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독본

1910~40년대 · 쓰가루와 도쿄 · 人間失格

메이지가 만든 집,
지진 뒤에 선 도시,
법이 금한 사상

혼슈 북쪽 끝의 대지주 집안, 「고등학교」라 불린 엘리트 학교, 지진 뒤 다시 선 도쿄의 카페, 붙잡혀 가던 사상. 소설은 이것들을 설명 없이 당연한 배경으로 둔다. 이 페이지는 그 배경 — 역사, 제도, 낯선 문화 — 만 모았다. 줄거리·결말은 없다.

에곤 실레, 꽈리가 있는 자화상
에곤 실레, 「꽈리가 있는 자화상」(1912). 민음사판의 표지 그림이다.
1898–1947장남이 집을 통째로
물려받던 「이에」 제도
584km가나기에서 도쿄까지
직선거리
3년구제 고등학교 — 마치면
제국대학이 거의 보장
1만 5천1929년 도쿄의
카페 여급 수
1925치안유지법 —
같은 해 조선에도 시행
00

읽기 전에

이 소설을 따라가는 데 필요한 배경을 여섯 가지로 추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각 장에 있다.

  • 때는 1910~40년대, 곳은 혼슈 북쪽 끝 아오모리현과 수도 도쿄다.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 그 시절 일본 민법은 가족을 「이에」(家)로 묶고, 재산과 지위를 장남 한 사람에게 몰아주었다. 집과 땅을 쪼개지 않으려는 제도였다.
  • 그때의 「고등학교」는 지금의 고등학교가 아니다. 제국대학으로 가는 3년제 엘리트 과정이었다.
  • 1923년 지진 뒤 다시 선 도쿄에는 카페가 넘쳤다. 커피집이 아니라 여급이 곁에 앉아 술 시중을 드는 곳이었다.
  • 공산주의는 치안유지법으로 범죄였다. 그래도 학생들 사이에 퍼졌고, 1933년부터 붙잡힌 사람들이 줄줄이 사상을 버렸다(전향).
  • 소설은 패전 3년 뒤인 1948년에 나왔다. 그때 이 세계 — 이에, 지주, 구제 고교, 치안유지법 — 는 모두 없어졌거나 없어지는 중이었다.

알아 두면 다르게 읽히는 것 여섯 가지

1 · 집안
장남이 전부를 잇는 집

1898년 민법은 가족을 개인이 아니라 「이에」라는 단위로 보았다. 이에의 우두머리 호주가 가족의 결혼과 거처에 동의권을 쥐고, 그 자리와 재산은 원칙적으로 장남 한 사람이 통째로 물려받았다. 땅을 나눠 물려주면 몇 대 만에 집이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지주 집안이라도 장남이 아닌 아들에게 돌아갈 몫은 법으로 정해진 것이 없었다.

→ 01 혼슈 북쪽 끝의 지주 집안

2 · 학교
「고등학교」는 대학 예과였다

번역본의 「고등학교」는 열일곱에서 스무 살의 남학생이 다니던 구제 고등학교다. 정원이 제국대학 정원과 거의 같아서 들어가기만 하면 제국대학이 보장되었다. 그래서 입학하는 순간 사회가 미래의 엘리트로 대접했다. 지금으로 치면 명문대 교양 과정에 가깝다.

→ 02 「고등학교」가 가리키던 곳

3 · 도시
카페는 커피집이 아니었다

1920년대 말 도쿄의 「카페」는 여급이 손님 곁에 앉아 술 시중을 드는 곳이었다. 게이샤를 부르려면 소개와 격식과 큰돈이 필요했지만 카페는 싸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었다. 늘어나던 월급쟁이와 학생이 몰렸다. 여급은 가게에서 월급을 받지 않고 손님의 팁으로 살았다.

→ 03 지진 뒤의 도쿄 — 카페와 여급

4 · 사상
공산주의가 범죄이던 때

1925년 치안유지법은 천황제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결사를 처벌했다. 러시아 혁명 뒤 소련과 국교를 트고 남자 보통선거를 시작하던 해, 정부는 혁명 사상이 합법의 틈으로 들어올 것을 두려워했다. 공산당은 비합법 조직이라 모임은 숨어서 열렸다. 1933년 옥중의 지도자들이 사상을 버리자 수많은 사람이 뒤따랐다 — 전향이다.

→ 04 치안유지법과 「전향」

5 · 전후
1948년, 그 세계는 이미 없었다

패전 뒤 점령군의 개혁이 전쟁 전 일본의 기둥을 한꺼번에 뽑았다. 치안유지법이 폐지되고(1945), 농지개혁이 지주의 땅을 소작인에게 넘기고(1946~50), 새 헌법이 이에 제도를 없앴다(1947). 이 소설은 그 한가운데인 1948년에 나왔다. 첫 독자들은 막 사라진 세계의 이야기를 읽은 셈이다.

→ 05 1948년, 사라진 세계

6 · 말
일본어의 「나」는 여럿이다

일본어에는 1인칭이 여럿 있다 — 와타시(私), 보쿠(僕), 오레(俺), 지분(自分). 상대와 자리에 따라 골라 쓰고, 무엇을 골랐는지가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드러낸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대개 모두 「나」가 되어 이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 08 제목과 일본어의 「나」

한국 독자에게 — 같은 제국, 같은 시대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에 태어났고, 이듬해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이 페이지가 다루는 1910~40년대는 일제강점기와 정확히 겹친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제도 가운데 여럿이 조선에도 있었다.

학교. 조선에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졌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것이 그 예과(처음 2년, 1934년부터 3년)였고, 해방 때까지 조선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학생의 다수는 일본인이었다(1937년 약 70%). 그래서 많은 조선의 수재가 도쿄로 유학을 갔다. 1919년 2월 8일 도쿄의 조선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이 그 유학생 약 600명이었다.

지진.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자경단과 군·경찰이 조선인을 학살했다. 희생자 수는 일본 사법성 집계 233명부터 당시 조사로 수천 명까지 크게 갈린다(03장).

법. 치안유지법은 1925년 일본과 같은 때 조선에도 시행되었고, 첫 적용도 조선이 먼저였다. 조선에서는 독립운동까지 「국체 변혁」으로 보아 이 법으로 처벌했고, 형량도 훨씬 무거웠다(04장).

집. 일제는 이에 제도를 본뜬 호적 제도를 조선에 들여왔다(1923). 해방 뒤에도 호주제로 남아, 일본보다 60여 년 늦은 2008년 1월 1일에야 폐지되었다.

1945년 8월은 일본에는 패전, 한국에는 해방이다. 이 소설이 나온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선 해다.

이 페이지의 사용법

왼쪽 목차에서 한 장(章)씩 골라 본다 — 한 번에 한 주제만 뜬다. 처음부터 다 읽을 필요는 없고, 장마다 맨 위의 요약 상자만 읽어도 된다. 책을 읽다 걸리는 것이 생기면 그때 해당 장을 펴 보면 된다.

검색창에 낱말을 넣으면 페이지 전체에서 그 대목만 뽑아 준다. “이에”, “여급”, “전향” 같은 말이 걸렸을 때 쓰면 된다.

스포일러는 없다. 이 책은 소설이 작가의 삶을 많이 빌려 와서 작가의 약력이 곧 줄거리가 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07장 작가 약력과 09장 연표에서는 소설과 겹치는 사건을 일부러 뺐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쓰지 않았다.

01

혼슈 북쪽 끝의 지주 집안

어디인가. 그리고 그 시절 큰 지주 집안에서 자란다는 것이 무엇이었나.

  • 아오모리현은 일본 본섬 혼슈의 북쪽 끝이다. 그 서쪽이 쓰가루 지방이고, 작가가 태어난 가나기는 도쿄에서 직선으로 약 580km — 서울–도쿄의 절반쯤이다.
  • 메이지 정부가 세금을 현금으로 걷자 땅을 잃는 농민이 늘었고, 땅은 돈을 빌려주던 사람에게 모였다. 패전 전 일본 논밭의 46%가량이 남에게 빌려 짓는 소작지였다.
  • 1898년 민법은 가족을 「이에」로 묶고, 우두머리 호주의 자리와 재산을 원칙적으로 장남 한 사람에게 넘겼다. 집과 땅을 쪼개지 않고 대대로 잇게 하는 장치였다.
  • 그래서 장남이 아닌 아들에게는 법이 정해 준 몫이 없었다.
  • 이에 제도는 1947년, 지주제는 1946~50년 농지개혁으로 사라졌다(05장).
중 국러시아한반도일 본동 해황 해태 평 양서울 – 도쿄 약 1,160km서울도쿄아오모리현
먼저 큰 그림. 칠한 곳이 아오모리현 — 혼슈의 북쪽 끝이다. 잣대로 서울–도쿄 직선거리를 넣었다(약 1,160km). 이 시대 내내 한반도는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다. 아래 지도는 혼슈 북부를 확대한 것이다.
홋카이도혼 슈동 해태평양쓰가루 해협아오모리현가나기 – 도쿄 약 580km가나기히로사키센다이도쿄
혼슈 북부와 도쿄. 가나기는 쓰가루 평야 북쪽의 마을이고, 남쪽의 히로사키는 옛 쓰가루 번의 성 아래 도시다. 가나기에서 도쿄까지 직선으로 약 580km. 철도로는 아오모리–우에노가 1917년 급행으로 약 17시간, 1934년 개정 뒤 12~13시간 걸렸다.

