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 7. 5
알제가 함락되다
28년 묵은 곡물 대금 다툼과 1827년 데이가 프랑스 영사를 파리채로 친 사건이 구실이었다. 인기를 잃은 국왕 샤를 10세는 바다 건너의 승리가 필요했다. 6월 14일 알제 서쪽 시디페뤼슈 해안에 프랑스군 3만 7천여 명이 상륙했고, 3주 만에 알제의 통치자(데이)가 항복했다. 몇 주 뒤 샤를 10세는 7월 혁명으로 쫓겨났다. 알제리 전역을 「평정」하는 데는 그 뒤로 수십 년이 더 걸렸다.

1930년대 · 프랑스령 알제리 · 알제
소설의 무대는 북아프리카의 항구 도시 알제다. 그때 알제리는 법으로 프랑스의 일부였다. 한 도시에 프랑스 시민과, 프랑스 국민이지만 시민은 아닌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이 페이지는 그 배경 — 역사, 제도, 지리, 원어의 결 — 만 모았다. 줄거리·결말은 없다.
이 소설을 따라가는 데 필요한 배경을 여섯 가지로 추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각 장에 있다.
1848년 프랑스 제2공화국은 알제리를 프랑스 영토로 선언하고 북부를 본토와 같은 도 셋으로 나눴다. 이주민들이 파리 의회에 의원을 보내고 군대가 아닌 민간 행정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헌법은 알제리를 「특별법으로 다스린다」고 적었다. 그 틈으로 무슬림 주민은 프랑스 국민이되 시민이 아닌 신분으로 남았다. 시민이 되려면 이슬람법에 따른 혼인·상속을 버려야 했다.
한국어 번역의 「아랍인」은 민족 이름처럼 읽힌다. 식민지 알제리의 유럽계는 무슬림 원주민을 흔히 「아랍인」이라 불렀다. 공문서의 이름은 「무슬림 원주민」(indigènes musulmans)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베르베르어를 쓰는 카빌리 사람들처럼 아랍계가 아닌 사람도 많았지만, 법적으로는 모두 같은 「원주민」이었다.
1881년 알제리의 유럽계 가운데 프랑스 국적은 절반을 조금 넘었다. 나머지는 스페인·이탈리아·몰타 사람이었다. 고향이 가난했고 알제리가 가까웠으며 프랑스가 땅을 나눠 주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프랑스인보다 많아질까 걱정한 프랑스는 1889년 알제리에서 태어난 외국인 자녀를 자동으로 프랑스인으로 만들었다.
알제는 마르세유에서 바다 위 직선으로 약 750km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직선 약 320km)의 두 배 남짓이다. 1935년 취항한 여객선은 이 길을 20시간이 안 되게 건넜다. 프랑스 본토는 멀지 않았지만 알제의 유럽계 대부분은 거기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프랑스어에는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 둘이다. maman(마망)은 아이도 어른도 식구끼리 쓰는 「엄마」, mère(메르)는 서류와 격식의 「어머니」다. 소설 첫 문단에는 둘이 다 나온다. 한국어판이 이 둘을 어떻게 옮겼는지 보면 원문의 구별이 보인다.
프랑스어에는 과거형이 둘이다. 글로 쓰는 이야기에 남은 단순과거와, 사람들이 말할 때 쓰는 복합과거다. 19세기까지 소설의 서술은 대개 단순과거였다. 이 소설의 첫 문단은 복합과거로 쓰였다. 한국어에는 이 구분이 없어서 번역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1930년대는 한반도도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래서 「식민지 알제리」를 조선과 같은 모양으로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둘은 구조가 달랐다. 조선은 일본 본토의 현(縣)이 아니라 조선총독이 따로 다스린 땅이었다. 알제리 북부는 법으로 프랑스 본토와 같은 도였고, 거기 사는 유럽계는 파리 의회에 의원을 보냈다.
사는 사람의 비율도 달랐다. 1939년 조선에 산 일본인은 약 65만 명, 인구의 3% 안팎이었다. 1936년 알제리의 유럽계는 약 95만 명, 인구의 13%였다. 알제의 유럽계는 잠시 머무는 관리나 상인이 아니라 대를 이어 그 땅에서 태어난 주민이 많았다. 다만 겹치는 점도 있다. 조선인이 일본 제국의 신민이면서 조선 안에서 제국의회 선거권이 없었듯, 알제리 무슬림도 프랑스 국민이면서 시민의 권리가 없었다.
왼쪽 목차에서 한 장(章)씩 골라 본다 — 한 번에 한 주제만 뜬다. 처음부터 다 읽을 필요는 없고, 장마다 맨 위의 요약 상자만 읽어도 된다. 책을 읽다 걸리는 것이 생기면 그때 해당 장을 펴 보면 된다. 01장(신분)과 03장(알제)을 먼저 보기를 권한다.
검색창에 낱말을 넣으면 페이지 전체에서 그 대목만 뽑아 준다. “마망”, “원주민법”, “피에누아르” 같은 말이 걸렸을 때 쓰면 된다.
스포일러는 없다. 이 책은 얇고 사건이 적어서 사건 하나만 말해도 줄거리의 큰 몫이 새어 나간다. 그래서 소설 안의 이야기는 첫 장의 첫 두 문단까지만 다룬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영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식민지이면서 법으로는 프랑스의 일부. 같은 길을 걷는 이웃이 법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었다.
