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
지조개정
메이지 정부가 세금을 수확의 일부가 아니라 땅값에 매긴 현금으로 걷기 시작했다. 흉년에도 줄지 않는 세금에 땅을 잃는 농민이 늘었고, 땅은 돈을 빌려주던 큰 지주에게 모였다.
1910~40년대 · 쓰가루와 도쿄 · 人間失格
혼슈 북쪽 끝의 대지주 집안, 「고등학교」라 불린 엘리트 학교, 지진 뒤 다시 선 도쿄의 카페, 붙잡혀 가던 사상. 소설은 이것들을 설명 없이 당연한 배경으로 둔다. 이 페이지는 그 배경 — 역사, 제도, 낯선 문화 — 만 모았다. 줄거리·결말은 없다.
이 소설을 따라가는 데 필요한 배경을 여섯 가지로 추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각 장에 있다.
1898년 민법은 가족을 개인이 아니라 「이에」라는 단위로 보았다. 이에의 우두머리 호주가 가족의 결혼과 거처에 동의권을 쥐고, 그 자리와 재산은 원칙적으로 장남 한 사람이 통째로 물려받았다. 땅을 나눠 물려주면 몇 대 만에 집이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지주 집안이라도 장남이 아닌 아들에게 돌아갈 몫은 법으로 정해진 것이 없었다.
번역본의 「고등학교」는 열일곱에서 스무 살의 남학생이 다니던 구제 고등학교다. 정원이 제국대학 정원과 거의 같아서 들어가기만 하면 제국대학이 보장되었다. 그래서 입학하는 순간 사회가 미래의 엘리트로 대접했다. 지금으로 치면 명문대 교양 과정에 가깝다.
1920년대 말 도쿄의 「카페」는 여급이 손님 곁에 앉아 술 시중을 드는 곳이었다. 게이샤를 부르려면 소개와 격식과 큰돈이 필요했지만 카페는 싸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었다. 늘어나던 월급쟁이와 학생이 몰렸다. 여급은 가게에서 월급을 받지 않고 손님의 팁으로 살았다.
1925년 치안유지법은 천황제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결사를 처벌했다. 러시아 혁명 뒤 소련과 국교를 트고 남자 보통선거를 시작하던 해, 정부는 혁명 사상이 합법의 틈으로 들어올 것을 두려워했다. 공산당은 비합법 조직이라 모임은 숨어서 열렸다. 1933년 옥중의 지도자들이 사상을 버리자 수많은 사람이 뒤따랐다 — 전향이다.
패전 뒤 점령군의 개혁이 전쟁 전 일본의 기둥을 한꺼번에 뽑았다. 치안유지법이 폐지되고(1945), 농지개혁이 지주의 땅을 소작인에게 넘기고(1946~50), 새 헌법이 이에 제도를 없앴다(1947). 이 소설은 그 한가운데인 1948년에 나왔다. 첫 독자들은 막 사라진 세계의 이야기를 읽은 셈이다.
일본어에는 1인칭이 여럿 있다 — 와타시(私), 보쿠(僕), 오레(俺), 지분(自分). 상대와 자리에 따라 골라 쓰고, 무엇을 골랐는지가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드러낸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대개 모두 「나」가 되어 이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에 태어났고, 이듬해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이 페이지가 다루는 1910~40년대는 일제강점기와 정확히 겹친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제도 가운데 여럿이 조선에도 있었다.
학교. 조선에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졌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것이 그 예과(처음 2년, 1934년부터 3년)였고, 해방 때까지 조선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학생의 다수는 일본인이었다(1937년 약 70%). 그래서 많은 조선의 수재가 도쿄로 유학을 갔다. 1919년 2월 8일 도쿄의 조선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이 그 유학생 약 600명이었다.
지진.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자경단과 군·경찰이 조선인을 학살했다. 희생자 수는 일본 사법성 집계 233명부터 당시 조사로 수천 명까지 크게 갈린다(03장).
법. 치안유지법은 1925년 일본과 같은 때 조선에도 시행되었고, 첫 적용도 조선이 먼저였다. 조선에서는 독립운동까지 「국체 변혁」으로 보아 이 법으로 처벌했고, 형량도 훨씬 무거웠다(04장).
집. 일제는 이에 제도를 본뜬 호적 제도를 조선에 들여왔다(1923). 해방 뒤에도 호주제로 남아, 일본보다 60여 년 늦은 2008년 1월 1일에야 폐지되었다.
1945년 8월은 일본에는 패전, 한국에는 해방이다. 이 소설이 나온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선 해다.
왼쪽 목차에서 한 장(章)씩 골라 본다 — 한 번에 한 주제만 뜬다. 처음부터 다 읽을 필요는 없고, 장마다 맨 위의 요약 상자만 읽어도 된다. 책을 읽다 걸리는 것이 생기면 그때 해당 장을 펴 보면 된다.
검색창에 낱말을 넣으면 페이지 전체에서 그 대목만 뽑아 준다. “이에”, “여급”, “전향” 같은 말이 걸렸을 때 쓰면 된다.
스포일러는 없다. 이 책은 소설이 작가의 삶을 많이 빌려 와서 작가의 약력이 곧 줄거리가 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07장 작가 약력과 09장 연표에서는 소설과 겹치는 사건을 일부러 뺐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쓰지 않았다.
어디인가. 그리고 그 시절 큰 지주 집안에서 자란다는 것이 무엇이었나.
쓰가루(津軽)는 아오모리현 서쪽 지방의 이름이다. 에도 시대에는 쓰가루 번(藩)이 다스렸고, 그 성이 있던 곳이 히로사키다. 이와키산 아래로 너른 쓰가루 평야가 펼쳐지고, 겨울에는 눈이 많다. 쌀과 사과가 나는 농촌이다. 이곳 사투리는 도쿄 사람이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다르다.
도쿄와는 기차로 하룻밤 거리였다. 1891년 우에노–아오모리 철도가 이어졌고, 1917년 급행이 약 17시간, 1934년에는 12~13시간이 걸렸다. 지방의 부잣집 아들이 더 높은 학교에 가려면 이 길을 따라 히로사키나 센다이, 도쿄로 나와야 했다.
에도 시대 농민은 거둔 쌀의 일부를 영주에게 바쳤다. 1873년 메이지 정부는 이것을 지조개정(地租改正)으로 바꾸었다. 땅값에 매긴 세금을 현금으로, 해마다 같은 액수 내게 한 것이다. 근대 국가를 세울 돈을 안정적으로 걷기 위해서였다.
흉년이 들거나 쌀값이 떨어져도 세금은 줄지 않았다. 돈을 빌려 세금을 내다 갚지 못한 농민은 땅을 넘기고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이 되었다. 땅은 돈을 빌려준 쪽, 곧 상인과 고리대금을 겸한 지주에게 모였다. 소작료는 쌀로 냈다. 이렇게 큰 지주가 직접 농사짓지 않고 소작료로 사는 체제가 굳어졌고, 패전 무렵 일본 경지의 46%가량이 소작지였다.
다자이 오사무의 집안 쓰시마 가문이 그런 집이었다. 증조부가 기름 행상으로 시작해 돈놀이로 재산을 불리고 큰 지주가 되었다. 다자이가 태어날 무렵에는 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였고, 마을에서는 「가나기의 영주님」이라 불렸다.

