 바티칸 주재 프로이센 영사였다가 빌헬름 2세의 주선으로 크루프가의 상속녀 베르타와 결혼하며 크루프 성을 얻었다.
나치에서
1909년부터 크루프 AG를 이끌며 두 차례 세계대전에 무기를 댔다. 재군비를 위한 공모와 나치당 자금 지원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에서
1941년 뇌졸중 후유증으로 법정에 설 수 없었다. 검찰이 아들 알프리트로 피고를 교체하자고 요청했으나 재판부가 거부했다.
그 이후
1950년 사망. 아들 알프리트는 별도의 '크루프 재판'에서 강제노동 사용으로 12년형을 받았다.
16

법정을 만든 사람들

판사 4명, 검사 4개국. 이 재판을 없던 형식에서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로버트 H. 잭슨
로버트 H. 잭슨

Robert H. Jackson · 1892–1954

미국 수석검사 · 연방대법관

재판 당시 53세검찰
배경
런던 회의에서 재판의 틀을 설계한 사람이다. 처칠과 스탈린이 '주요 전범은 즉결 총살'을 검토할 때 재판을 관철시켰다. 개정 연설에서 '권력에 취한 네 나라가 복수의 손을 멈추고, 사로잡은 적을 법의 심판에 자발적으로 넘긴 것은 권력이 이성에 바친 가장 중요한 헌사'라고 말했다. 다만 괴링을 상대한 반대신문은 준비 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제프리 로런스
제프리 로런스

Geoffrey Lawrence · 1880–1971

재판장 (영국)

재판 당시 64세재판부
배경
4개국 판사 중 재판장. 절차를 조용하고 공정하게 끌고 갔다는 평가가 지금까지 재판의 정당성을 떠받친다. 피고에게 발언 기회를 폭넓게 준 것이 특징이다.
프랜시스 비들
프랜시스 비들

Francis Biddle · 1886–1968

판사 (미국) · 전 법무장관

재판 당시 59세재판부
배경
루스벨트 행정부의 법무장관을 지냈다. 평결문 작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공모죄(1번 죄목)의 범위를 좁히는 데 관여했다.
이오나 니키첸코
이오나 니키첸코

Iona Nikitchenko · 1895–1967

판사 (소련)

재판 당시 50세재판부
배경
1930년대 모스크바 여론재판의 판사였던 인물이 뉘른베르크의 판사석에 앉았다는 사실은 이 재판의 아픈 곳이다. 세 건의 무죄와 헤스의 종신형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냈다.
앙리 도네디외 드 바브르
앙리 도네디외 드 바브르

Henri Donnedieu de Vabres · 1880–1952

판사 (프랑스)

재판 당시 65세재판부
배경
파리대학에서 30년간 형법 강좌를 맡은 국제형법 학자. 소급입법 문제를 가장 예민하게 지적했고 공모죄를 아예 삭제하자고 주장했다.
하틀리 쇼크로스
하틀리 쇼크로스

Hartley Shawcross · 1902–2003

영국 수석검사 · 법무총감

재판 당시 43세검찰
배경
영국 검찰단을 이끌었다. 실무는 데이비드 맥스웰 파이프가 맡았고, 괴링을 반대신문에서 무너뜨린 것은 잭슨이 아니라 맥스웰 파이프였다.
로만 루덴코
로만 루덴코

Roman Rudenko · 1907–1981

소련 수석검사

재판 당시 38세검찰
배경
38세로 4개국 수석검사 중 가장 젊었다. 소련 측 증거 중 카틴 학살을 독일 소행으로 제출한 것이 뒷날 소련 스스로의 범죄로 밝혀지면서 재판의 큰 흠으로 남았다.
텔퍼드 테일러
텔퍼드 테일러

Telford Taylor · 1908–1998

미국 검사 → 후속 12개 재판 수석검사

재판 당시 37세검찰
배경
IMT에서는 잭슨의 참모였고, 1946년 이후 의사 재판·아인자츠그루펜 재판 등 후속 12개 재판을 지휘했다. 1992년 『뉘른베르크 재판의 해부』를 남겼다.
에어리 니브
에어리 니브