시작은 빚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 알제의 통치자(데이)는 프랑스에 곡물을 외상으로 팔았다. 1827년까지 28년 동안 그 값이 치러지지 않았다. 그해 데이 후세인이 빚 이야기를 하다 프랑스 영사를 파리채로 쳤다. 프랑스는 이것을 모욕으로 삼아 알제 항을 봉쇄했다. 봉쇄는 3년 가까이 이어졌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 무렵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는 나라 안에서 인기를 잃고 있었다. 바다 건너의 승리로 위신을 세우려 했다. 1830년 6월 14일 3만 7천여 명의 원정군이 알제 서쪽 시디페뤼슈 해안에 상륙했고, 7월 5일 알제가 항복했다. 그러나 몇 주 뒤 파리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 샤를 10세는 왕좌에서 쫓겨났다. 알제리 전체를 「평정」하는 데는 그 뒤로 수십 년이 더 걸렸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선 프랑스 제2공화국은 남자 보통선거를 되살리고, 식민지도 파리 의회에 대표를 보내게 했다. 알제리는 그해 12월 알제·오랑·콘스탄틴 세 도로 나뉘었다. 이주민들은 군대의 통치 대신 본토와 같은 민간 행정을 받고 의원을 뽑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 대부분은, 좌파까지도, 알제리를 그냥 「프랑스」로 여겼다.
그런데 같은 해 헌법 109조는 알제리를 「프랑스 영토」로 선언하면서 「헌법이 적용될 때까지 특별법으로 다스린다」고 덧붙였다. 투표권은 이주민에게만 돌아갔다. 사하라 쪽 남부는 도로 만들지 않고 군대가 따로 다스렸다.
| 사람들 | 법적 신분 | 근거 | 무엇이 달랐나 |
|---|---|---|---|
| 유럽계 이주민 콜롱 · 알제리인 · 훗날 피에누아르 | 프랑스 시민 | 1848년 헌법 · 1889년 국적법 | 투표하고 의원을 뽑았다.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몰타 등 출신이 섞였다. 1880년대에는 유럽계의 거의 절반이 외국 국적이었는데, 1889년 국적법 뒤로 그 비율이 줄었다. |
| 알제리 유대인 이스라엘리트 · 유대인 | 프랑스 시민(1870년부터) | 크레미외 법령(1870) | 한 번에 시민이 되었다. 비시 정부가 1940년대 초 이 시민권을 빼앗았다가 1943년 돌려주었다. |
| 무슬림 주민 아랍인 · 앵디젠(원주민) · 무슬림 | 프랑스 국민이지만 시민은 아님 | 1865년 세나튀스콩쉴트 · 원주민법(1881–1944) | 시민이 되려면 이슬람법에 따른 개인 신분을 버려야 했다. 행정관이 재판 없이 벌금을 매길 수 있었고, 세금은 더 냈다. 1944·1946년에야 시민권이 넓어졌지만 선거인 명부는 따로 두었다. |
1865년 나폴레옹 3세 시대의 법(세나튀스콩쉴트)은 알제리의 무슬림과 유대인을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했다. 동시에 그들은 종교법에 따른 개인 신분 — 혼인·이혼·상속을 이슬람법이나 유대법으로 정하는 것 — 아래 남는다고 했다. 시민이 되려면 신청해서 그 신분을 버리고 프랑스 민법을 받아들여야 했다. 프랑스 민법은 일부다처, 남편의 일방적인 이혼, 아들에게 더 많이 주는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무슬림은 신앙과 종교 법정을 버리는 일로 여겨 신청하지 않았다. 1865년부터 1915년까지 시민권을 얻은 무슬림은 2,396명이었다.
1870년 10월 법무장관 아돌프 크레미외의 법령은 알제리 유대인 약 3만 5천 명을 한꺼번에 시민으로 만들었다. 알제리 유대인 공동체는 오래전부터 시민권을 청원해 왔고(1865년 서명 1만 명), 크레미외 자신이 유대인 단체를 이끈 인물이었다. 식민 당국도 수가 적고 땅이 없는 유대인을 시민으로 묶는 편이 다스리기 쉽다고 보았다. 무슬림은 빠졌다. 이 법령은 1940년 비시 정부가 폐지했다가 1943년 되살아났다.
정복 때부터 프랑스군은 점령한 땅에서 원주민을 다스리는 처벌 규정을 그때그때 만들어 썼다. 1871년 알제리 동부에서 큰 봉기(모크라니의 난)가 일어났고, 진압 뒤 알제리는 군대 대신 민간 관리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 규정들을 민간 행정관이 쓸 수 있게 묶은 것이 1881년 6월 법의 원주민법(Code de l'indigénat)이다. 역사학자 다니엘 리베는 이것을 「원주민 봉기에 대한 두려움을 담은, 그때그때의 문서를 이어 붙인 것」이라 불렀다. 「허가 없이 마을을 떠나는 것」, 「관리에게 무례한 말」, 「허가 없는 모임」 같은 것이 무슬림 주민에게만 죄가 되었다. 행정관이 재판 없이 벌금·구금·재산 몰수를 내렸고, 마을 전체에 벌을 주기도 했다. 이 규정은 1944년 3월 7일에야 폐지되었다.
세금도 기울어 있었다. 1909년 무슬림은 인구의 90% 가까이였고 알제리 소득의 20%를 벌었는데, 직접세는 70%를 냈다.
1936년 레옹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는 전 알제리 총독 모리스 비올레트와 함께 개혁안을 냈다. 장교와 훈장 받은 병사, 학위 소지자, 지방 의원 같은 무슬림 2만~2만 5천 명에게 개인 신분을 버리지 않고도 투표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알제리의 시장 300여 명이 모여 만장일치로 반대했다. 무슬림 의원이 생기면 「프랑스의 주권이 위험해진다」는 이유였고, 일부 마을에서는 유럽계가 선거에서 소수가 될까 두려워했다. 안은 의회에서 한 번도 다뤄지지 못한 채 1938년 접혔다.