쓰가루라는 곳

쓰가루(津軽)는 아오모리현 서쪽 지방의 이름이다. 에도 시대에는 쓰가루 번(藩)이 다스렸고, 그 성이 있던 곳이 히로사키다. 이와키산 아래로 너른 쓰가루 평야가 펼쳐지고, 겨울에는 눈이 많다. 쌀과 사과가 나는 농촌이다. 이곳 사투리는 도쿄 사람이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다르다.

도쿄와는 기차로 하룻밤 거리였다. 1891년 우에노–아오모리 철도가 이어졌고, 1917년 급행이 약 17시간, 1934년에는 12~13시간이 걸렸다. 지방의 부잣집 아들이 더 높은 학교에 가려면 이 길을 따라 히로사키나 센다이, 도쿄로 나와야 했다.

왜 땅이 몇몇 집에 모였나

에도 시대 농민은 거둔 쌀의 일부를 영주에게 바쳤다. 1873년 메이지 정부는 이것을 지조개정(地租改正)으로 바꾸었다. 땅값에 매긴 세금을 현금으로, 해마다 같은 액수 내게 한 것이다. 근대 국가를 세울 돈을 안정적으로 걷기 위해서였다.

흉년이 들거나 쌀값이 떨어져도 세금은 줄지 않았다. 돈을 빌려 세금을 내다 갚지 못한 농민은 땅을 넘기고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이 되었다. 땅은 돈을 빌려준 쪽, 곧 상인과 고리대금을 겸한 지주에게 모였다. 소작료는 쌀로 냈다. 이렇게 큰 지주가 직접 농사짓지 않고 소작료로 사는 체제가 굳어졌고, 패전 무렵 일본 경지의 46%가량이 소작지였다.

다자이 오사무의 집안 쓰시마 가문이 그런 집이었다. 증조부가 기름 행상으로 시작해 돈놀이로 재산을 불리고 큰 지주가 되었다. 다자이가 태어날 무렵에는 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였고, 마을에서는 「가나기의 영주님」이라 불렸다.

사양관
아오모리현 가나기의 다자이 생가. 1907년 그의 아버지가 지었다. 지금은 다자이 오사무 기념관 「사양관」이고, 2004년 국가 중요문화재가 되었다.

아버지는 현 의원과 중의원을 거쳐 귀족원의 다액납세 의원이 되었다. 귀족원은 황족·귀족이 앉는 상원인데, 재산가의 이해도 대변하게 하려고 각 부현의 큰 납세자들끼리 뽑은 사람을 함께 앉혔다. 1925년 개정 뒤로는 현마다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100명 가운데 1명꼴이었다. 즉 그 현에서 손꼽히는 부자라는 뜻이다.

그 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나무 2층 건물에 1층 11칸, 2층 8칸. 집 안에 집안이 운영하던 은행의 점포까지 있었다. 겉은 일본식이지만 안에는 서양식 응접실과 계단실이 있다. 메이지 시대 지방 부호의 집이 어땠는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사양관의 서양식 응접실
사양관 안의 서양식 응접실. 겉모습과 달리 안에는 서양이 들어와 있다.
사양관의 복도
안뜰을 따라 난 긴 복도. 방이 많아 식구와 일꾼이 한 지붕 아래 살았다.
「이에」 — 집이 사람보다 먼저다

1898년 7월 시행된 메이지 민법의 가족은 개인이 아니라 「이에」(家)라는 단위다. 이에에는 우두머리인 호주(戸主)가 있고, 가족이 결혼하거나 양자를 들이거나 사는 곳을 정하는 데 호주의 동의가 필요했다. 호주의 지위와 재산은 가독 상속(家督相続)으로 한 사람, 원칙적으로 장남에게 통째로 넘어간다. 지금처럼 자식들이 나눠 받는 상속이 아니다.

왜 이렇게 만들었나. 이에는 본래 무사 집안의 질서였다. 본가와 분가, 대를 잇는 장남, 쪼개지 않는 가산(家産). 메이지의 입법자들은 이 질서를 온 국민의 가족법으로 삼았다. 땅과 이름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면 집이 대를 거듭해도 줄지 않는다. 국가는 호주를 통해 호적과 가족을 한 단위로 다룰 수 있었다.

대가로 장남이 아닌 아들들은 법이 정해 준 몫 없이 자랐다. 집의 부와 이름 속에서 자라면서도 그것을 물려받지 않는 자리다. 이 제도는 1947년 5월, 49년 가까이 만에 사라졌다 — 새 헌법이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을 내세웠기 때문이다(05장).

이와키산에서 본 쓰가루 평야
이와키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쓰가루 평야. 쌀과 사과가 나는 너른 농토다.
귀족원 의장석
귀족원 본회의장. 황족·귀족과 함께, 각 현의 가장 큰 납세자들 가운데 뽑힌 사람도 이 자리에 앉았다.
02

「고등학교」가 가리키던 곳

번역본에 「고등학교」가 나오면 지금의 고등학교를 떠올리지 말 것. 전쟁 전의 구제(舊制) 고등학교다.

  • 전쟁 전의 고등학교(구제 고등학교)는 제국대학에 가기 위한 3년제 과정이었다. 학생은 열일곱에서 스무 살, 남자만 다녔다.
  • 고등학교 졸업생 수와 제국대학 정원이 거의 같았다. 그래서 들어가기만 하면 제국대학 진학이 사실상 보장되었고, 사회는 입학하는 순간 미래의 엘리트로 대접했다.
  • 처음에는 번호 붙은 여덟 곳(넘버 스쿨)뿐이었다. 1918년 고등교육 확장으로 지방마다 늘어 히로사키에도 1920년에 생겼다.
  • 기숙사 자치, 망토와 헤진 모자, 떼 지어 노래하며 거리를 휩쓰는 「스톰」이 이들의 문화였다.
  • 조선에서는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이 자리에 있었다. 1950년 학제 개혁으로 구제 고교는 모두 사라졌다.
전쟁 전 일본 남자의 엘리트 코스 — 「고등학교」라는 이름에 속지 말 것
단계나이햇수어떤 곳
심상소학교
尋常小学校
6~126년의무교육. 여기서 대부분이 학교를 마친다.
중학교
中学校
12~175년지금의 중·고등학교를 합친 과정. 들어가는 것 자체가 소수다. 성적이 좋으면 4학년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응시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高等学校
17~203년지금의 고등학교가 아니다. 제국대학에 가기 위한 예비 과정으로 지금의 대학 교양 과정에 가깝다. 남자만 들어갔다. 여기 들어가면 제국대학 진학이 사실상 보장되었다.
제국대학
帝国大学
20~233년도쿄·교토 등. 졸업생이 관료·학자·정치가가 된다.

왜 엘리트의 문이었나

먼저 중학교부터 소수였다. 전쟁 전 대부분의 아이는 6년의 심상소학교에서 학교를 마쳤다. 5년제 중학교에 가는 것만으로 이미 좁은 길이었고, 고등학교는 그 졸업생 가운데서도 일부만 들어갔다.

결정적인 것은 그다음이다. 제국대학의 입학 정원이 고등학교 졸업생 수와 거의 같았다. 학과를 가리지 않으면 고등학교를 마친 사람은 누구나 제국대학에 갈 수 있었다. 경쟁은 고등학교 입시에서 끝났다. 제국대학 졸업생은 관료·판사·학자·대기업 간부가 되었으니, 열일곱 살의 고등학교 합격이 곧 인생의 자리를 정했다.

그래서 이 학교의 학생은 나이로는 대학생, 사회적으로는 이미 엘리트였다. 지방의 부잣집에서 이런 학교에 아들을 보내는 것은 집안의 기대를 거는 일이었다.

왜 학교가 늘었나

메이지 시대에 처음 세운 고등학교들은 번호로 불렸다. 제1고등학교(도쿄, 「이치코」), 제2고등학교(센다이), 제3고등학교(교토)… 제8고등학교까지, 이들을 「넘버 스쿨」이라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 속에 산업이 커지고 진학하려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정부는 1917년 임시교육회의를 열고 1918년 고등학교령을 새로 내 고등교육을 크게 늘렸다. 그 뒤 몇 해 사이 번호 대신 지명을 단 고등학교가 잇따라 생겼다. 아오모리현의 히로사키 고등학교도 1920년에 세워졌다. 폐지 직전인 1948년에는 모두 39곳이었다.

제1고등학교
1923년 이전의 제1고등학교(도쿄). 넘버 스쿨의 맨 앞이다.
제2고등학교
제2고등학교(센다이).

기숙사와 교양

고등학교는 대학 입시를 위한 학원이 아니었다. 이미 대학 진학이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3년 동안 외국어와 철학, 문학을 넓게 읽는 교양(教養)을 쌓는 곳으로 여겨졌다. 학생들이 스스로 운영하는 자치 기숙사가 그 중심이었다. 일부러 낡은 모자와 망토, 나막신 차림으로 거칠게 구는 「반카라」(蛮カラ) 기풍도 여기서 나왔다 — 서양식 멋쟁이를 뜻하는 「하이카라」를 비튼 말이다.