아버지는 현 의원과 중의원을 거쳐 귀족원의 다액납세 의원이 되었다. 귀족원은 황족·귀족이 앉는 상원인데, 재산가의 이해도 대변하게 하려고 각 부현의 큰 납세자들끼리 뽑은 사람을 함께 앉혔다. 1925년 개정 뒤로는 현마다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100명 가운데 1명꼴이었다. 즉 그 현에서 손꼽히는 부자라는 뜻이다.
그 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나무 2층 건물에 1층 11칸, 2층 8칸. 집 안에 집안이 운영하던 은행의 점포까지 있었다. 겉은 일본식이지만 안에는 서양식 응접실과 계단실이 있다. 메이지 시대 지방 부호의 집이 어땠는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1898년 7월 시행된 메이지 민법의 가족은 개인이 아니라 「이에」(家)라는 단위다. 이에에는 우두머리인 호주(戸主)가 있고, 가족이 결혼하거나 양자를 들이거나 사는 곳을 정하는 데 호주의 동의가 필요했다. 호주의 지위와 재산은 가독 상속(家督相続)으로 한 사람, 원칙적으로 장남에게 통째로 넘어간다. 지금처럼 자식들이 나눠 받는 상속이 아니다.
왜 이렇게 만들었나. 이에는 본래 무사 집안의 질서였다. 본가와 분가, 대를 잇는 장남, 쪼개지 않는 가산(家産). 메이지의 입법자들은 이 질서를 온 국민의 가족법으로 삼았다. 땅과 이름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면 집이 대를 거듭해도 줄지 않는다. 국가는 호주를 통해 호적과 가족을 한 단위로 다룰 수 있었다.
대가로 장남이 아닌 아들들은 법이 정해 준 몫 없이 자랐다. 집의 부와 이름 속에서 자라면서도 그것을 물려받지 않는 자리다. 이 제도는 1947년 5월, 49년 가까이 만에 사라졌다 — 새 헌법이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을 내세웠기 때문이다(05장).


번역본에 「고등학교」가 나오면 지금의 고등학교를 떠올리지 말 것. 전쟁 전의 구제(舊制) 고등학교다.
| 단계 | 나이 | 햇수 | 어떤 곳 |
|---|---|---|---|
| 심상소학교 尋常小学校 | 6~12 | 6년 | 의무교육. 여기서 대부분이 학교를 마친다. |
| 중학교 中学校 | 12~17 | 5년 | 지금의 중·고등학교를 합친 과정. 들어가는 것 자체가 소수다. 성적이 좋으면 4학년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응시할 수 있었다. |
| 고등학교 高等学校 | 17~20 | 3년 | 지금의 고등학교가 아니다. 제국대학에 가기 위한 예비 과정으로 지금의 대학 교양 과정에 가깝다. 남자만 들어갔다. 여기 들어가면 제국대학 진학이 사실상 보장되었다. |
| 제국대학 帝国大学 | 20~23 | 3년 | 도쿄·교토 등. 졸업생이 관료·학자·정치가가 된다. |
먼저 중학교부터 소수였다. 전쟁 전 대부분의 아이는 6년의 심상소학교에서 학교를 마쳤다. 5년제 중학교에 가는 것만으로 이미 좁은 길이었고, 고등학교는 그 졸업생 가운데서도 일부만 들어갔다.
결정적인 것은 그다음이다. 제국대학의 입학 정원이 고등학교 졸업생 수와 거의 같았다. 학과를 가리지 않으면 고등학교를 마친 사람은 누구나 제국대학에 갈 수 있었다. 경쟁은 고등학교 입시에서 끝났다. 제국대학 졸업생은 관료·판사·학자·대기업 간부가 되었으니, 열일곱 살의 고등학교 합격이 곧 인생의 자리를 정했다.
그래서 이 학교의 학생은 나이로는 대학생, 사회적으로는 이미 엘리트였다. 지방의 부잣집에서 이런 학교에 아들을 보내는 것은 집안의 기대를 거는 일이었다.
메이지 시대에 처음 세운 고등학교들은 번호로 불렸다. 제1고등학교(도쿄, 「이치코」), 제2고등학교(센다이), 제3고등학교(교토)… 제8고등학교까지, 이들을 「넘버 스쿨」이라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 속에 산업이 커지고 진학하려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정부는 1917년 임시교육회의를 열고 1918년 고등학교령을 새로 내 고등교육을 크게 늘렸다. 그 뒤 몇 해 사이 번호 대신 지명을 단 고등학교가 잇따라 생겼다. 아오모리현의 히로사키 고등학교도 1920년에 세워졌다. 폐지 직전인 1948년에는 모두 39곳이었다.