공문서는 무슬림 주민을 「무슬림 원주민」(indigènes musulmans), 줄여서 앵디젠(indigène, 원주민)이라 불렀다. 유럽계의 일상어로는 흔히 「아랍인」(Arabe)이었다. 그러나 무슬림 원주민 가운데에는 산악 지대 카빌리 사람들처럼 베르베르어를 쓰는, 아랍계가 아닌 사람도 많았다. 법적으로는 아랍어를 쓰든 베르베르어를 쓰든 모두 같은 「원주민」이었다. 「카빌」이라는 이름 자체도 아랍어 「부족」에서 온 것을 식민 당국이 굳힌 말이다.
1944년 원주민법이 폐지되고 무슬림 약 6만 5천 명이 투표권을 얻었다. 1945년 5월 세티프와 겔마에서 시위 뒤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1954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고 1962년 7월 5일 알제리가 독립했다. 모두 이 소설이 나온 1942년 뒤의 일이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유럽계 사람들. 프랑스 본토 사람과도, 알제리 무슬림과도 다른 세계였다.
1830년 정복 직후부터 지중해 곳곳에서 사람들이 건너왔다. 가장 먼저 온 무리 가운데 하나가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 특히 메노르카섬의 마온 사람들이었다. 프랑스 원정군의 후방 부대가 마온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섬은 가난했고, 알제는 배로 가까웠다.
그 뒤로 이유가 여럿 겹쳤다. 몰타와 스페인 남부, 이탈리아 남부의 가난한 농민과 어부는 일자리를 찾아왔다. 스페인 사람은 특히 바다 건너 가까운 오랑 지방에 많았다. 프랑스 정부는 정착민을 늘리려고 원주민에게서 거둔 땅을 나눠 주었다. 1848년에는 파리의 실업 노동자들이, 1871년 이후에는 독일에 넘어간 알자스·로렌의 피란민이 왔다. 1870년대부터 필록세라(포도나무 뿌리를 갉는 진딧물)가 남프랑스 랑그도크의 포도밭을 쓸어버리자 포도 재배자들이 알제리로 건너가 포도밭을 새로 일궜다.
| 국적 | 사람 수 |
|---|---|
| 프랑스 | 195,418 |
| 스페인 | 114,320 |
| 이탈리아 | 33,693 |
| 몰타 | 15,402 |
| 그 밖 | 26,529 |
1886년 알제리 유럽계의 49%가 외국 국적이었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땅」에 프랑스 사람보다 외국인이 많아질까 걱정했다. 그래서 1889년 6월 26일 국적법은 프랑스 땅에서 태어난 외국인의 자녀를 프랑스인으로 삼는 출생지주의를 알제리 유럽계에 적용했다. 30년이 안 되어 약 15만 명이 새로 프랑스인이 되었다. 스페인·이탈리아 이름을 가진 「프랑스인」이 흔해진 이유다. 같은 출생지주의가 알제리 무슬림에게는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 그들은 이미 「국민」이었고, 시민권의 조건은 개인 신분이었기 때문이다(01장).
유럽계 주민은 대부분 해안 도시에 살았다. 알제와 오랑은 오랫동안 유럽계가 다수인 도시였다. 1960년 마지막 인구조사에서 비무슬림 주민은 105만, 전체의 약 10%였다. 1962년 독립 무렵 약 80만 명이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들 대부분은 프랑스 「본토」에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알제리 유럽계의 입말. 프랑스어 바탕에 스페인어·카탈루냐어·이탈리아어·아랍어가 섞였다. 여러 나라에서 온 이웃이 한 동네에서 섞여 살았기 때문이다. 음식 이름이나 욕 가운데 스페인어가 그대로 들어온 것이 많다.
가스파초와 파에야, 양 통구이 메슈이, 꼬치구이.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음식에 아랍과 유대 음식이 섞였다. 알제리산 포도주가 곁들여졌다.
알제는 노동자가 많아 전통적으로 왼쪽으로 기운 도시였다. 동시에 1930년대에는 반유대주의 극우가 특히 오랑 지방에서 세를 넓혔다. 크레미외 법령으로 시민이 된 유대인을 향한 반감이 그 바탕이었다.
「검은 발」이 어디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증기선의 석탄 창고에서 맨발로 일하던 알제리 화부(火夫)들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확실한 것은 이 말이 1955년 무렵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설이 쓰인 1940년 전후에는 아직 흔한 말이 아니었다.
소설의 무대가 지도에서 어디인지. 넓은 지도에서 시작해 알제 일대로 내려간다.
1830년 프랑스군이 들어왔을 때 알제는 인구 3만 남짓의 성곽 도시였다. 1848년 알제 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프랑스와 지중해 각지에서 이주민이 몰려왔다. 식민 당국은 파리의 대로를 본뜬 거리와 석조 건물을 지었다. 이주민에게 「여기도 프랑스」라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1903년 무렵부터는 이슬람 건축을 흉내 낸 「신무어 양식」으로 중앙우체국 같은 공공건물을 올렸다.
1892년 알제 전차 회사가 생겼다(알제의 옛 전차는 1959년에 사라졌다). 1930년 정복 100주년을 앞두고는 도시를 꾸미는 공사가 한꺼번에 벌어져 박물관들이 새로 섰다. 식민 지배의 「성공」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1926년 26만 4천이던 인구는 1954년 36만 5천이 되었고, 그 가운데 비무슬림이 약 19만 3천 명이었다.


오스만 시대의 성채와 그 아래 산비탈을 덮은 흰 집들. 계단 골목이 미로처럼 엉킨다. 식민 시절 무슬림 주민이 모여 살았다. 새 유럽식 시가지가 그 아래 평지와 바닷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강의 문」.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스페인인 등 유럽계 서민의 동네. 알제리 유럽계의 입말 「파타웨트」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노동자와 서민의 동네. 작가 카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32헥타르의 식물원 「시험 정원」이 이 동네에 있다. 지금 이름은 벨루이즈다드.