기숙사 식당
1929년 무렵 히메지 고등학교 기숙사 식당. 1학년은 기숙사에 들어가는 학교가 많았다.
거리의 스톰
시즈오카 고등학교 학생들의 거리 「스톰」. 어깨를 걸고 원을 그리며 노래한다.
조선의 「고등학교」 — 경성제국대학 예과

같은 제도가 식민지에도 들어왔다. 1924년 서울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먼저 예과(豫科)가 문을 열었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대학 준비 과정으로, 처음 2년이었다가 1934년 3년이 되었다. 학부는 1926년에 열렸다.

해방 때까지 조선에 대학은 이곳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학생의 다수는 조선에 사는 일본인이었다 — 1937년 일본인 약 70%, 조선인 약 30%. 그래서 조선의 수재 상당수는 현해탄을 건너 도쿄의 학교로 갔다. 해방 뒤 서울대학교가 이 학교의 건물과 시설을 넘겨받았다.

1950년, 모두 사라지다

패전 뒤 점령 당국과 일본 정부는 미국식 6·3·3·4 학제로 학교 제도를 바꾸었다. 구제 고등학교는 새 대학에 흡수되어 1950년까지 모두 폐지되었다. 히로사키 고등학교는 히로사키 대학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일본에서 「고등학교」라고 하면 한국과 같은 3년제 학교를 가리킨다.

고등학교 시절의 다자이
히로사키 고등학교 시절의 다자이. 학생복의 금단추가 보인다.
03

지진 뒤의 도쿄 — 카페와 여급

지진으로 무너진 도시가 모던 도시로 다시 섰다. 그 밤거리의 풍경.

  •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이 도쿄를 무너뜨리고 태웠다. 그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났다.
  • 도쿄는 넓은 길과 콘크리트 건물의 모던 도시로 다시 지어졌다. 불탄 도심을 떠난 사람들로 서쪽 교외가 커지고, 신주쿠 같은 환승역 앞이 번화가가 되었다.
  • 이 시절의 「카페」는 커피집이 아니다. 여급이 손님 곁에 앉아 술 시중을 드는 곳이었다. 게이샤보다 훨씬 싸고 격식이 없어서 월급쟁이와 학생이 몰렸다.
  • 도쿄의 여급은 1925년 약 7,300명에서 1929년 1만 5천 명 넘게 늘었다. 대부분 가게에서 월급을 받지 못하고 손님의 팁으로 살았다.
  • 1929년부터 단속이 시작되었고, 1934년에는 학생의 카페 출입이 금지되었다.
지진 뒤의 니혼바시와 간다
지진 뒤 니혼바시와 간다. 불이 도시를 쓸고 지나갔다.
아사쿠사의 12층
아사쿠사의 12층 탑 료운카쿠. 1890년에 세운 일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일본 최초의 전동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지진으로 반쯤 무너져 그달 23일 육군이 폭파해 헐었다.
지진으로 불탄 도쿄 지역
간토 대지진으로 불탄 도쿄의 범위(붉은 부분).
지진과 조선인 학살

지진 직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불을 질렀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내무성 경보국은 각 부현에 조선인을 엄중히 단속하라는 전보를 보냈고, 9월 2일 계엄령이 내려졌다. 주민들이 만든 자경단과 군·경찰이 조선인을 붙잡아 죽였다. 중국인과, 사투리 때문에 조선인으로 몰린 일본인도 희생되었다.

희생자 수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일본 사법성은 233명, 내무성은 248명으로 집계했고, 요시노 사쿠조는 2,613명, 상하이의 『독립신문』은 6,661명으로 보았다. 2008년 일본 정부 중앙방재회의 보고서는 지진 사망자의 「1~수 퍼센트」가 학살 희생자라고 추정했다 — 수천 명 규모다. 정부는 9월 7일 긴급 칙령으로 보도를 묶어, 학살 기사는 그해 가을까지 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쇼와도리
지진 뒤 새로 뚫은 큰길 쇼와도리. 부흥은 도시의 모양을 바꾸었다.
1936년 긴자
1936년의 긴자. 전차 선로가 난 큰길 양쪽으로 서양식 건물이 늘어섰다.

카페는 어떻게 커피집이 아니게 되었나

1911년 긴자에 카페 프랭탕이 문을 열었다. 서양화가들이 파리의 카페를 본떠 문인과 화가가 어울리는 곳으로 만든 가게다. 그런데 남자 종업원(가르송)이 서빙하는 파리와 달리 여기서는 여급(女給, 조큐)이 손님을 맞았다. 처음의 여급은 기모노 위에 흰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나르는 사람이었다.

지진 이후 카페는 성격이 바뀌었다. 1924년 긴자에 문을 연 카페 타이거는 화장한 여급이 손님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이야기하는 서비스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기록은 「먹고 마시는 곳이던 카페가 갑자기 놀고 즐기는 곳이 되었다」고 적었다. 쇼와에 들어서자 오사카의 대형 카페들이 도쿄로 올라왔고, 여급은 지금의 호스티스에 가까워졌다.

왜 카페가 넘쳤나

손님이 생겼다. 1920년대 도시에는 회사와 관청에 다니는 월급쟁이(샐러리맨)가 크게 늘었다. 지진 뒤 이들은 서쪽 교외로 이사해 신주쿠 같은 환승역을 거쳐 출퇴근했다. 1930년 신주쿠에만 카페가 108곳, 그 일대 음식점의 3분의 1이 넘었다.

싸고 쉬웠다. 여자의 접대를 받으려면 전에는 요정(마치아이)에서 게이샤를 불러야 했다. 단골의 소개와 정해진 격식, 큰돈이 들었다. 카페는 소개도 격식도 필요 없었고 값도 쌌다. 서양식으로 꾸민 카페는 월급쟁이가 감당할 수 있는 값으로 「모던 생활」을 맛보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불황이 가장 깊던 해에도 카페는 늘었다. 전국의 카페·바는 1930년 2만 7,532곳에서 1934년 3만 7,065곳이 되었다. 여급은 1930년 전국에 약 6만 7천 명, 1936년 11만 명을 넘었다. 1930년의 여급 수가 이미 공인된 매춘부 수(약 5만 명)보다 많았다.

카페 타이거
긴자의 카페 타이거. 둥근 사진 속에 흰 앞치마와 기모노의 여급들이 보인다.
카페 구로네코
긴자의 카페 구로네코(검은 고양이). 조각과 가죽 소파로 꾸민 실내.
여급은 어떻게 먹고살았나

대부분의 여급은 가게에서 월급을 받지 못했다. 가게 주인은 「손님을 접대하고 팁을 받을 자리를 내줄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여급이 자기 식대와 요리사 몫, 손님이 쓴 성냥값까지 내야 하는 가게가 많았고, 1929년까지는 지각·결근 벌금도 걷었다. 수입은 손님이 주는 팁뿐이었다.

팁에 기대는 구조가 여급을 손님에게 더 바짝 붙게 만들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벌이는 많지 않았다. 평균 한 달 30~50엔으로 타이피스트나 전화 교환원과 비슷했고, 도쿄시 남자 사무원의 초봉 70~75엔에 크게 못 미쳤다.

학생과 카페

카페가 번성하자 단속도 따라왔다. 1929년 경시청이 카페·바 단속 요강을 정했고, 1933년에는 특수음식점 영업 단속 규칙을 만들었다. 1934년에는 미성년자와 학생의 카페 출입을 금지했다. 1938년 2월 15일에는 도쿄의 카페 등을 일제히 단속해 학생 약 2,000명을 붙잡았다.

1936년에는 학생 출입을 막는 부현이 15곳으로 늘었다. 학생이 카페에 드나드는 것은 이 시절 「불량」의 상징이었다.

모던 걸
1928년의 「모가」(모던 걸). 서양식 옷과 모자.
1930년대 신주쿠의 밤
1930년대 신주쿠의 밤거리. 네온과 간판이 늘어섰다.
쇼와 금융공황
1927년 쇼와 금융공황. 모던 도시의 화려함 아래로 불황이 이어졌고,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덮친다.
04

치안유지법과 「전향」

1920~30년대 일본에서 공산주의는 그 자체로 범죄였다. 그런데 학생들 사이에서는 유행이었다.

  • 1925년 치안유지법이 천황제(국체)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결사를 처벌했다. 소련과 국교를 트고 남자 보통선거를 시작하던 해, 혁명 사상이 들어올 것을 막으려는 법이었다.
  • 1928년 3월 공산당 관계자 약 1,600명이 한꺼번에 붙잡혔고, 그해 최고형이 사형이 되었다. 사상을 단속하는 특별고등경찰(특고)이 사람을 쫓았다.
  • 공산당은 비합법 조직이라 모임은 숨어서 열렸다. 당원이 아닌 공감자 「심퍼」가 돈과 방을 댔다.
  • 1933년 옥중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사상을 버린다고 선언했다 — 전향. 석 달 만에 미결수의 30%가 뒤따랐고, 운동은 무너졌다.
  • 이 법은 조선에도 시행되어 독립운동까지 처벌했다. 1945년 10월 폐지되었다.