고등학교는 대학 입시를 위한 학원이 아니었다. 이미 대학 진학이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3년 동안 외국어와 철학, 문학을 넓게 읽는 교양(教養)을 쌓는 곳으로 여겨졌다. 학생들이 스스로 운영하는 자치 기숙사가 그 중심이었다. 일부러 낡은 모자와 망토, 나막신 차림으로 거칠게 구는 「반카라」(蛮カラ) 기풍도 여기서 나왔다 — 서양식 멋쟁이를 뜻하는 「하이카라」를 비튼 말이다.


같은 제도가 식민지에도 들어왔다. 1924년 서울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먼저 예과(豫科)가 문을 열었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대학 준비 과정으로, 처음 2년이었다가 1934년 3년이 되었다. 학부는 1926년에 열렸다.
해방 때까지 조선에 대학은 이곳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학생의 다수는 조선에 사는 일본인이었다 — 1937년 일본인 약 70%, 조선인 약 30%. 그래서 조선의 수재 상당수는 현해탄을 건너 도쿄의 학교로 갔다. 해방 뒤 서울대학교가 이 학교의 건물과 시설을 넘겨받았다.
패전 뒤 점령 당국과 일본 정부는 미국식 6·3·3·4 학제로 학교 제도를 바꾸었다. 구제 고등학교는 새 대학에 흡수되어 1950년까지 모두 폐지되었다. 히로사키 고등학교는 히로사키 대학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일본에서 「고등학교」라고 하면 한국과 같은 3년제 학교를 가리킨다.

지진으로 무너진 도시가 모던 도시로 다시 섰다. 그 밤거리의 풍경.



지진 직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불을 질렀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내무성 경보국은 각 부현에 조선인을 엄중히 단속하라는 전보를 보냈고, 9월 2일 계엄령이 내려졌다. 주민들이 만든 자경단과 군·경찰이 조선인을 붙잡아 죽였다. 중국인과, 사투리 때문에 조선인으로 몰린 일본인도 희생되었다.
희생자 수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일본 사법성은 233명, 내무성은 248명으로 집계했고, 요시노 사쿠조는 2,613명, 상하이의 『독립신문』은 6,661명으로 보았다. 2008년 일본 정부 중앙방재회의 보고서는 지진 사망자의 「1~수 퍼센트」가 학살 희생자라고 추정했다 — 수천 명 규모다. 정부는 9월 7일 긴급 칙령으로 보도를 묶어, 학살 기사는 그해 가을까지 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1911년 긴자에 카페 프랭탕이 문을 열었다. 서양화가들이 파리의 카페를 본떠 문인과 화가가 어울리는 곳으로 만든 가게다. 그런데 남자 종업원(가르송)이 서빙하는 파리와 달리 여기서는 여급(女給, 조큐)이 손님을 맞았다. 처음의 여급은 기모노 위에 흰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나르는 사람이었다.
지진 이후 카페는 성격이 바뀌었다. 1924년 긴자에 문을 연 카페 타이거는 화장한 여급이 손님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이야기하는 서비스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기록은 「먹고 마시는 곳이던 카페가 갑자기 놀고 즐기는 곳이 되었다」고 적었다. 쇼와에 들어서자 오사카의 대형 카페들이 도쿄로 올라왔고, 여급은 지금의 호스티스에 가까워졌다.
손님이 생겼다. 1920년대 도시에는 회사와 관청에 다니는 월급쟁이(샐러리맨)가 크게 늘었다. 지진 뒤 이들은 서쪽 교외로 이사해 신주쿠 같은 환승역을 거쳐 출퇴근했다. 1930년 신주쿠에만 카페가 108곳, 그 일대 음식점의 3분의 1이 넘었다.
싸고 쉬웠다. 여자의 접대를 받으려면 전에는 요정(마치아이)에서 게이샤를 불러야 했다. 단골의 소개와 정해진 격식, 큰돈이 들었다. 카페는 소개도 격식도 필요 없었고 값도 쌌다. 서양식으로 꾸민 카페는 월급쟁이가 감당할 수 있는 값으로 「모던 생활」을 맛보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불황이 가장 깊던 해에도 카페는 늘었다. 전국의 카페·바는 1930년 2만 7,532곳에서 1934년 3만 7,065곳이 되었다. 여급은 1930년 전국에 약 6만 7천 명, 1936년 11만 명을 넘었다. 1930년의 여급 수가 이미 공인된 매춘부 수(약 5만 명)보다 많았다.


대부분의 여급은 가게에서 월급을 받지 못했다. 가게 주인은 「손님을 접대하고 팁을 받을 자리를 내줄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여급이 자기 식대와 요리사 몫, 손님이 쓴 성냥값까지 내야 하는 가게가 많았고, 1929년까지는 지각·결근 벌금도 걷었다. 수입은 손님이 주는 팁뿐이었다.
팁에 기대는 구조가 여급을 손님에게 더 바짝 붙게 만들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벌이는 많지 않았다. 평균 한 달 30~50엔으로 타이피스트나 전화 교환원과 비슷했고, 도쿄시 남자 사무원의 초봉 70~75엔에 크게 못 미쳤다.
카페가 번성하자 단속도 따라왔다. 1929년 경시청이 카페·바 단속 요강을 정했고, 1933년에는 특수음식점 영업 단속 규칙을 만들었다. 1934년에는 미성년자와 학생의 카페 출입을 금지했다. 1938년 2월 15일에는 도쿄의 카페 등을 일제히 단속해 학생 약 2,000명을 붙잡았다.
1936년에는 학생 출입을 막는 부현이 15곳으로 늘었다. 학생이 카페에 드나드는 것은 이 시절 「불량」의 상징이었다.