소설 첫 장 둘째 문단은 요양원이 “알제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마렝고”에 있다고 적는다. 마렝고는 실제 마을이다. 알제 서남쪽 미티자 평원의 서쪽 끝, 셰르셸에서 내륙으로 들어간 자리다.
이 마을이 생긴 이유는 1848년 파리에 있다. 그해 6월 파리 노동자들의 봉기가 진압된 뒤, 정부는 일자리 없는 노동자들을 치안의 위험으로 여겼다. 9월 19일 의회는 5천만 프랑을 들여 알제리에 「농업 식민촌」(colonies agricoles)을 세우기로 했다. 이주자에게는 2~12헥타르의 땅을 거저 주었다. 42곳이 세워졌고 마렝고가 그 하나다. 그해 12월 파리의 노동자·수공업자 가족을 중심으로 한 수백 명이 마을을 열었다.
이름은 나폴레옹 전쟁에 나갔고 알제리 정복에도 참가해 「마렝고 대령」으로 불린 군인에게서 따왔다. 1926년 인구는 5,217명이었고 그 가운데 유럽계가 1,200명이었다. 알제리가 독립한 뒤 이 고장의 옛 부족 이름을 따 아주트(Hadjout)로 바뀌었다.


지중해성 기후의 항구 도시. 숫자와 바람, 그리고 바닷가의 로마 유적.
지중해성 기후는 여름에 아열대 고기압이 머물러 비구름이 들어오지 못하고, 겨울에 그 고기압이 남쪽으로 물러나 비가 오는 기후다. 그래서 알제의 여름은 해가 길고 마른다. 알제 공항의 1991~2020년 평균으로 7월 낮 최고기온은 32.1°C, 8월은 32.9°C다. 7월 강수량은 1.5mm, 6월 8.6mm, 8월 10.6mm다. 한 해 일조 시간은 약 2,780시간이다. 1930년대의 관측값은 이 페이지가 확인하지 못했다.
한국과 견주면 낮 기온은 서울의 한여름(8월 낮 최고 평균 30°C 안팎)보다 조금 높은 정도다. 크게 다른 것은 비다. 서울은 7~8월에 한 해 비의 절반 남짓이 내리는데, 알제는 그 두 달이 가장 마른다.
시로코는 사하라나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지중해 쪽으로 불어오는 뜨겁고 마른 바람이다. 지중해를 동쪽으로 지나가는 저기압이 남쪽의 사막 공기를 북쪽으로 끌어올리면서 생긴다. 봄과 가을에 가장 잦고, 시속 100km에 이르기도 한다. 북아프리카 해안에는 모래 먼지가 섞인 덥고 마른 날씨를 가져온다. 이름은 아랍어 「동쪽」(샤르크)에서 왔다.


알제리 해안에는 로마 유적이 흔하다. 기원후 1세기부터 이 해안이 로마 제국의 속주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였기 때문이다. 티파사는 원래 카르타고 사람들(페니키아계)의 작은 교역항이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마우레타니아 정복의 거점으로 삼으면서 로마 도시가 되었다. 속주의 수도 카이사레아(지금의 셰르셸)에서 동쪽으로 약 20km다. 198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원제는 L'Étranger. 프랑스어 한 낱말에 뜻이 둘 겹쳐 있어서 번역 제목이 나라마다 갈렸다.
외국인, 낯선 사람, 남. 「나라 밖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한 낱말이 다 품는다.
낯선 사람. 1946년 번역자 스튜어트 길버트가 붙인 제목을 미국 출판사 크노프가 그대로 썼다.
바깥에 있는 사람, 국외자. 영국 출판사가 “더 눈에 띄고 알맞다”며 바꿨다. 폴란드 소설의 영어판이 막 The Stranger로 나와 있기도 했다.
낯선 사람, 이방인.
바깥에 선 사람. 영국판과 같은 쪽을 골랐다.
이호진. 다른 나라 사람.
한자로 異邦人. 일본어판과 같은 글자다.
앞의 두 장과 이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étranger는 법률 용어로 쓰였다. 1889년 국적법 전까지 알제리 유럽계의 거의 절반이 스페인·이탈리아·몰타 국적의 étrangers(외국인)였다(02장). 무슬림 주민은 프랑스 「국민」이라 법으로는 étranger가 아니었다(01장).
영어판 제목이 갈린 것은 출판 사정 때문이다. 1946년 스튜어트 길버트의 번역을 영국 출판사 해미시 해밀턴이 내면서, 막 영어로 The Stranger라는 제목의 다른 소설이 나와 있던 데다 「더 눈에 띄고 알맞다」며 The Outsider로 바꿨다. 미국 출판사 크노프는 The Stranger를 그대로 썼다.
번역으로는 잘 안 보이는 원어의 사실만 모았다. 첫 문단 안에서 어머니를 부르는 말이 바뀌고, 동사는 말의 과거로 쓰였다.
«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J'ai reçu un télégramme de l'asile : “Mère décédée. Enterrement demain. Sentiments distingués.” Cela ne veut rien dire. C'était peut-être hier.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요양원에서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 경구.’ 이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 이 페이지의 직역
「엄마」. 아이가 부르는 말이고, 프랑스에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식구끼리 이렇게 부른다. 남에게 자기 어머니를 말할 때는 보통 ma mère(내 어머니)라고 한다.
「어머니」(mère)에 「사망한」(décédée). décédé는 일상의 「죽은」(mort)이 아니라 관청과 서류의 말이다. 전보는 보내는 사람이 낱말 수대로 요금을 냈기 때문에 동사도 관사도 빼고 썼다.
「각별한 경의를」. 프랑스어 격식 편지 끝에 붙는 정해진 인사말 Veuillez agréer… mes sentiments distingués를 줄인 것이다. 관청이나 회사의 편지에 기계적으로 붙는다. 한국어 공문의 「끝.」이나 「경구(敬具)」에 가깝다.
「요양원」의 원어는 asile de vieillards, 「노인 수용소」다. asile은 「보호소·피난처」라는 뜻이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이 말은 가족이 돌볼 수 없는 가난한 노인을 거두는 구빈 시설을 가리켰다. 지금의 요양 시설보다 자선과 공공 구호의 느낌이 짙다.
프랑스어에는 과거형이 둘 있다. 단순과거(passé simple)는 동사 한 낱말로 된 과거다(il mourut, 그는 죽었다). 말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글로 쓰는 이야기에 남았다. 19세기 소설의 서술은 대개 이 시제였다. 복합과거(passé composé)는 「조동사 + 과거분사」로 된 과거다(il est mort). 원래는 지금과 이어진 과거(「~해 버렸다」)였는데, 말에서 단순과거를 밀어내고 보통의 과거가 되었다.
이 소설의 첫 문단은 “maman est morte”(엄마가 죽었다), “j'ai reçu un télégramme”(전보를 받았다)처럼 복합과거로 쓰였다. 한국어에는 이 구분이 없다. 「죽었다」 한 가지로 옮길 수밖에 없어서 번역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영어 번역은 첫 문장을 “Mother died today”나 “Maman died today”로 옮겨 왔다. 2012년 번역 연구자 라이언 블룸은 원문의 낱말 순서대로 “Today, Maman died”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어판(구보타 게이사쿠 옮김)의 첫 문장 「きょう、ママンが死んだ。」도 maman을 번역하지 않고 「마망」이라는 소리 그대로 옮긴 것으로 유명하다.
가지고 있는 한국어판이 maman과 mère를 다른 말로 옮겼는지 펼쳐 보면 원문의 구별이 살아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페이지는 한국어판 실물을 대조하지 못했다.
1913–1960. 알제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라 마흔넷에 노벨상을 받았다.