왜 그런 법이 생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1922년 일본공산당이 비밀리에 생겼다. 1925년 일본은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같은 해 25세 이상 남자 모두에게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법도 만들었다. 정부는 문이 열리는 만큼 혁명 사상이 합법적인 길로 퍼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두 법을 함께 만들었다. 치안유지법은 국체(천황제)를 바꾸거나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결사를 만들거나 들어가는 것을 처벌했다. 선거권이라는 사탕과 이 법이라는 채찍을 함께 내밀었다고 해서 「사탕과 채찍」이라 불렸다.

1928년 3월 15일, 공산당 관계자 약 1,600명이 전국에서 한꺼번에 붙잡혔다(3·15 사건). 그해 6월 법이 긴급 칙령으로 고쳐져, 결사를 이끈 사람의 최고형이 사형이 되었다. 또 결사의 목적을 돕는 행위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당원이 아니어도 돈을 대거나 방을 빌려준 사람까지 걸리게 된 것이다.

그래도 학생들 사이에서는

1920년대 말의 고등학생과 대학생 사이에는 마르크스주의가 크게 유행했다. 공황과 소작 쟁의가 이어지던 때, 가난과 불황을 한 번에 설명해 주는 이론으로 읽혔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문단을 휩쓸었고, 많은 고등학교에 사회과학 연구회가 있었다. 숨어서 모이고 전단을 돌리는 비합법의 세계가 학생들 곁에 있었다.

경시청 검열과
경시청의 검열 담당 부서. 출판물과 사상을 들여다보는 일을 했다.
전향 — 왜 사상을 버렸나

1933년 6월, 옥중의 공산당 위원장 사노 마나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전향 성명을 냈다. 소련(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르는 운동은 잘못이었고, 앞으로는 천황을 존중하는 일본의 운동이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해 9월까지 미결수 1,370명 가운데 30%, 기결수 372명 가운데 36%가 전향했다.

사람들이 전향한 까닭은 하나가 아니었다. 경찰과 사상 검사의 고문, 그리고 「고향의 부모님이 울고 계신다」는 식의 설득. 천황을 부정하라는 코민테른의 방침에 대한 반감과 민족주의. 그리고 돌아갈 길 — 전향하면 풀려나 학교에 다시 들어가거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국가는 처벌보다 전향을 받아 내는 쪽을 택했고, 1941년부터는 전향하지 않은 사람을 형기가 끝난 뒤에도 가두었다(예방 구금).

이 시대의 일본 소설에 「운동」, 「동지」, 「심퍼」, 「전향」 같은 말이 설명 없이 나온다면 이 배경을 떠올리면 된다.

조선에서의 치안유지법

치안유지법은 1925년 칙령으로 일본 본토와 같은 때 조선·대만에도 시행되었다. 첫 적용도 조선이 먼저였다 —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다(본토의 첫 적용은 1926년 1월).

조선에서는 공산주의만이 아니라 독립운동도 이 법으로 다스렸다. 1930년 조선의 최고 법원은 독립을 꾀하는 것은 제국 영토의 일부를 빼앗아 통치권을 줄이는 것이니 「국체의 변혁」을 꾀하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형량도 훨씬 무거웠다. 역사학자 미즈노 나오키의 집계로 1928~38년 이 법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본토 1명, 조선 39명이었다.

05

1948년, 사라진 세계

이 소설이 쓰인 것은 패전 3년 뒤다. 그 사이 앞 장들의 세계가 무엇 때문에, 어떻게 사라졌나.

  • 1945년 패전. 도쿄는 공습으로 불타 있었고, 배급이 무너져 역 앞마다 암시장이 섰다.
  • 점령군(GHQ)은 일본을 군국주의로 몰고 간 뿌리를 뽑겠다며 전쟁 전의 기둥을 차례로 허물었다.
  • 1945년 치안유지법 폐지와 정치범 석방, 1946~50년 농지개혁으로 소작지가 46%에서 10%로, 1947년 이에 제도 폐지, 1950년 구제 고교 폐지.
  • 1947년 몰락한 귀족 집안을 그린 다자이의 『사양』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사양족」이 유행어가 되었다.
  • 그러니 1948년의 첫 독자들에게 이 소설의 배경은 막 사라진 세계였다.
신바시의 암시장
신바시 역 앞의 암시장. 배급이 모자라 모든 것이 여기서 거래되었다.
카스토리를 마시는 사람들
싸구려 밀주 「카스토리」를 마시는 사람들. 이 이름을 딴 조잡한 대중 잡지도 쏟아졌다.

왜 암시장이었나

전쟁 중의 배급 제도는 패전과 함께 무너졌다. 그런데 공정 가격을 정한 통제 경제는 그대로 남았다. 정해진 값으로는 살 물건이 없었고, 전쟁터와 식민지에서 돌아온 사람들로 도시 인구는 불어났다. 1945년 우에노역 일대에서는 하루 평균 두세 명이 굶어 죽었다.

그래서 1945년 8월 20일 신주쿠를 시작으로 신바시·우에노·이케부쿠로 역 앞에 불법 시장이 섰다. 통제가 하나씩 풀리면서 암시장도 줄었고, 1951년 말 도쿄의 노점이 철거되었다.

무엇이 사라졌고, 왜

점령군 총사령부(GHQ)는 지주제와 가부장제, 사상 통제가 일본을 전쟁으로 이끈 토양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개혁의 순서가 곧 앞 장들의 순서를 거꾸로 지우는 일이 되었다.

사상. 1945년 10월 GHQ의 인권 지령으로 치안유지법과 특고가 폐지되었다. 전향하지 않고 갇혀 있던 공산당 간부들이 풀려났고, 공산당은 합법 정당이 되었다. 비합법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합법이 되었다.

땅. GHQ는 농촌의 가난과 지주제가 군국주의를 키웠다고 보았다. 1946년 10월 법으로 정부가 마을에 살지 않는 지주의 소작지는 모두, 사는 지주의 것도 1정보(약 1ha, 홋카이도는 4정보)를 넘는 만큼 사들여 소작인에게 팔았다. 1947~50년 사이 약 193만 정보가 넘어갔다. 값은 정해 둔 것이었는데 인플레이션이 심해 옛 지주에게는 사실상 헐값이었다. 경지 가운데 소작지는 약 46%에서 약 10%로 줄었다. 대지주 집안의 시대가 끝났다.

집. 1947년 5월 3일 시행된 새 헌법 24조는 혼인과 가족을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 위에 세우라고 했다. 이에 맞지 않는 이에 제도는 그 전날로 효력을 잃었고, 1948년 1월 새 민법이 자녀의 균등 상속을 정했다.

학교. 6·3·3·4 학제로 바뀌면서 구제 고교는 1950년까지 모두 새 대학에 흡수되었다(02장).

「사양족」 — 몰락의 유행어

1947년 12월 다자이의 장편 『사양』(斜陽, 기우는 해)이 단행본으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전쟁과 개혁으로 몰락한 상류층을 가리키는 「사양족」(斜陽族)이 유행어가 되었다. 다자이의 생가 같은 대지주 집안이 실제로 기울던 때였다.

『인간 실격』은 그 이듬해 봄에 쓰였고, 1948년 6월부터 잡지에 실렸다. 첫 독자들은 대지주의 집, 구제 고등학교, 카페와 비합법 운동이 있던 전쟁 전 20년을 이미 사라진 세계로 읽었다.

06

사소설과 무뢰파

일본 근대 소설의 큰 전통과, 패전 직후 다자이가 묶여 불린 이름.

  • 사소설(私小説)은 작가가 자기 삶을 거의 그대로 재료로 삼는 일본 근대 소설의 큰 흐름이다. 1907년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이 시작으로 꼽힌다.
  • 유럽 자연주의의 「꾸미지 않고 진실을 쓴다」는 원칙이 일본에서는 작가 자신의 삶과 속마음을 털어놓는 쪽으로 흘렀다.
  • 그래서 일본 독자는 소설 속 「나」를 곧 작가로 읽는 데 익숙했다. 사소설도 엄연히 소설이지만 그 경계가 자주 지워졌다.
  • 패전 직후 기성 문단의 도덕과 권위에 등을 돌린 다자이·사카구치 안고·오다 사쿠노스케 등을 무뢰파라 불렀다. 정식 모임은 없었다.

1907년 다야마 가타이가 제자에게 품은 마음을 거의 그대로 드러낸 「이불」을 발표했다. 이것이 사소설의 시작으로 꼽힌다. 당시 일본 문단을 휩쓸던 것은 유럽에서 들어온 자연주의였다. 사회와 인간을 꾸밈없이 그린다는 이 원칙이 일본에서는 작가가 겪은 일과 속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뒤 일본 소설의 큰 줄기는 그쪽으로 흘렀다. 작가들은 좁은 문단 안에서 서로의 삶을 잘 알았고, 잡지는 작가의 사생활을 다뤘다. 독자들은 소설의 「나」를 곧 작가로 읽었고, 작가의 삶이 곧 작품의 무게가 되었다. 사소설의 「나」가 반드시 작가는 아니고 작품은 어디까지나 허구이지만, 읽는 쪽에서는 그 경계가 자주 지워졌다.