1920~30년대 일본에서 공산주의는 그 자체로 범죄였다. 그런데 학생들 사이에서는 유행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1922년 일본공산당이 비밀리에 생겼다. 1925년 일본은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같은 해 25세 이상 남자 모두에게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법도 만들었다. 정부는 문이 열리는 만큼 혁명 사상이 합법적인 길로 퍼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두 법을 함께 만들었다. 치안유지법은 국체(천황제)를 바꾸거나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결사를 만들거나 들어가는 것을 처벌했다. 선거권이라는 사탕과 이 법이라는 채찍을 함께 내밀었다고 해서 「사탕과 채찍」이라 불렸다.
1928년 3월 15일, 공산당 관계자 약 1,600명이 전국에서 한꺼번에 붙잡혔다(3·15 사건). 그해 6월 법이 긴급 칙령으로 고쳐져, 결사를 이끈 사람의 최고형이 사형이 되었다. 또 결사의 목적을 돕는 행위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당원이 아니어도 돈을 대거나 방을 빌려준 사람까지 걸리게 된 것이다.
1920년대 말의 고등학생과 대학생 사이에는 마르크스주의가 크게 유행했다. 공황과 소작 쟁의가 이어지던 때, 가난과 불황을 한 번에 설명해 주는 이론으로 읽혔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문단을 휩쓸었고, 많은 고등학교에 사회과학 연구회가 있었다. 숨어서 모이고 전단을 돌리는 비합법의 세계가 학생들 곁에 있었다.

1933년 6월, 옥중의 공산당 위원장 사노 마나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전향 성명을 냈다. 소련(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르는 운동은 잘못이었고, 앞으로는 천황을 존중하는 일본의 운동이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해 9월까지 미결수 1,370명 가운데 30%, 기결수 372명 가운데 36%가 전향했다.
사람들이 전향한 까닭은 하나가 아니었다. 경찰과 사상 검사의 고문, 그리고 「고향의 부모님이 울고 계신다」는 식의 설득. 천황을 부정하라는 코민테른의 방침에 대한 반감과 민족주의. 그리고 돌아갈 길 — 전향하면 풀려나 학교에 다시 들어가거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국가는 처벌보다 전향을 받아 내는 쪽을 택했고, 1941년부터는 전향하지 않은 사람을 형기가 끝난 뒤에도 가두었다(예방 구금).
이 시대의 일본 소설에 「운동」, 「동지」, 「심퍼」, 「전향」 같은 말이 설명 없이 나온다면 이 배경을 떠올리면 된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 칙령으로 일본 본토와 같은 때 조선·대만에도 시행되었다. 첫 적용도 조선이 먼저였다 —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다(본토의 첫 적용은 1926년 1월).
조선에서는 공산주의만이 아니라 독립운동도 이 법으로 다스렸다. 1930년 조선의 최고 법원은 독립을 꾀하는 것은 제국 영토의 일부를 빼앗아 통치권을 줄이는 것이니 「국체의 변혁」을 꾀하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형량도 훨씬 무거웠다. 역사학자 미즈노 나오키의 집계로 1928~38년 이 법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본토 1명, 조선 39명이었다.
이 소설이 쓰인 것은 패전 3년 뒤다. 그 사이 앞 장들의 세계가 무엇 때문에, 어떻게 사라졌나.


전쟁 중의 배급 제도는 패전과 함께 무너졌다. 그런데 공정 가격을 정한 통제 경제는 그대로 남았다. 정해진 값으로는 살 물건이 없었고, 전쟁터와 식민지에서 돌아온 사람들로 도시 인구는 불어났다. 1945년 우에노역 일대에서는 하루 평균 두세 명이 굶어 죽었다.
그래서 1945년 8월 20일 신주쿠를 시작으로 신바시·우에노·이케부쿠로 역 앞에 불법 시장이 섰다. 통제가 하나씩 풀리면서 암시장도 줄었고, 1951년 말 도쿄의 노점이 철거되었다.
점령군 총사령부(GHQ)는 지주제와 가부장제, 사상 통제가 일본을 전쟁으로 이끈 토양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개혁의 순서가 곧 앞 장들의 순서를 거꾸로 지우는 일이 되었다.
사상. 1945년 10월 GHQ의 인권 지령으로 치안유지법과 특고가 폐지되었다. 전향하지 않고 갇혀 있던 공산당 간부들이 풀려났고, 공산당은 합법 정당이 되었다. 비합법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합법이 되었다.
땅. GHQ는 농촌의 가난과 지주제가 군국주의를 키웠다고 보았다. 1946년 10월 법으로 정부가 마을에 살지 않는 지주의 소작지는 모두, 사는 지주의 것도 1정보(약 1ha, 홋카이도는 4정보)를 넘는 만큼 사들여 소작인에게 팔았다. 1947~50년 사이 약 193만 정보가 넘어갔다. 값은 정해 둔 것이었는데 인플레이션이 심해 옛 지주에게는 사실상 헐값이었다. 경지 가운데 소작지는 약 46%에서 약 10%로 줄었다. 대지주 집안의 시대가 끝났다.
집. 1947년 5월 3일 시행된 새 헌법 24조는 혼인과 가족을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 위에 세우라고 했다. 이에 맞지 않는 이에 제도는 그 전날로 효력을 잃었고, 1948년 1월 새 민법이 자녀의 균등 상속을 정했다.
학교. 6·3·3·4 학제로 바뀌면서 구제 고교는 1950년까지 모두 새 대학에 흡수되었다(02장).
1947년 12월 다자이의 장편 『사양』(斜陽, 기우는 해)이 단행본으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전쟁과 개혁으로 몰락한 상류층을 가리키는 「사양족」(斜陽族)이 유행어가 되었다. 다자이의 생가 같은 대지주 집안이 실제로 기울던 때였다.
『인간 실격』은 그 이듬해 봄에 쓰였고, 1948년 6월부터 잡지에 실렸다. 첫 독자들은 대지주의 집, 구제 고등학교, 카페와 비합법 운동이 있던 전쟁 전 20년을 이미 사라진 세계로 읽었다.
일본 근대 소설의 큰 전통과, 패전 직후 다자이가 묶여 불린 이름.
1907년 다야마 가타이가 제자에게 품은 마음을 거의 그대로 드러낸 「이불」을 발표했다. 이것이 사소설의 시작으로 꼽힌다. 당시 일본 문단을 휩쓸던 것은 유럽에서 들어온 자연주의였다. 사회와 인간을 꾸밈없이 그린다는 이 원칙이 일본에서는 작가가 겪은 일과 속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뒤 일본 소설의 큰 줄기는 그쪽으로 흘렀다. 작가들은 좁은 문단 안에서 서로의 삶을 잘 알았고, 잡지는 작가의 사생활을 다뤘다. 독자들은 소설의 「나」를 곧 작가로 읽었고, 작가의 삶이 곧 작품의 무게가 되었다. 사소설의 「나」가 반드시 작가는 아니고 작품은 어디까지나 허구이지만, 읽는 쪽에서는 그 경계가 자주 지워졌다.
비판도 있었다. 1935년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는 「사소설론」에서 서양의 「나」가 사회 속에서 다듬어진 데 비해 일본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고 쓰고, 「사소설은 죽었다」고 했다.
패전 직후, 기성 문단의 도덕과 권위에 등을 돌린 작가들이 있었다. 사카구치 안고, 다자이 오사무, 오다 사쿠노스케가 중심이고, 이시카와 준, 단 가즈오 등이 함께 꼽힌다. 사카구치가 1947년 1월 「희작자 문학론」에서 에도 시대 대중 작가(게사쿠샤, 戯作者)의 태도를 되살리자고 한 데서 「신게사쿠파」(新戯作派)라는 이름이 나왔고, 지금은 무뢰파(無頼派)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인다. 무뢰(無頼)는 「기댈 데가 없음」, 곧 건달·무법자라는 뜻이다.
뚜렷한 모임이나 동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평가들이 비슷한 태도의 작가들을 묶어 부른 이름이다.