1913년 알제리 동부 몽도비의 포도 농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포도주 창고 일꾼이었다. 1914년 전쟁이 나자 알제리 보병 연대로 동원되었고, 그해 10월 포탄 파편에 머리를 다쳐 프랑스의 병원에서 죽었다. 카뮈에게 아버지는 사진 몇 장과 엽서 두 장으로만 남았다.
어머니는 스페인 메노르카섬 출신 집안의 딸이었다. 귀가 반쯤 먹었고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상대의 입술을 읽어 말을 알아들었고, 쓰는 낱말은 400개 남짓이었다. 가족은 알제의 노동자 동네 벨쿠르에서 엄한 외할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았다.
초등학교 교사 루이 제르맹이 이 아이를 알아봤다. 할머니는 손자가 얼른 돈을 벌기를 바랐지만, 제르맹은 방과 후에 무료로 따로 가르쳐 1924년 장학생 시험에 붙였다. 명문 리세에 들어간 카뮈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그전에는 모두가 나 같았고 가난은 이 세상의 공기 같았다. 리세에서 나는 비교를 알게 되었다.”


“내가 도덕에 대해 아는 것은 전부 축구에서 배웠다.” 열일곱에 결핵이 오면서 그만두었다.
피를 토하고 진단을 받았다. 전염병이라 집을 나와 정육점을 하던 삼촌 집에서 지냈다. 카뮈는 그 삼촌을 “아버지가 어떤 것일지 조금이나마 상상하게 해 준 유일한 사람”이라 불렀다.
철학 교사 장 그르니에를 만나 글쓰기를 시작했다. 알제 대학에서 플로티노스로 학위를 받았다. 병 때문에 교수 자격시험을 볼 수 없어 학자의 길은 막혔다.
노동자 극단을 꾸렸고, 좌파 신문 『알제 레퓌블리캥』 기자로 산악 지대 카빌리의 굶주림을 고발하는 기사 11편을 썼다.
1937년 알제의 작은 출판사 샤를로에서 첫 에세이집 『안과 겉』을, 1938~39년 『결혼』(Noces)을 냈다. 『결혼』은 티파사·제밀라의 로마 유적, 알제의 여름, 토스카나 여행을 쓴 네 편의 짧은 에세이다. 티파사 유적에는 지금 그 책의 한 구절을 새긴 비석이 서 있다.

1940년 신문이 금지되자 파리로 갔다. 전쟁 중 레지스탕스 지하신문 『콩바』의 편집을 맡았고, 해방 뒤에는 거의 매일 사설을 썼다.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이틀 뒤 이를 규탄한 서방 지식인은 드물었는데 카뮈가 그중 하나였다.
1947년 『페스트』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1년 『반항하는 인간』으로 소련식 공산주의를 비판하면서 사르트르와 결별했다. 1957년 마흔넷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역대 두 번째로 젊은 수상자였고,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첫 문학상 수상자였다. 소식을 듣고 옛 스승 제르맹에게 편지를 썼다.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니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선생님이었습니다.”
1960년 1월 4일, 남프랑스 루르마랭의 집에서 파리로 돌아가던 차가 빌블르뱅 근처에서 플라타너스를 들이받았다. 마흔여섯이었다. 차 안에서 어린 시절을 쓴 미완성 원고 『최초의 인간』이 나왔다.
카뮈는 1930년대부터 기자로서 식민 당국의 가혹함과 카빌리의 굶주림을 고발했다. 그러나 알제리의 독립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1954년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유럽계와 무슬림이 함께 사는 알제리를 주장하며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고, 그 입장은 대부분의 진영에게 거부당했다.