비판도 있었다. 1935년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는 「사소설론」에서 서양의 「나」가 사회 속에서 다듬어진 데 비해 일본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고 쓰고, 「사소설은 죽었다」고 했다.

무뢰파 — 「기댈 데 없는」 작가들

패전 직후, 기성 문단의 도덕과 권위에 등을 돌린 작가들이 있었다. 사카구치 안고, 다자이 오사무, 오다 사쿠노스케가 중심이고, 이시카와 준, 단 가즈오 등이 함께 꼽힌다. 사카구치가 1947년 1월 「희작자 문학론」에서 에도 시대 대중 작가(게사쿠샤, 戯作者)의 태도를 되살리자고 한 데서 「신게사쿠파」(新戯作派)라는 이름이 나왔고, 지금은 무뢰파(無頼派)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인다. 무뢰(無頼)는 「기댈 데가 없음」, 곧 건달·무법자라는 뜻이다.

뚜렷한 모임이나 동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평가들이 비슷한 태도의 작가들을 묶어 부른 이름이다.

1946년 바의 다자이
1946년, 바의 높은 의자에 걸터앉은 다자이. 무뢰파의 얼굴로 널리 알려진 사진이다.
아쿠타가와와 문인들
기쿠치 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다이쇼 시대의 문인들. 다자이가 중학생 때부터 우러러본 세대다.
07

작가 다자이 오사무

이 장의 약력에는 일부러 비워 둔 자리가 있다. 먼저 그 이유부터.

  • 본명 쓰시마 슈지. 1909년 아오모리현 가나기의 대지주 집안에서 열한 남매 가운데 열째,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 히로사키 고등학교를 거쳐 1930년 도쿄 제국대학 불문과에 들어갔고,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의 제자가 되었다. 대학은 졸업하지 못했다.
  • 1933년부터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으로 썼다. 1947년 『사양』으로 전후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되었다.
  • 1948년 봄 『인간 실격』을 쓰고, 그해 6월 서른여덟 살로 죽었다.
  • 그의 삶은 소설과 겹치는 곳이 많아, 이 장에는 겹치지 않는 사실만 적었다.
왜 약력을 비웠나

다자이의 삶은 이 소설과 겹치는 곳이 아주 많다. 그래서 그의 약력을 빠짐없이 적으면 그것이 곧 소설의 줄거리 요약이 된다. 이 장에는 소설과 겹치지 않는 사실 — 집안, 학교, 문학의 이력, 대표작, 죽음 — 만 적었다.

다 읽고 나서 그의 전기를 찾아 읽으면, 소설이 무엇을 빌려 오고 무엇을 바꾸었는지 비교해 볼 수 있다. 그 비교는 다 읽은 뒤에 하기를 권한다.

1928년의 다자이
1928년, 고등학생 무렵의 쓰시마 슈지.
망토를 입은 다자이
망토를 걸친 다자이. 키가 175cm로 당시 일본 남자로서는 컸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 1909년 6월 19일 아오모리현 가나기의 대지주 집안에서 열한 남매 가운데 열째,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01장). 어머니가 몸이 약해 유모와 이모, 그리고 열한 살 위의 하녀 손에서 자랐다.

아오모리 중학교에서는 1학년 2학기부터 졸업까지 반장을 했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시가 나오야를 애독했다. 친구들과 동인지를 내며 소설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1927년 히로사키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02장), 그해 여름 우상이던 아쿠타가와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1930년 도쿄 제국대학 불문과에 들어갔다.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다. 불문과는 인기가 없어 시험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마침 그해부터 프랑스어 시험이 생겼고, 그는 시험장에서 손을 들어 사정을 말하고 입학을 허락받았다. 강의는 따라가지 못했고, 대신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대학은 끝내 졸업하지 못했다.

이부세 마스지
이부세 마스지(1898–1993). 다자이가 평생 스승으로 모신 소설가. 다자이는 중학생 때 그의 「산초어」를 읽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흥분했다고 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 다자이의 우상.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 다자이는 끝내 오르지 못했다.
작가로서

1933년 처음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으로 단편 「열차」를 발표했다. 1935년 제1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지만 떨어졌고, 심사평을 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잡지로 공개 반박을 했다. 이듬해 첫 작품집 『만년』을 냈다.

1939년 결혼해 도쿄 교외 미타카에 자리 잡은 뒤로 안정된 시기가 왔다. 「여학생」, 「부악백경」, 『달려라 메로스』(1940) 같은 밝은 작품도 이때 나왔다. 전쟁 중에도 『쓰가루』, 『옛날이야기』를 쓰며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패전 뒤 1947년 『사양』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전후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되었다(05장). 1948년 3월 아타미에서 『인간 실격』을 쓰기 시작해 5월 사이타마현 오미야에서 마쳤다. 그해 6월 13일 미타카의 다마강 상수에 몸을 던졌다. 서른여덟 살이었다. 6월 19일, 그의 생일에 발견되었다. 신문 연재 중이던 「굿바이」는 미완으로 남았다.

히로시게의 다마강 상수
우타가와 히로시게, 『명소 에도 백경』 가운데 다마강 상수 가의 벚꽃. 17세기에 만든 이 수로는 에도에 물을 대던 물길이었고, 다자이가 살던 미타카를 지나간다.
다마강 상수
지금의 다마강 상수, 미타카. 당시에는 물살이 빠른 수로였다.
미타카의 다자이 오사무 문학 살롱
미타카의 다자이 오사무 문학 살롱. 해마다 6월 19일에는 그의 무덤이 있는 젠린지에서 「앵두기」가 열린다.
턱을 괸 다자이
턱을 괸 다자이. 그의 얼굴로 가장 많이 쓰이는 사진이다.
08

제목과 일본어의 「나」

번역으로는 보이지 않는 원어의 결. 제목의 두 낱말, 일본어의 1인칭, 그리고 이 책이 어떤 꼴로 나왔나.

  • 人間(닌겐)은 원래 불교에서 「사람이 사는 세상」을 가리키던 말이다. 에도 시대 무렵부터 그 세상에 사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 失格(싯카쿠)은 경기나 시험에서 기준에 못 미쳐 자격을 잃는다는 판정의 말이다. 영어판 제목은 No Longer Human.
  • 책은 머리말(はしがき)·세 개의 수기·후기(あとがき)로 되어 있다. 머리말과 후기의 1인칭은 私(와타시), 수기의 1인칭은 自分(지분)이다.
  • 일본어는 상대와 자리에 따라 1인칭을 골라 쓴다. 한국어판에서는 대개 둘 다 「나」가 된다.
  • 1948년 잡지 『전망』에 세 번 나뉘어 실렸다. 1998년 공개된 초고에는 1인칭을 私에서 自分으로 고친 흔적이 있다.

제목의 두 낱말

にんげん
人間

지금은 그냥 「사람」이다. 그런데 원래는 산스크리트 말을 옮긴 불교 용어로, 육도(六道) 가운데 사람이 사는 세계, 곧 세상을 가리켰다. 「사람 인」에 「사이 간」 — 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자리다. 에도 시대 무렵부터 그 세상에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しっかく
失格

자격을 잃음. 달리기에서 부정 출발로 실격, 시험에서 서류 미비로 실격. 누군가 정해 둔 기준이 있고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판정이다. 원제를 글자대로 풀면 「인간으로서 실격」, 「인간 자격 박탈」쯤이 된다.

제목이 먼저 있었다

1940년 1월, 다자이는 짧은 글 「속천사」(俗天使)에 이렇게 썼다 — “그 시절의 일은 대여섯 해 지나 좀 더 차분해지면 천천히 써 볼 생각이다.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으로 할 생각이다.” 제목이 소설보다 8년 먼저 있었다.

영어로는 No Longer Human(더 이상 인간이 아닌)으로 옮겨졌다. 한국어판은 거의 모두 한자를 그대로 살려 『인간 실격』이다.

일본어의 「나」들

일본어는 말하는 사람이 상대와의 관계, 자리의 격식, 자기를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에 따라 1인칭을 골라 쓴다. 한국어의 「나」와 「저」보다 갈래가 훨씬 많다.

와타시
私

가장 기본적이고 격식 있는 1인칭. 머리말과 후기의 1인칭이 이것이다.

보쿠
僕

남자가 친근하게 쓰는 1인칭. 소년 같은 느낌이 있다.

오레
俺

남자가 거칠게, 편하게 쓰는 1인칭.

지분
自分

원래 「자기 자신」이라는 뜻. 1인칭으로 쓰면 자기를 한 걸음 떨어진 대상처럼 가리키는 딱딱한 느낌이 난다. 군대나 운동부에서 쓰는 말투이기도 하다. 세 수기의 1인칭이 이것이다.

はしがき
머리말

책 맨 앞의 짧은 글. 1인칭은 私(와타시)다.

手記
첫째·둘째·셋째 수기

책의 본문. 1인칭은 自分(지분)이다. 수기(手記)는 겪은 일을 나중에 돌아보며 제 손으로 적은 글이다.