이 장의 약력에는 일부러 비워 둔 자리가 있다. 먼저 그 이유부터.
다자이의 삶은 이 소설과 겹치는 곳이 아주 많다. 그래서 그의 약력을 빠짐없이 적으면 그것이 곧 소설의 줄거리 요약이 된다. 이 장에는 소설과 겹치지 않는 사실 — 집안, 학교, 문학의 이력, 대표작, 죽음 — 만 적었다.
다 읽고 나서 그의 전기를 찾아 읽으면, 소설이 무엇을 빌려 오고 무엇을 바꾸었는지 비교해 볼 수 있다. 그 비교는 다 읽은 뒤에 하기를 권한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 1909년 6월 19일 아오모리현 가나기의 대지주 집안에서 열한 남매 가운데 열째,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01장). 어머니가 몸이 약해 유모와 이모, 그리고 열한 살 위의 하녀 손에서 자랐다.
아오모리 중학교에서는 1학년 2학기부터 졸업까지 반장을 했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시가 나오야를 애독했다. 친구들과 동인지를 내며 소설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1927년 히로사키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02장), 그해 여름 우상이던 아쿠타가와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1930년 도쿄 제국대학 불문과에 들어갔다.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다. 불문과는 인기가 없어 시험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마침 그해부터 프랑스어 시험이 생겼고, 그는 시험장에서 손을 들어 사정을 말하고 입학을 허락받았다. 강의는 따라가지 못했고, 대신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대학은 끝내 졸업하지 못했다.


1933년 처음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으로 단편 「열차」를 발표했다. 1935년 제1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지만 떨어졌고, 심사평을 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잡지로 공개 반박을 했다. 이듬해 첫 작품집 『만년』을 냈다.
1939년 결혼해 도쿄 교외 미타카에 자리 잡은 뒤로 안정된 시기가 왔다. 「여학생」, 「부악백경」, 『달려라 메로스』(1940) 같은 밝은 작품도 이때 나왔다. 전쟁 중에도 『쓰가루』, 『옛날이야기』를 쓰며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패전 뒤 1947년 『사양』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전후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되었다(05장). 1948년 3월 아타미에서 『인간 실격』을 쓰기 시작해 5월 사이타마현 오미야에서 마쳤다. 그해 6월 13일 미타카의 다마강 상수에 몸을 던졌다. 서른여덟 살이었다. 6월 19일, 그의 생일에 발견되었다. 신문 연재 중이던 「굿바이」는 미완으로 남았다.