「말이 안 된다」는 뜻의 일상어가 아니다. 카뮈는 이 말로 사람과 세계의 관계를 가리켰다.
『이방인』과 같은 해에 나온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이렇게 쓴다. “부조리한 것은 이 비합리적인 세계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명료함을 향한 절박한 열망이 마주하는 것이다.” 사람은 의미를 원하고, 세계는 “비합리적인 침묵”으로 답한다. 카뮈는 그 어긋남을 부조리라 불렀다.
에세이의 마지막 장은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로 끝난다. 신들을 속인 벌로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고, 꼭대기에 닿을 즈음 바위가 굴러떨어지면 다시 내려가 밀어 올리기를 영원히 되풀이하는 사람이다. 카뮈의 결론은 이렇다.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 한다.”


| 연작 | 소설 | 에세이 | 희곡 |
|---|---|---|---|
| 부조리 | 『이방인』(1942) | 『시지프 신화』(1942) | 『칼리굴라』·『오해』 |
| 반항 | 『페스트』(1947) | 『반항하는 인간』(1951) | 『정의의 사람들』 |
| 사랑 | — (계획만) | — |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를 주제로 구상 |
카뮈는 전후 파리에서 늘 사르트르와 함께 「실존주의자」로 묶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 그 이름을 거부했다. 자기 생각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와 니체, 17세기 모럴리스트에 있다고 말했고, 『시지프 신화』 자체가 실존주의 여러 갈래에 대한 비판이라고 했다.
이 소설은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에서 나왔다. 작가는 그때 바다 건너 알제리에서 결핵을 앓고 있었다.
카뮈는 1941년 5월 원고를 마쳤다. 당시 갈리마르의 원고 검토자였던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꼼꼼하고 호의적인 독자가 되어 출간을 권했다. 말로의 의견은 친구 파스칼 피아를 거쳐 카뮈에게 전해졌다. 말로는 「주어, 동사, 보어, 마침표」로 된 문장을 너무 많이 쓴다고 지적했고, 카뮈는 「희화화를 피하려고」 그 대목들을 고쳤다. 편집자 장 폴랑과 크노도 원고를 읽었다. 독일군 장교이자 검열국에서 일하던 번역가 게르하르트 헬러도 출간을 돕겠다고 나섰다.
초판은 4,400부뿐이어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는 부수였다. 출판사는 판매 전략으로 속표지와 뒤표지에 판을 여러 번 찍은 것처럼 보이는 표시를 달았다. 카뮈는 오랑에서 결핵이 도져 파리로 갈 수 없었다. 기자들에게 책을 돌리는 관례도, 첫 서평을 읽는 일도, 서점에 깔리는 모습을 보는 일도 못 했다. 보내 준 스무 권은 끝내 오지 않았고, 6월 17일에야 겨우 한 권을 받았다.
그해 7월 결핵이 양쪽 폐로 번졌다는 진단을 받고 프랑스 중남부 산골 르 파늘리에로 요양을 떠났다. 11월 8일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횃불 작전) 독일군이 프랑스 남부까지 점령했고, 지중해 뱃길이 끊겨 알제리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 그 산골에서 그는 다음 소설 『페스트』를 쓰기 시작했다.
『이방인』은 그 뒤 갈리마르에서 『어린 왕자』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되었다. 68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프랑스어 소설로 『어린 왕자』와 『해저 2만 리』 다음에 꼽힌다. 1999년 르몽드가 뽑은 「20세기의 책 100」에서 1위였다.
프랑스령 알제리의 132년과 작가의 삶.
1830. 7. 5
28년 묵은 곡물 대금 다툼과 1827년 데이가 프랑스 영사를 파리채로 친 사건이 구실이었다. 인기를 잃은 국왕 샤를 10세는 바다 건너의 승리가 필요했다. 6월 14일 알제 서쪽 시디페뤼슈 해안에 프랑스군 3만 7천여 명이 상륙했고, 3주 만에 알제의 통치자(데이)가 항복했다. 몇 주 뒤 샤를 10세는 7월 혁명으로 쫓겨났다. 알제리 전역을 「평정」하는 데는 그 뒤로 수십 년이 더 걸렸다.

1848
제2공화국 헌법이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의 일부로 선언했다. 알제·오랑·콘스탄틴 세 곳이 본토와 같은 도(데파르트망)가 되었다. 이주민은 파리 의회에 의원을 보냈다. 같은 해 파리의 실업 노동자를 보내려는 「농업 식민촌」 42곳이 결정되었고, 알제 서남쪽 평원의 마렝고가 그 하나다.
1865
원주민도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하되, 프랑스 시민이 되려면 무슬림으로서의 개인 신분(혼인·상속을 이슬람법에 따르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법이 나왔다. 일부다처·일방 이혼·상속이 프랑스 민법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신청하지 않았다. 1915년까지 시민권을 얻은 무슬림은 2,396명이었다.
1870. 10. 24
법무장관 아돌프 크레미외의 법령으로 알제리의 유대인 약 3만 5천 명이 한꺼번에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 유대인 공동체가 오래 청원해 온 일이었다. 무슬림은 여기서 빠졌다.

1881
1871년 봉기 뒤 민간 행정으로 넘어가면서, 행정관이 재판 없이 무슬림 주민에게 벌금과 처벌을 내릴 수 있게 한 규정들이 법으로 묶였다. 흔히 「앵디제나」(원주민법)라 부른다. 1944년에야 폐지된다.
1889. 6. 26
프랑스 땅에서 태어난 외국인의 자녀를 프랑스인으로 삼는 법이 나왔다. 1886년 알제리 유럽계의 49%가 스페인·이탈리아·몰타 등 외국 국적이라, 외국인이 프랑스인보다 많아질까 걱정해서였다. 30년이 안 되어 약 15만 명이 새로 프랑스인이 되었다.
1913. 11. 7
알제리 동쪽 해안, 본(지금의 안나바) 근처 몽도비의 포도 농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포도주 창고 일꾼, 어머니는 스페인 메노르카섬 출신 집안의 딸이었다.

1914. 10. 11
제1차 세계대전에 알제리 보병(주아브) 연대로 동원된 아버지가 포탄 파편에 머리를 다쳐 프랑스 생브리외의 병원에서 죽었다. 카뮈는 돌도 지나지 않았다. 남은 식구는 알제의 가난한 동네 벨쿠르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1924
초등학교 교사 루이 제르맹이 무료로 따로 가르쳐 카뮈를 알제의 명문 고등학교(리세) 장학생으로 붙였다. 할머니는 손자가 얼른 돈을 벌기를 바랐다.