あとがき
후기

책 맨 뒤의 짧은 글. 1인칭은 다시 私다.

自分 — 작가가 고쳐 쓴 낱말

1998년 5월 B5 원고지 157장의 초고가 공개되어 그해 『신초』 7월호에 실렸다. 낱말 하나하나를 몇 번씩 고친 흔적이 있었다. 수기의 1인칭은 처음에 私였다가 쓰는 도중에 自分으로 고쳐졌고, 완성본은 自分으로 통일되었다.

自分은 원래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다. 1인칭으로 쓰면 자기를 한 걸음 떨어진 대상처럼 가리키는 딱딱한 느낌이 나고, 군대나 운동부에서 쓰는 말투이기도 하다.

한국어판이 이 차이를 어떻게 옮겼는지는 판본마다 다를 수 있다. 이 페이지는 실물을 대조하지 못했다.

어떻게 나왔나

잡지 『전망』(展望, 지쿠마 쇼보가 1946년 1월 창간한 종합 잡지) 1948년 6·7·8월호에 세 번 나뉘어 실렸다. 연재 마지막 회가 나오기 전에 작가가 죽었다. 단행본은 그해 7월 25일 지쿠마 쇼보에서 미완의 「굿바이」와 함께 나왔고 값은 130엔이었다. 이 때문에 이 소설은 오래 작가의 유서처럼 읽혔는데, 1998년의 초고가 공들여 다듬은 원고였음을 보여 주었다.

신초 문고판 한 판본만 누적 670만 부를 넘겼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 꼽힌다.

표지의 그림

민음사판 표지는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1890–1918)의 「꽈리가 있는 자화상」이다. 비스듬히 돌아본 얼굴, 마른 가지 끝의 붉은 꽈리. 이 소설과 직접 관계는 없다. 이 페이지의 청록과 주홍도 그 표지에서 뽑았다.

09

연표

일본과 조선의 1890~1950년대, 그리고 작가의 삶. 소설과 겹치는 작가의 사건은 넣지 않았다 — 넣으면 연표가 곧 줄거리가 된다.

1873

지조개정

메이지 정부가 세금을 수확의 일부가 아니라 땅값에 매긴 현금으로 걷기 시작했다. 흉년에도 줄지 않는 세금에 땅을 잃는 농민이 늘었고, 땅은 돈을 빌려주던 큰 지주에게 모였다.

1891. 9

우에노–아오모리 철도

도쿄 우에노에서 혼슈 북쪽 끝 아오모리까지 철도가 이어졌다. 1917년 급행으로 약 17시간 걸렸다.

1898

민법의 「이에」 제도

메이지 민법이 가족을 「이에」(家)라는 단위로 묶었다. 이에의 우두머리 호주가 가족을 다스리고, 재산과 지위는 원칙적으로 장남 한 사람이 통째로 물려받는다. 이 제도는 1947년 5월까지 49년 가까이 살아 있었다.

1907

쓰가루의 큰 집

아오모리현 가나기에서 대지주 쓰시마 겐에몬이 집을 지었다. 1층 11칸, 2층 8칸, 집 안에 은행 점포까지 둔 저택이다. 지금은 다자이 오사무 기념관 「사양관」이다.

쓰가루의 큰 집
사양관. 다자이의 생가다.

1909. 6. 19

쓰시마 슈지가 태어나다

가나기의 쓰시마 집안에서 열한 남매 가운데 열째,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의 필명이 다자이 오사무다. 아버지는 현 의원을 거쳐 중의원 의원, 귀족원 의원을 지낸 지역의 명사였다.

1910. 8

한국 병합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이 연표의 나머지 35년은 일제강점기와 겹친다.

1911

긴자에 「카페」가 생기다

파리의 카페를 본떠 문인과 화가가 모이는 곳으로 문을 연 카페 프랭탕. 파리와 달리 여급(女給)이 손님을 맞았다. 같은 해 사상 단속을 맡는 특별고등경찰이 경시청에 생겼다.

1919. 2. 8

도쿄의 2·8 독립선언

도쿄의 조선 YMCA 회관에서 조선인 유학생 약 600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3주 뒤 조선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1920

히로사키 고등학교

1918년 고등학교령으로 고등교육을 늘리면서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에도 구제 고등학교가 세워졌다.

1923. 9. 1

간토 대지진

도쿄와 요코하마가 무너지고 불탔다. 아사쿠사의 12층 탑 료운카쿠가 반쯤 무너졌다. 도쿄는 이 폐허 위에 넓은 길과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모던 도시로 다시 지어진다. 지진 직후 유언비어 속에서 자경단과 군·경찰이 조선인을 학살했다.

간토 대지진
지진으로 반쯤 무너진 료운카쿠.

1924

경성제국대학 예과

서울에 조선의 유일한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고, 먼저 예과가 문을 열었다. 일본의 구제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과정이다. 같은 해 긴자에 카페 타이거가 문을 열었다.

1925

치안유지법

국체(천황제)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처벌하는 법. 남자 보통선거법과 거의 동시에 만들어져 「사탕과 채찍」이라 불렸다. 같은 때 조선·대만에도 시행되었고, 11월 조선공산당 사건이 첫 적용이었다.

1927. 3

쇼와 금융공황

은행에 예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리고 은행들이 문을 닫았다. 불황은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이어진다.

쇼와 금융공황
쇼와 금융공황 때 은행 앞에 몰린 사람들.

1927. 7. 24

아쿠타가와의 자살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를 애독하던 열여덟 살 고교생 쓰시마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쿠타가와의 자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1928. 3. 15

3·15 사건

일본공산당 관계자 등 약 1,600명이 한꺼번에 붙잡혔다. 그해 6월 치안유지법이 고쳐져 최고형이 사형이 되었다.

1930

도쿄 제국대학 불문과

스무 살의 쓰시마가 프랑스어를 모르는 채 불문과에 들어갔다. 그해 불문과에도 처음으로 프랑스어 시험이 생겼는데, 그는 시험장에서 손을 들어 사정을 이야기하고 입학을 허락받았다.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의 제자가 된다.

1933

필명 「다자이 오사무」

단편 「열차」를 이 이름으로 발표했다. 본명 쓰시마를 쓰가루 사투리로 말하면 「치시마」처럼 들리는데, 다자이는 사투리로도 「다자이」로 들린다 — 스승 이부세가 기억하는 이유다. 같은 해 공산당 지도자 사노 마나부 등이 옥중에서 전향을 선언했다.

1935

제1회 아쿠타가와상

다자이의 「역행」이 후보에 올랐다가 떨어졌다. 심사위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평에 다자이는 잡지에 공개 반박문을 썼다.

1936. 6

첫 작품집 『만년』

첫 책의 제목이 「만년」(晩年)이다.

1940

『달려라 메로스』

안정된 시기의 대표작. 같은 해 1월 발표한 글에서 다자이는 “그 시절의 일은 대여섯 해 지나 좀 더 차분해지면 천천히 써 볼 생각이다.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으로 할 생각이다”라고 적었다.

1945. 8

패전

도쿄 대공습을 피해 처가가 있는 고후로, 다시 쓰가루의 생가로 피란해 있던 중에 전쟁이 끝났다.

1945. 10

치안유지법 폐지

점령군의 인권 지령으로 치안유지법과 특고가 폐지되고 정치범이 풀려났다. 공산당이 합법 정당이 되었다.

1946. 1

잡지 『전망』 창간

지쿠마 쇼보의 종합 잡지. 2년 뒤 『인간 실격』이 여기에 실린다.

1946. 10

농지개혁

정부가 지주의 소작지를 사들여 소작인에게 파는 법이 만들어졌다. 1950년까지 소작지가 경지의 약 46%에서 약 10%로 줄었다.

1947. 5. 3

새 헌법, 이에 제도의 끝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을 내세운 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에 제도가 효력을 잃었다. 1948년 1월 새 민법이 자녀의 균등 상속을 정했다.

1947. 12

『사양』

몰락한 귀족 집안을 그린 장편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사양족」(斜陽族)이 유행어가 되었다. 다자이는 전후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된다.

1948. 3 – 5

『인간 실격』을 쓰다

3월 아타미에서 쓰기 시작해 5월 사이타마현 오미야에서 마쳤다.

1948. 6. 13

다자이의 죽음

도쿄 미타카의 다마강 상수에 몸을 던졌다. 서른여덟 살. 6월 19일, 그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에 발견되었다. 연재 마지막 회가 실린 잡지가 나오기 직전이었다.

다자이의 죽음
지금의 다마강 상수. 미타카.

1948. 7. 25

단행본 『인간 실격』

작가가 죽은 다음 달 지쿠마 쇼보에서 미완의 유작 「굿바이」와 함께 나왔다. 값은 130엔이었다.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인간 실격』이 나온 그해 여름, 서울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섰다.

1950

구제 고등학교의 폐지

6·3·3·4 학제로 바뀌면서 구제 고등학교가 모두 새 대학에 흡수되었다. 히로사키 고등학교는 히로사키 대학이 되었다.