번역으로는 보이지 않는 원어의 결. 제목의 두 낱말, 일본어의 1인칭, 그리고 이 책이 어떤 꼴로 나왔나.
지금은 그냥 「사람」이다. 그런데 원래는 산스크리트 말을 옮긴 불교 용어로, 육도(六道) 가운데 사람이 사는 세계, 곧 세상을 가리켰다. 「사람 인」에 「사이 간」 — 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자리다. 에도 시대 무렵부터 그 세상에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자격을 잃음. 달리기에서 부정 출발로 실격, 시험에서 서류 미비로 실격. 누군가 정해 둔 기준이 있고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판정이다. 원제를 글자대로 풀면 「인간으로서 실격」, 「인간 자격 박탈」쯤이 된다.
1940년 1월, 다자이는 짧은 글 「속천사」(俗天使)에 이렇게 썼다 — “그 시절의 일은 대여섯 해 지나 좀 더 차분해지면 천천히 써 볼 생각이다.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으로 할 생각이다.” 제목이 소설보다 8년 먼저 있었다.
영어로는 No Longer Human(더 이상 인간이 아닌)으로 옮겨졌다. 한국어판은 거의 모두 한자를 그대로 살려 『인간 실격』이다.
일본어는 말하는 사람이 상대와의 관계, 자리의 격식, 자기를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에 따라 1인칭을 골라 쓴다. 한국어의 「나」와 「저」보다 갈래가 훨씬 많다.
가장 기본적이고 격식 있는 1인칭. 머리말과 후기의 1인칭이 이것이다.
남자가 친근하게 쓰는 1인칭. 소년 같은 느낌이 있다.
남자가 거칠게, 편하게 쓰는 1인칭.
원래 「자기 자신」이라는 뜻. 1인칭으로 쓰면 자기를 한 걸음 떨어진 대상처럼 가리키는 딱딱한 느낌이 난다. 군대나 운동부에서 쓰는 말투이기도 하다. 세 수기의 1인칭이 이것이다.
책 맨 앞의 짧은 글. 1인칭은 私(와타시)다.
책의 본문. 1인칭은 自分(지분)이다. 수기(手記)는 겪은 일을 나중에 돌아보며 제 손으로 적은 글이다.
책 맨 뒤의 짧은 글. 1인칭은 다시 私다.
1998년 5월 B5 원고지 157장의 초고가 공개되어 그해 『신초』 7월호에 실렸다. 낱말 하나하나를 몇 번씩 고친 흔적이 있었다. 수기의 1인칭은 처음에 私였다가 쓰는 도중에 自分으로 고쳐졌고, 완성본은 自分으로 통일되었다.
自分은 원래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다. 1인칭으로 쓰면 자기를 한 걸음 떨어진 대상처럼 가리키는 딱딱한 느낌이 나고, 군대나 운동부에서 쓰는 말투이기도 하다.
한국어판이 이 차이를 어떻게 옮겼는지는 판본마다 다를 수 있다. 이 페이지는 실물을 대조하지 못했다.
잡지 『전망』(展望, 지쿠마 쇼보가 1946년 1월 창간한 종합 잡지) 1948년 6·7·8월호에 세 번 나뉘어 실렸다. 연재 마지막 회가 나오기 전에 작가가 죽었다. 단행본은 그해 7월 25일 지쿠마 쇼보에서 미완의 「굿바이」와 함께 나왔고 값은 130엔이었다. 이 때문에 이 소설은 오래 작가의 유서처럼 읽혔는데, 1998년의 초고가 공들여 다듬은 원고였음을 보여 주었다.
신초 문고판 한 판본만 누적 670만 부를 넘겼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 꼽힌다.
민음사판 표지는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1890–1918)의 「꽈리가 있는 자화상」이다. 비스듬히 돌아본 얼굴, 마른 가지 끝의 붉은 꽈리. 이 소설과 직접 관계는 없다. 이 페이지의 청록과 주홍도 그 표지에서 뽑았다.
일본과 조선의 1890~1950년대, 그리고 작가의 삶. 소설과 겹치는 작가의 사건은 넣지 않았다 — 넣으면 연표가 곧 줄거리가 된다.
1873
메이지 정부가 세금을 수확의 일부가 아니라 땅값에 매긴 현금으로 걷기 시작했다. 흉년에도 줄지 않는 세금에 땅을 잃는 농민이 늘었고, 땅은 돈을 빌려주던 큰 지주에게 모였다.
1891. 9
도쿄 우에노에서 혼슈 북쪽 끝 아오모리까지 철도가 이어졌다. 1917년 급행으로 약 17시간 걸렸다.
1898
메이지 민법이 가족을 「이에」(家)라는 단위로 묶었다. 이에의 우두머리 호주가 가족을 다스리고, 재산과 지위는 원칙적으로 장남 한 사람이 통째로 물려받는다. 이 제도는 1947년 5월까지 49년 가까이 살아 있었다.
1907
아오모리현 가나기에서 대지주 쓰시마 겐에몬이 집을 지었다. 1층 11칸, 2층 8칸, 집 안에 은행 점포까지 둔 저택이다. 지금은 다자이 오사무 기념관 「사양관」이다.

1909. 6. 19
가나기의 쓰시마 집안에서 열한 남매 가운데 열째,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의 필명이 다자이 오사무다. 아버지는 현 의원을 거쳐 중의원 의원, 귀족원 의원을 지낸 지역의 명사였다.
1910. 8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이 연표의 나머지 35년은 일제강점기와 겹친다.
1911
파리의 카페를 본떠 문인과 화가가 모이는 곳으로 문을 연 카페 프랭탕. 파리와 달리 여급(女給)이 손님을 맞았다. 같은 해 사상 단속을 맡는 특별고등경찰이 경시청에 생겼다.
1919. 2. 8
도쿄의 조선 YMCA 회관에서 조선인 유학생 약 600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3주 뒤 조선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1920
1918년 고등학교령으로 고등교육을 늘리면서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에도 구제 고등학교가 세워졌다.
1923. 9. 1
도쿄와 요코하마가 무너지고 불탔다. 아사쿠사의 12층 탑 료운카쿠가 반쯤 무너졌다. 도쿄는 이 폐허 위에 넓은 길과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모던 도시로 다시 지어진다. 지진 직후 유언비어 속에서 자경단과 군·경찰이 조선인을 학살했다.

1924
서울에 조선의 유일한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고, 먼저 예과가 문을 열었다. 일본의 구제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과정이다. 같은 해 긴자에 카페 타이거가 문을 열었다.
1925
국체(천황제)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처벌하는 법. 남자 보통선거법과 거의 동시에 만들어져 「사탕과 채찍」이라 불렸다. 같은 때 조선·대만에도 시행되었고, 11월 조선공산당 사건이 첫 적용이었다.
1927. 3
은행에 예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리고 은행들이 문을 닫았다. 불황은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이어진다.