1928 – 1930
알제 대학 스포츠 클럽 RUA의 청소년 팀 골키퍼로 뛰었다. “내가 도덕에 대해 아는 것은 전부 축구에서 배웠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1930
1월부터 6월까지 알제리 정복 10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 그해 12월, 열일곱 살 카뮈가 피를 토하고 결핵 진단을 받았다. 축구의 꿈은 여기서 끝났다.

1933 – 1936
철학 교사였던 장 그르니에의 영향으로 철학을 공부했다. 1936년 플로티노스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마쳤다.

1936
인민전선 정부가 무슬림 2만~2만 5천 명에게 개인 신분을 버리지 않고도 투표권을 주자는 안을 냈다. 알제리 시장 300여 명이 만장일치로 반대했고, 안은 의회에서 다뤄지지도 못한 채 1938년 접혔다.
1937 – 1939
알제의 작은 서점 겸 출판사 샤를로에서 에세이집 『안과 겉』(1937)과 『결혼』(1938–39)을 냈다. 『결혼』은 알제의 여름과 티파사의 로마 유적, 바다와 햇빛을 노래한 책이다.

1939. 6
좌파 신문 『알제 레퓌블리캥』 기자로 산악 지대 카빌리를 돌며 굶주림을 고발하는 기사 11편을 썼다. 스물여섯 살이었다.
1940
신문이 금지되자 파리로 가서 『파리수아르』의 편집 일을 했다. 독일군이 파리로 다가오자 피란했고, 그해 프랑신 포르와 결혼했다. 이듬해 둘은 알제리의 오랑으로 돌아갔고 카뮈는 학교에서 가르쳤다.
1941. 5
『이방인』 초고가 완성되었다. 앙드레 말로, 장 폴랑, 크노가 원고를 읽었고, 카뮈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 고쳤다.
1942. 6
5월 19일 갈리마르에서 인쇄를 마치고 6월부터 서점에 깔렸다. 값은 25프랑, 초판은 4,400부였다. 독일 선전부의 검열을 한 줄도 잘리지 않고 통과했다. 같은 해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도 나왔다.
1942. 여름
결핵이 양쪽 폐로 번졌다. 요양을 위해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 중남부 산골 르 샹봉쉬르리뇽 근처의 르 파늘리에로 갔다.
1942. 11. 8
미군과 영국군이 모로코·오랑·알제에 상륙했다. 알제리는 연합군 손에 들어갔다. 프랑스 산골에 있던 카뮈는 바다 건너 알제리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

1943 – 1944
파리로 돌아와 갈리마르의 원고 검토자로 일하며 레지스탕스 지하신문 『콩바』의 편집을 맡았다. 가짜 신분증을 들고 다녔다.
1946
스튜어트 길버트의 영어 번역이 나왔다. 영국판은 The Outsider, 미국판은 The Stranger로 제목이 갈렸다.
1947. 6
두 번째 소설. 출간 직후 비평가상을 받았다.
1957
마흔넷. 역대 두 번째로 젊은 수상자이자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첫 문학상 수상자였다. 수상 연설을 루이 제르맹에게 바쳤다.