1998

초고 157장

B5 원고지 157장의 초고가 공개되었다. 낱말 하나하나를 몇 번씩 고친 흔적이 있었고, 수기의 1인칭을 私에서 自分으로 바꾼 것도 여기서 드러났다. 그해 말 다자이 작품의 일본 내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났다.

10

용어 사전

읽다 걸리는 낱말들. 위쪽 검색창에 넣어도 여기로 잡힌다.

인간人間 · にんげん말

지금은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원래 불교에서 온 말로 「사람이 사는 세상」(인간계)을 가리켰다. 에도 시대 무렵부터 그 세상에 사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08장.

실격失格 · しっかく말

자격을 잃음. 경기에서 반칙으로 탈락하거나 시험에서 자격 미달로 떨어질 때 쓰는 말이다. 누군가가 기준을 들고 판정하는 말이다.

수기手記 · しゅき형식

자기가 겪은 일을 제 손으로 적은 글. 일기와 달리 나중에 돌아보며 정리해 쓴다.

머리말 · 후기はしがき · あとがき형식

책의 앞과 뒤에 붙는 짧은 글. 이 책에서는 이 두 글의 1인칭이 私(와타시)이고, 세 수기의 1인칭은 自分(지분)이다.

지분自分 · じぶん말

「자기 자신」. 1인칭으로 쓰면 자기를 대상처럼 멀찍이 가리키는 딱딱한 느낌이 난다. 세 수기의 1인칭이다.

도케道化 · どうけ말

익살, 광대짓. 남을 웃기려고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구는 것, 또는 그런 사람. 번역본에서는 「익살」, 「광대짓」, 「어릿광대」로 옮겨진다. 서양의 광대(클라운·피에로·궁정 광대)와 일본의 익살꾼(가부키의 익살 역, 연회의 호칸)을 두루 가리킨다. 광대는 「도케시」(道化師)다. 다자이는 1935년에 「도케의 꽃」(道化の華)이라는 단편을 썼다.

호칸幇間 · ほうかん말

「다이코모치」(太鼓持ち)라고도 한다. 요정의 연회 자리에서 손님의 흥을 돋우고 비위를 맞추는 남자 익살꾼. 게이샤와 함께 불려 나왔다. 지금도 「다이코모치」는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로 쓰인다.

사소설私小説 · ししょうせつ문학

작가가 자기 삶을 거의 그대로 소재로 삼아 쓰는 일본 근대 소설의 한 흐름. 1907년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이 시작으로 꼽힌다.

무뢰파無頼派 · ぶらいは문학

패전 직후 기존 문단의 도덕과 권위를 거부한 작가들을 묶어 부른 말. 다자이,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이시카와 준 등. 뚜렷한 모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게사쿠파」라고도 한다.

쓰가루津軽땅

아오모리현 서쪽, 혼슈 북쪽 끝의 지방. 눈이 많고 사과로 유명하다. 이 지방의 사투리는 도쿄 사람이 알아듣기 어렵다.

이에家 · いえ제도

1898년부터 1947년까지 민법이 정한 가족 단위. 호주가 가족을 다스리고, 장남 한 사람이 재산과 지위를 물려받는다.

호주戸主 · こしゅ제도

이에의 우두머리. 가족의 결혼과 거처에 동의할 권한이 있었다.

가독 상속家督相続제도

호주의 지위와 재산을 한 사람(원칙적으로 장남)이 통째로 물려받는 것. 둘째 이하의 아들은 받을 몫이 없거나 적었다.

분가分家제도

이에에서 갈라져 나와 새 이에를 세우는 것. 본가의 호적에서 빠진다.

지조개정地租改正제도

1873년 메이지 정부의 세제 개혁. 수확의 일부를 바치던 연공을 땅값에 매긴 현금 세금으로 바꿨다. 흉년에도 세금이 줄지 않아 땅을 잃는 농민이 늘었다.

소작小作 · こさく사회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고 그 대가(소작료)를 지주에게 내는 것. 전쟁 전에는 소작료를 쌀로 냈다. 패전 무렵 일본 경지의 46%가량이 소작지였다.

지주地主사회

땅을 가지고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소작료를 받는 사람. 전쟁 전 일본 농촌의 권력은 큰 지주에게 있었다. 전후 농지개혁으로 무너진다.

다액납세 의원多額納税者議員제도

각 부현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들끼리 뽑아 귀족원에 보내던 의원. 즉 그 현에서 손꼽히는 부자라는 뜻이다.

구제 고등학교旧制高等学校학교

전쟁 전의 고등학교. 제국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3년제 예비 과정으로, 지금의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 교양 과정에 가깝다. 남자만 다녔고, 들어가면 엘리트로 대접받았다.

넘버 스쿨ナンバースクール학교

제1고등학교(도쿄)부터 제8고등학교까지, 번호가 붙은 오래된 관립 고등학교들. 줄여서 「이치코」(一高)처럼 부른다.

예과予科 · 豫科학교

대학에 딸린 준비 과정. 1924년 세운 경성제국대학의 예과가 조선에서 일본의 구제 고등학교 자리를 맡았다(처음 2년, 1934년부터 3년).

반카라蛮カラ · ばんカラ학교

일부러 낡은 옷차림과 거친 몸가짐을 내세우던 구제 고교생의 기풍. 서양식 멋쟁이를 뜻하는 「하이카라」(high collar)를 비튼 말이다.

하숙下宿생활

남의 집 방을 빌려 먹고 자는 것. 고향을 떠나 공부하는 학생들이 흔히 했다.

스톰ストーム학교

구제 고등학교 학생들이 무리 지어 노래하고 소리치며 기숙사나 거리를 휩쓸던 풍습.

카페カフェー도시

다이쇼·쇼와 초기 일본의 카페는 커피집이 아니라 여급이 손님 곁에 앉아 술 시중을 드는 곳에 가까웠다. 1911년 긴자의 카페 프랭탕이 시작이다.

여급女給 · じょきゅう도시

카페에서 일하던 여성. 월급보다 손님이 주는 팁으로 살았다. 모던 도시의 새 직업으로 소설과 영화에 자주 나왔다.

모가 · 모보モダンガール · モダンボーイ도시

1920년대 도쿄에서 서양식 옷차림과 단발로 거리를 걷던 젊은 여자와 남자. 「모던 걸」, 「모던 보이」의 줄임말이다.

긴자銀座도시

도쿄의 번화가. 서양식 상점과 카페가 모인 모던 도쿄의 얼굴이었다.

아사쿠사浅草도시

도쿄 동쪽의 오래된 번화가. 절(센소지)과 극장, 활동사진관, 싸구려 술집이 뒤섞인 서민의 유흥지였다.

자경단自警団사건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경비 조직.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유언비어 속에서 군·경찰과 함께 조선인 학살에 가담했다. 03장.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법

1925년 제정. 천황제(국체)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처벌했다. 1928년 개정으로 최고형이 사형이 되었고, 1945년 10월 폐지되었다.

특고特別高等警察법

특별고등경찰. 사상과 정치 운동을 단속하던 경찰. 1911년 경시청에 처음 생겼다.

비합법非合法법

법이 금지한 활동. 전쟁 전 일본공산당은 존재 자체가 비합법이었다. 모임은 숨어서 열었다.

심퍼シンパ법

심퍼사이저(sympathizer)의 줄임말. 당원은 아니지만 운동에 공감해 돈을 내거나 숨을 곳을 빌려주는 사람.

전향転向 · てんこう법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상을 버린다고 선언하는 것. 1933년 공산당 지도자들의 옥중 전향 선언 뒤 대규모로 이어졌다. 전향하면 풀려나 복학·취직의 길이 열렸다.

암시장闇市 · やみいち전후

패전 직후 배급이 모자라자 역 앞 공터마다 생긴 불법 시장. 신바시·신주쿠 등.

농지개혁農地改革전후

1946~50년 점령기의 개혁. 정부가 부재지주의 소작지 전부와 재촌지주의 1정보 초과분을 사들여 소작인에게 팔았다. 소작지가 약 46%에서 약 10%로 줄었다.

카스토리カストリ전후

전후에 나돈 싸구려 밀주. 여기서 이름을 딴 조잡한 대중 잡지를 「카스토리 잡지」라 했다.

사양족斜陽族전후

다자이의 『사양』(1947)에서 나온 유행어. 전후에 몰락한 상류층을 가리켰다.

『전망』展望전후

지쿠마 쇼보가 1946년 1월 창간한 종합 잡지. 『인간 실격』이 1948년 6월호부터 8월호까지 세 번에 나뉘어 실렸다.

앵두기桜桃忌 · おうとうき전후

다자이의 기일 행사. 시신이 발견된 6월 19일, 미타카의 절 젠린지에서 열린다. 죽기 직전에 쓴 단편 「앵두」에서 이름을 땄다.

루바이야트Rubáiyát책

11~12세기 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4행시 모음. 삶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술을 권한다. 19세기 영어 번역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11

출처

사실은 기억이 아니라 문헌에서 확인해 적었다.