1927. 7. 24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를 애독하던 열여덟 살 고교생 쓰시마는 큰 충격을 받았다.

1928. 3. 15
일본공산당 관계자 등 약 1,600명이 한꺼번에 붙잡혔다. 그해 6월 치안유지법이 고쳐져 최고형이 사형이 되었다.
1930
스무 살의 쓰시마가 프랑스어를 모르는 채 불문과에 들어갔다. 그해 불문과에도 처음으로 프랑스어 시험이 생겼는데, 그는 시험장에서 손을 들어 사정을 이야기하고 입학을 허락받았다.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의 제자가 된다.
1933
단편 「열차」를 이 이름으로 발표했다. 본명 쓰시마를 쓰가루 사투리로 말하면 「치시마」처럼 들리는데, 다자이는 사투리로도 「다자이」로 들린다 — 스승 이부세가 기억하는 이유다. 같은 해 공산당 지도자 사노 마나부 등이 옥중에서 전향을 선언했다.
1935
다자이의 「역행」이 후보에 올랐다가 떨어졌다. 심사위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평에 다자이는 잡지에 공개 반박문을 썼다.
1936. 6
첫 책의 제목이 「만년」(晩年)이다.
1940
안정된 시기의 대표작. 같은 해 1월 발표한 글에서 다자이는 “그 시절의 일은 대여섯 해 지나 좀 더 차분해지면 천천히 써 볼 생각이다.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으로 할 생각이다”라고 적었다.
1945. 8
도쿄 대공습을 피해 처가가 있는 고후로, 다시 쓰가루의 생가로 피란해 있던 중에 전쟁이 끝났다.
1945. 10
점령군의 인권 지령으로 치안유지법과 특고가 폐지되고 정치범이 풀려났다. 공산당이 합법 정당이 되었다.
1946. 1
지쿠마 쇼보의 종합 잡지. 2년 뒤 『인간 실격』이 여기에 실린다.
1946. 10
정부가 지주의 소작지를 사들여 소작인에게 파는 법이 만들어졌다. 1950년까지 소작지가 경지의 약 46%에서 약 10%로 줄었다.
1947. 5. 3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을 내세운 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에 제도가 효력을 잃었다. 1948년 1월 새 민법이 자녀의 균등 상속을 정했다.
1947. 12
몰락한 귀족 집안을 그린 장편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사양족」(斜陽族)이 유행어가 되었다. 다자이는 전후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된다.
1948. 3 – 5
3월 아타미에서 쓰기 시작해 5월 사이타마현 오미야에서 마쳤다.
1948. 6. 13
도쿄 미타카의 다마강 상수에 몸을 던졌다. 서른여덟 살. 6월 19일, 그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에 발견되었다. 연재 마지막 회가 실린 잡지가 나오기 직전이었다.