Airey Neave · 1916–1979

기소장 송달관

재판 당시 29세법정
배경
콜디츠 성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최초의 영국군 장교. 29세에 피고 전원에게 기소장을 직접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훗날 영국 하원의원이 되었고 1979년 IRA 분파의 차량 폭탄으로 사망했다.
17

법정에 서지 못한 자들

가장 책임이 큰 세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리고 증언대에 선 몇 사람이 재판의 성격을 바꿨다.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 1889–1945

총통 겸 제국총리

1945년 4월 30일 자살 (56세)자살
배경
1945년 4월 30일 베를린 총통 지하벙커에서 자살했다. 재판의 중심에 있어야 할 인물이 부재한 채로 재판이 열렸고, 살아남은 피고들은 그 빈자리에 책임을 몰아넣었다.
하인리히 힘러
하인리히 힘러

Heinrich Himmler · 1900–1945

친위대 전국지도자 · 경찰 총수

1945년 5월 23일 자살 (44세)자살
배경
친위대(SS)·게슈타포·강제수용소 체계 전체의 정점. 홀로코스트의 실행 책임자다. 1945년 5월 영국군에 붙잡힌 직후 청산가리 캡슐로 자살했다.
요제프 괴벨스
요제프 괴벨스

Joseph Goebbels · 1897–1945

선전장관

1945년 5월 1일 자살 (48세)자살
배경
언론·영화·라디오를 장악해 여론을 설계했다. 1945년 5월 1일 벙커에서 여섯 자녀를 독살한 뒤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그의 '대역'으로 프리체가 피고석에 앉았다.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

Adolf Eichmann · 1906–1962

RSHA 유대인 담당과장

1945년 당시 39세 — 도주도주
배경
유럽 유대인의 이송을 실무적으로 조직한 인물. 종전 후 아르헨티나로 달아났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체포돼 1961년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이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남겼다 — 켈리가 15년 앞서 뉘른베르크에서 도달했던 결론과 겹친다.
루돌프 회스
루돌프 회스

Rudolf Höß · 1901–1947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1945년 당시 43세 — 뉘른베르크 증인증인
배경
1946년 4월 뉘른베르크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아우슈비츠에서 250만 명을 가스로 죽였다고 담담하게 진술했다(실제 추정치는 110만 명). 이 증언은 재판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으로 기록됐다. 길버트가 그를 면담했고, 그의 무감정한 태도는 '악의 평범성' 논의의 원형이 되었다. 1947년 폴란드에서 처형됐다.
오토 올렌도르프
오토 올렌도르프

Otto Ohlendorf · 1907–1951

아인자츠그루페 D 지휘관

1945년 당시 38세 — 뉘른베르크 증인증인
배경
이동학살부대 지휘관으로서 자기 부대가 9만 명을 죽였다고 법정에서 스스로 밝혔다. 후속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 처형됐다.
에르빈 폰 라하우젠
에르빈 폰 라하우젠

Erwin von Lahousen · 1897–1955

국방군 방첩부(아프베어) 장교

1945년 당시 48세 — 검찰 측 첫 증인증인
배경
검찰이 세운 첫 증인. 카나리스 제독 아래에서 일하며 히틀러 암살 모의를 알고 있었고, 국방군 수뇌부가 범죄 명령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내부자로서 증언했다.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 1906–1975

정치철학자

재판 당시 39세 — 방청하지 않음사상
배경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의 다른 쪽 끝에 있는 이름이다. 1961년 아이히만 재판을 취재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제시했다. 괴물이 아니라 생각하기를 그만둔 관료가 대량학살을 집행한다는 관찰인데, 켈리가 1946년에 검사 결과로 도달한 곳과 사실상 같은 지점이다.
헤르만 로르샤흐
헤르만 로르샤흐

Hermann Rorschach · 1884–1922

스위스 정신과 의사

1922년 사망 — 검사만 남았다검사
배경
1921년 잉크반점 검사를 발표하고 이듬해 37세로 죽었다. 그가 만든 열 장의 카드가 20여 년 뒤 뉘른베르크 감방에서 나치 지도부에게 제시된다. 켈리는 이 검사로 '나치의 정신'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