이 책

  • 『인간 실격』 — 1948년 3월 집필 시작, 5월 12일 오미야에서 탈고, 『전망』 1948년 6~8월호 3회 연재, 7월 25일 지쿠마 쇼보 단행본(「굿바이」 수록, 130엔), 신초 문고판 누적 670만 부, 머리말·세 수기·후기의 구조, 1인칭을 私에서 自分으로 고친 초고, 1998년 5월 공개된 초고 157장(『신초』 1998년 7월호), 1940년 「속천사」의 제목 예고 — ja.wikipedia 「人間失格」.
  • 「人間」의 본래 뜻(불교의 인간계·세간, 에도 시대 무렵 「사람」으로 바뀜) — 코토방크 「人間」, 일본어 사전 항목.
  • 영어 제목 No Longer Human, 원제의 뜻 “인간으로서 실격”.

작가

  • 다자이 오사무 — 1909년 6월 19일 출생, 11남매 중 열째·여섯째 아들, 증조부가 기름 행상에서 돈놀이로 큰 지주가 된 집안, 「가나기의 영주님」, 아버지(현 의원·중의원·귀족원 다액납세 의원), 1927년 히로사키 고교, 1930년 도쿄 제대 불문과 입학, 이부세 마스지 사사, 1933년 필명과 「열차」, 1935년 제1회 아쿠타가와상 후보, 1936년 『만년』, 1939년 결혼과 미타카, 1948년 6월 13일 다마강 상수, 6월 19일 발견, 키 175cm — ja.wikipedia 「太宰治」.
  • 사양관 — 1907년 준공, 1층 11칸·2층 8칸, 집안 은행 점포, 화양 절충, 2004년 중요문화재.

집과 땅

  • 이에 제도 — 1898년 7월 16일~1947년 5월 2일, 호주의 동의권, 가독 상속, 무사 집안의 질서에서 온 것, 헌법 24조와 응급조치법에 따른 폐지 — ja.wikipedia 「家制度」. 민법전 논쟁과 호즈미 야쓰카의 「민법 나와서 충효 망한다」(1891) — ja.wikipedia 「民法典論争」(이 페이지에서는 논쟁의 세부를 쓰지 않았다).
  • 지조개정과 지주제(현금 납세, 금융업을 겸한 지주에게 땅이 모임, 소작료의 현물 납부) — ja.wikipedia 「寄生地主制」, 코토방크 「小作料」.
  • 다액납세 의원 — 부현마다 큰 납세자들의 호선, 1925년 개정으로 100명당 1명, 임기 7년, 1947년 폐지 — ja.wikipedia 「多額納税者議員」.
  • 농지개혁 — 1946년 10월 자작농창설특별조치법, 부재지주 전부·재촌지주 1정보(홋카이도 4정보) 초과분, 약 193만 정보, 소작지 약 46%→약 10%, 인플레이션으로 사실상 헐값 — ja.wikipedia 「農地改革」.
  • 우에노–아오모리 급행 소요 시간(1917년 약 17시간, 1934년 12월 개정 뒤 12~13시간) — ja.wikipedia 「東北本線優等列車沿革」.
  • 거리 — 지도의 직선거리(서울–도쿄 약 1,160km, 가나기–도쿄 약 580km)는 대원거리로 계산했다.

학교

  • 구제 고등학교 — 제국대학 입학 정원과 졸업생 수가 거의 같아 진학이 보장, 입학과 동시에 엘리트 대우, 교양주의와 기숙사, 1948년 39곳, 1950년 폐지 — ja.wikipedia 「旧制高等学校」. 1918년 고등학교령과 1917년 임시교육회의 — ja.wikipedia 「高等学校令」. 히로사키 고등학교(1920년 11월 설립, 1950년 3월 폐지, 히로사키 대학) — ja.wikipedia 「弘前高等学校 (旧制)」.
  • 경성제국대학 — 1924년 5월 예과(2년) 설치, 1926년 학부, 1934년 예과 3년, 조선 유일의 구제 대학, 일본인·조선인 학생 비율(1937년 70.2%:29.8%), 서울대학교와의 관계 — ja.wikipedia 「京城帝国大学」.
  • 2·8 독립선언 —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 YMCA, 유학생 약 600명 — ja.wikipedia 「二・八独立宣言」.

도시

  • 카페 — 1911년 카페 프랭탕, 1924년 카페 타이거와 지진 뒤의 변화, 오사카 대형 카페의 도쿄 진출, 1929년 단속 요강, 1933년 특수음식점 규칙, 1934년 학생 출입 금지, 1938년 2월 15일 학생 약 2,000명 검거 — ja.wikipedia 「カフェー (風俗営業)」, 국립국회도서관 「本の万華鏡」 39회 3장 「喫茶店の広まり」.
  • 여급의 수와 벌이 — 도쿄 여급 약 7,300명(1925)→1만 5,500명 이상(1929), 긴자 큰길의 카페 20곳(1922)→50곳(1929), 신주쿠 카페 108곳(1930), 전국 카페·바 2만 7,532곳(1930)→3만 7,065곳(1934), 전국 여급 약 6만 7천 명(1930)·11만 1,700명(1936), 무급과 팁, 평균 월 30~50엔과 남자 사무원 초봉 70~75엔, 게이샤보다 싸고 소개·격식이 필요 없음 — Elise K. Tipton, “Pink Collar Work: The Café Waitress in Early Twentieth Century Japan”, Intersections 7 (2002).
  •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 유언비어, 내무성 경보국 전보, 자경단·군·경찰, 사법성 233명·내무성 248명·요시노 사쿠조 2,613명·『독립신문』 6,661명, 2008년 중앙방재회의 보고서의 「1~수 퍼센트」, 보도 통제 — ja.wikipedia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事件」.

사상

  • 치안유지법(1925년, 일소기본조약·보통선거법과의 관계, 1928년 개정으로 사형과 목적수행죄, 3·15 사건 약 1,600명, 1945년 10월 15일 폐지) — ja.wikipedia 「治安維持法」.
  • 전향 — 1933년 6월 사노·나베야마 성명, 1933년 9월 미결수 1,370명 중 30%·기결수 372명 중 36%, 전향의 이유, 1941년 예방 구금 — ja.wikipedia 「転向」.
  • 조선에서의 치안유지법 — 1925년 동시 시행,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1925년 11월)이 첫 적용, 1930년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판결(독립 = 국체 변혁), 1928~38년 무기징역 본토 1명·조선 39명 — 水野直樹 「日本の朝鮮支配と治安維持法」(旗田巍 編 『朝鮮の近代史と日本』 수록). 『しんぶん赤旗』 2006년 9월 20일 자 문답 기사의 인용을 거쳐 확인했다.

패전 뒤

  • 암시장 — 배급 붕괴와 통제 가격, 귀환자로 인한 인구 증가, 1945년 우에노역 일대 하루 평균 2.5명 아사, 1945년 8월 20일 신주쿠, 1951년 12월 노점 철거 — ja.wikipedia 「闇市」.
  • 호주제 — 1923년 일본식 호적 제도의 도입, 2005년 2월 3일 헌법불합치, 2008년 1월 1일 폐지 — ko.wikipedia 「호주제」.
  • 잡지 『전망』 — 지쿠마 쇼보, 1946년 1월 창간. 『사양』과 「사양족」.

문학

  • 사소설 — 1907년 다야마 가타이 「이불」, 자연주의에서 나옴, 독자가 「나」를 작가로 읽는 경향, 1935년 고바야시 히데오 「사소설론」 — ja.wikipedia 「私小説」.
  • 무뢰파 — 사카구치 안고·다자이·오다 사쿠노스케 중심, 1947년 1월 「희작자 문학론」과 신게사쿠파, 정식 모임이나 동인지 없음 — ja.wikipedia 「無頼派」.

지도

지도는 Natural Earth(퍼블릭 도메인)의 경계 데이터로 직접 그렸다.

확인하지 못한 것

  • 한국어판마다 自分과 私를 어떻게 옮겼는지. 실물을 대조하지 못했다.
  • 민음사판 표지 그림이 에곤 실레의 「꽈리가 있는 자화상」이라는 것은 표지와 그림을 눈으로 대조해서 판단했다. 판권면의 표기는 확인하지 못했다.
  • 무뢰파 장의 예전 판에 있던 사카구치 안고의 「소설은 기껏해야 상품」이라는 인용은 원문을 찾지 못해 뺐다.
  • 조선에서의 치안유지법 사형 판결 건수는 출처마다 죄목(살인 등)이 섞여 있어 쓰지 않았다.

이미지

사진과 그림은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받았고 전부 퍼블릭 도메인이거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다. 원본 파일명은 build/data/ningen/manifest.py에 그대로 적어 두었다.

소설

太宰治『人間失格』, 筑摩書房, 1948. 한국어판 『인간 실격』, 김춘미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이 페이지의 색은 이 판의 표지에서 뽑았다.

이 페이지에 대하여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 위해 만든 배경자료다. 스포일러를 넣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원칙이다. 이 책에서 특히 조심한 것은 작가의 약력이 곧 줄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작가의 삶 가운데 소설과 겹치는 사건은 적지 않았다. 시대 배경도 무엇이었나까지만 적고, 소설에서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적지 않았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원작은 일본에서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났다. 영화와 만화는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