1948. 7. 25
작가가 죽은 다음 달 지쿠마 쇼보에서 미완의 유작 「굿바이」와 함께 나왔다. 값은 130엔이었다.
1948. 8. 15
『인간 실격』이 나온 그해 여름, 서울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섰다.
1950
6·3·3·4 학제로 바뀌면서 구제 고등학교가 모두 새 대학에 흡수되었다. 히로사키 고등학교는 히로사키 대학이 되었다.
1998
B5 원고지 157장의 초고가 공개되었다. 낱말 하나하나를 몇 번씩 고친 흔적이 있었고, 수기의 1인칭을 私에서 自分으로 바꾼 것도 여기서 드러났다. 그해 말 다자이 작품의 일본 내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났다.
읽다 걸리는 낱말들. 위쪽 검색창에 넣어도 여기로 잡힌다.
지금은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원래 불교에서 온 말로 「사람이 사는 세상」(인간계)을 가리켰다. 에도 시대 무렵부터 그 세상에 사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08장.
자격을 잃음. 경기에서 반칙으로 탈락하거나 시험에서 자격 미달로 떨어질 때 쓰는 말이다. 누군가가 기준을 들고 판정하는 말이다.
자기가 겪은 일을 제 손으로 적은 글. 일기와 달리 나중에 돌아보며 정리해 쓴다.
책의 앞과 뒤에 붙는 짧은 글. 이 책에서는 이 두 글의 1인칭이 私(와타시)이고, 세 수기의 1인칭은 自分(지분)이다.
「자기 자신」. 1인칭으로 쓰면 자기를 대상처럼 멀찍이 가리키는 딱딱한 느낌이 난다. 세 수기의 1인칭이다.
익살, 광대짓. 남을 웃기려고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구는 것, 또는 그런 사람. 번역본에서는 「익살」, 「광대짓」, 「어릿광대」로 옮겨진다. 서양의 광대(클라운·피에로·궁정 광대)와 일본의 익살꾼(가부키의 익살 역, 연회의 호칸)을 두루 가리킨다. 광대는 「도케시」(道化師)다. 다자이는 1935년에 「도케의 꽃」(道化の華)이라는 단편을 썼다.
「다이코모치」(太鼓持ち)라고도 한다. 요정의 연회 자리에서 손님의 흥을 돋우고 비위를 맞추는 남자 익살꾼. 게이샤와 함께 불려 나왔다. 지금도 「다이코모치」는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로 쓰인다.
작가가 자기 삶을 거의 그대로 소재로 삼아 쓰는 일본 근대 소설의 한 흐름. 1907년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이 시작으로 꼽힌다.
패전 직후 기존 문단의 도덕과 권위를 거부한 작가들을 묶어 부른 말. 다자이,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이시카와 준 등. 뚜렷한 모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게사쿠파」라고도 한다.
아오모리현 서쪽, 혼슈 북쪽 끝의 지방. 눈이 많고 사과로 유명하다. 이 지방의 사투리는 도쿄 사람이 알아듣기 어렵다.
1898년부터 1947년까지 민법이 정한 가족 단위. 호주가 가족을 다스리고, 장남 한 사람이 재산과 지위를 물려받는다.
이에의 우두머리. 가족의 결혼과 거처에 동의할 권한이 있었다.
호주의 지위와 재산을 한 사람(원칙적으로 장남)이 통째로 물려받는 것. 둘째 이하의 아들은 받을 몫이 없거나 적었다.
이에에서 갈라져 나와 새 이에를 세우는 것. 본가의 호적에서 빠진다.
1873년 메이지 정부의 세제 개혁. 수확의 일부를 바치던 연공을 땅값에 매긴 현금 세금으로 바꿨다. 흉년에도 세금이 줄지 않아 땅을 잃는 농민이 늘었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고 그 대가(소작료)를 지주에게 내는 것. 전쟁 전에는 소작료를 쌀로 냈다. 패전 무렵 일본 경지의 46%가량이 소작지였다.
땅을 가지고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소작료를 받는 사람. 전쟁 전 일본 농촌의 권력은 큰 지주에게 있었다. 전후 농지개혁으로 무너진다.
각 부현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들끼리 뽑아 귀족원에 보내던 의원. 즉 그 현에서 손꼽히는 부자라는 뜻이다.
전쟁 전의 고등학교. 제국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3년제 예비 과정으로, 지금의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 교양 과정에 가깝다. 남자만 다녔고, 들어가면 엘리트로 대접받았다.
제1고등학교(도쿄)부터 제8고등학교까지, 번호가 붙은 오래된 관립 고등학교들. 줄여서 「이치코」(一高)처럼 부른다.
대학에 딸린 준비 과정. 1924년 세운 경성제국대학의 예과가 조선에서 일본의 구제 고등학교 자리를 맡았다(처음 2년, 1934년부터 3년).
일부러 낡은 옷차림과 거친 몸가짐을 내세우던 구제 고교생의 기풍. 서양식 멋쟁이를 뜻하는 「하이카라」(high collar)를 비튼 말이다.
남의 집 방을 빌려 먹고 자는 것. 고향을 떠나 공부하는 학생들이 흔히 했다.
구제 고등학교 학생들이 무리 지어 노래하고 소리치며 기숙사나 거리를 휩쓸던 풍습.
다이쇼·쇼와 초기 일본의 카페는 커피집이 아니라 여급이 손님 곁에 앉아 술 시중을 드는 곳에 가까웠다. 1911년 긴자의 카페 프랭탕이 시작이다.
카페에서 일하던 여성. 월급보다 손님이 주는 팁으로 살았다. 모던 도시의 새 직업으로 소설과 영화에 자주 나왔다.
1920년대 도쿄에서 서양식 옷차림과 단발로 거리를 걷던 젊은 여자와 남자. 「모던 걸」, 「모던 보이」의 줄임말이다.
도쿄의 번화가. 서양식 상점과 카페가 모인 모던 도쿄의 얼굴이었다.
도쿄 동쪽의 오래된 번화가. 절(센소지)과 극장, 활동사진관, 싸구려 술집이 뒤섞인 서민의 유흥지였다.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경비 조직.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유언비어 속에서 군·경찰과 함께 조선인 학살에 가담했다. 03장.
1925년 제정. 천황제(국체)와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처벌했다. 1928년 개정으로 최고형이 사형이 되었고, 1945년 10월 폐지되었다.
특별고등경찰. 사상과 정치 운동을 단속하던 경찰. 1911년 경시청에 처음 생겼다.
법이 금지한 활동. 전쟁 전 일본공산당은 존재 자체가 비합법이었다. 모임은 숨어서 열었다.
심퍼사이저(sympathizer)의 줄임말. 당원은 아니지만 운동에 공감해 돈을 내거나 숨을 곳을 빌려주는 사람.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상을 버린다고 선언하는 것. 1933년 공산당 지도자들의 옥중 전향 선언 뒤 대규모로 이어졌다. 전향하면 풀려나 복학·취직의 길이 열렸다.
패전 직후 배급이 모자라자 역 앞 공터마다 생긴 불법 시장. 신바시·신주쿠 등.
1946~50년 점령기의 개혁. 정부가 부재지주의 소작지 전부와 재촌지주의 1정보 초과분을 사들여 소작인에게 팔았다. 소작지가 약 46%에서 약 10%로 줄었다.
전후에 나돈 싸구려 밀주. 여기서 이름을 딴 조잡한 대중 잡지를 「카스토리 잡지」라 했다.
다자이의 『사양』(1947)에서 나온 유행어. 전후에 몰락한 상류층을 가리켰다.
지쿠마 쇼보가 1946년 1월 창간한 종합 잡지. 『인간 실격』이 1948년 6월호부터 8월호까지 세 번에 나뉘어 실렸다.
다자이의 기일 행사. 시신이 발견된 6월 19일, 미타카의 절 젠린지에서 열린다. 죽기 직전에 쓴 단편 「앵두」에서 이름을 땄다.
11~12세기 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4행시 모음. 삶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술을 권한다. 19세기 영어 번역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사실은 기억이 아니라 문헌에서 확인해 적었다.
지도는 Natural Earth(퍼블릭 도메인)의 경계 데이터로 직접 그렸다.
사진과 그림은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받았고 전부 퍼블릭 도메인이거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다. 원본 파일명은 build/data/ningen/manifest.py에 그대로 적어 두었다.
太宰治『人間失格』, 筑摩書房, 1948. 한국어판 『인간 실격』, 김춘미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이 페이지의 색은 이 판의 표지에서 뽑았다.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 위해 만든 배경자료다. 스포일러를 넣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원칙이다. 이 책에서 특히 조심한 것은 작가의 약력이 곧 줄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작가의 삶 가운데 소설과 겹치는 사건은 적지 않았다. 시대 배경도 무엇이었나까지만 적고, 소설에서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적지 않았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원작은 일본에서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났다. 영화와 만화는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