1960. 1. 4
친구이자 출판인 미셸 갈리마르가 모는 차가 파리로 가던 길에 플라타너스를 들이받았다. 조수석의 카뮈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마흔여섯. 사고 현장에서 미완성 원고 『최초의 인간』이 나왔다.
1962. 7. 5
8년의 전쟁 끝에 알제리가 독립했다. 프랑스의 지배는 1830년부터 132년 만에 끝났다. 유럽계 주민 약 80만 명이 프랑스로 떠났다.
읽다 걸리는 낱말들. 위쪽 검색창에 넣어도 여기로 잡힌다.
원제. étranger는 외국인이라는 뜻과 낯선 사람이라는 뜻을 함께 가진다. 영국판은 The Outsider, 미국판은 The Stranger. 「05 제목 L'Étranger의 두 뜻」 장.
엄마. 아이가 부르는 말이고 어른이 되어서도 식구끼리 쓴다. 서류와 격식의 말은 메르(mère, 어머니)다. 「06 첫 문단의 프랑스어」 장.
어머니. 격식 있는 말. 소설 첫 문단의 전보가 이 낱말을 쓴다.
전신으로 보내는 짧은 글. 보내는 사람이 낱말 수대로 요금을 냈기 때문에 되도록 적은 낱말에 정보를 눌러 담아 썼다. 그래서 동사와 관사가 빠진 딱딱한 전보문이 된다.
「각별한 경의를」. 프랑스어 격식 편지의 끝인사 공식이다. 공문서나 사무 편지 끝에 기계적으로 붙는다.
노인들을 모아 돌보던 시설. asile은 「보호소」라는 뜻이라 지금의 양로원보다 구빈 시설의 느낌이 짙다.
「~했다」를 조동사(avoir·être)와 과거분사로 만드는 시제. 원래는 지금과 이어진 과거(「~해 버렸다」)였고, 지금은 말할 때 쓰는 보통의 과거형이다. 「06 첫 문단의 프랑스어」 장.
동사 한 낱말로 만드는 과거 시제. 말에서는 거의 사라졌고 글로 쓰는 이야기, 특히 소설의 서술에 남았다. 그래서 전통적인 소설의 시제다.
카뮈의 핵심어. 세상이 부조리한 것도, 사람이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이해하고 싶은 사람과 대답하지 않는 세계가 마주칠 때 생기는 것이다. 「08 카뮈가 말한 부조리」 장.
그리스 신화의 코린토스 왕. 신들을 속인 벌로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고, 바위가 굴러떨어지면 다시 밀어 올리기를 영원히 되풀이한다. 영어로는 시시포스.
1942년 카뮈의 철학 에세이. 부조리를 정면으로 다룬다. 마지막 문장은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 한다”.
카뮈가 스스로 묶은 첫 연작. 소설 『이방인』, 에세이 『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와 『오해』.
두 번째 연작. 소설 『페스트』,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 희곡 『정의의 사람들』.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전후 프랑스 철학. 카뮈는 늘 함께 묶였지만 자기는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여러 번 밝혔다.
1830년 정복부터 1962년 독립까지 132년. 1848년부터는 법으로 프랑스의 일부였다. 「01 프랑스의 도(道)가 된 식민지」 장.
프랑스 본토의 행정 구역인 「도」. 알제리의 알제·오랑·콘스탄틴도 본토와 같은 도였다.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라는 뜻이다.
식민지로 건너간 유럽계 이주민. 이 시절 그들은 스스로를 그냥 「알제리인」이라고도 불렀다.
「검은 발」. 알제리에서 태어난 유럽계 사람. 1955년 무렵 널리 퍼진 말이라 소설이 쓰인 시절에는 아직 흔하지 않았다. 「02 바다를 건너온 유럽계」 장.
「원주민」. 식민 당국이 알제리의 무슬림 주민을 부른 말. 공문서에서는 「무슬림 원주민」(indigènes musulmans). 유럽계의 일상어로는 흔히 「아랍인」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베르베르어를 쓰는 카빌리 사람들처럼 아랍계가 아닌 사람도 있었다.
행정관이 재판 없이 무슬림 주민에게 벌금·구금을 내릴 수 있게 한 규정의 묶음. 정복 때부터 군대가 쓰던 규정을 1871년 봉기 뒤 민간 행정관이 쓰도록 1881년 법으로 묶었다. 1944년에 폐지되었다.
1870년 알제리 유대인 약 3만 5천 명에게 한꺼번에 프랑스 시민권을 준 법령. 유대인 공동체가 오래 청원해 왔고, 법무장관 크레미외가 그 일을 맡아 온 인물이었다. 무슬림은 빠졌다.
식민지 알제리의 무슬림은 프랑스 국민이었지만 시민은 아니었다. 국민은 프랑스에 속한 사람, 시민은 투표하고 공직을 맡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1930년 상반기에 열린 알제리 정복 100주년 기념 행사. 알제에 박물관과 건물이 새로 섰다.
1865년 나폴레옹 3세 시대의 법. 알제리 무슬림과 유대인을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하되, 시민이 되려면 종교법에 따른 개인 신분을 버리게 했다.
혼인·이혼·상속을 이슬람법이나 유대법으로 정하는 것. 일부다처·일방 이혼 같은 것이 프랑스 민법과 맞지 않아, 이것을 버려야 시민이 될 수 있었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무슬림 2만~2만 5천 명에게 개인 신분을 버리지 않고도 투표권을 주자고 낸 안. 알제리 시장들의 반대로 의회에서 다뤄지지도 못하고 1938년 접혔다.
1848년 파리 봉기 뒤 일자리 없는 노동자들을 알제리로 보내려고 세운 마을 42곳. 땅을 거저 나눠 주었다. 마렝고가 그 하나다.
프랑스 땅에서 태어난 외국인의 자녀를 프랑스인으로 삼는 법. 알제리에서 스페인·이탈리아·몰타계 이주민의 자녀가 자동으로 프랑스인이 되었다. 외국인이 프랑스인보다 많아질까 걱정해서였다.
포도나무 뿌리를 갉는 진딧물. 1870년대부터 남프랑스의 포도밭을 쓸어버려, 포도 재배자들이 알제리로 건너가는 이유가 되었다.
알제 남서쪽으로 펼쳐진 해안 평야. 알제리에서 가장 기름진 농지로, 식민 시절 포도밭과 이주민 마을이 들어섰다.
알제리 유럽계 주민의 입말. 프랑스어 바탕에 스페인어·카탈루냐어·이탈리아어·아랍어가 섞였다. 이름은 알제의 서민 동네 바브엘우에드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알제리의 수도. 지중해를 향한 비탈에 흰 건물이 층층이 선 항구 도시. 1954년 인구 36만 5천으로 파리·마르세유·리옹 다음가는 「프랑스 네 번째 도시」였다. 「03 1930년대의 알제」 장.
알제 동쪽의 노동자 동네. 카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 이름은 벨루이즈다드.
「강의 문」. 카스바 서쪽 바닷가의 서민 동네. 식민 시절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 등 유럽계 이주민이 모여 살았다.
알제의 옛 성채 도시. 좁은 계단 골목과 흰 집들이 산비탈을 덮는다. 식민 시절 무슬림 주민이 모여 살았다.
알제 서남쪽 미티자 평원의 이주민 마을. 1848년 파리의 실업 노동자를 보내려고 세운 「농업 식민촌」 42곳 가운데 하나다. 소설 첫 장이 “요양원은 알제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마렝고에 있다”고 적는다. 지금 이름은 아주트.
카뮈가 태어난 알제리 동부의 마을. 지금 이름은 드레앙.
알제 서쪽 바닷가의 로마 유적. 카르타고의 교역항이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로마 도시가 되었다. 198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카뮈의 에세이 「티파사에서의 결혼」의 무대이기도 하다.
사하라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지중해 쪽으로 부는 뜨겁고 마른 바람. 봄·가을에 가장 잦고 시속 100km에 이르기도 한다. 이름은 아랍어 「동쪽」에서 왔다.
카뮈의 초등학교 교사. 장학생 시험을 준비시켰다. 카뮈는 노벨상 수상 연설을 그에게 바쳤다.
카뮈의 고교 철학 교사이자 평생의 스승. 카뮈는 첫 책을 그에게 바쳤다.
1927년에 생긴 알제 대학 스포츠 클럽. 카뮈가 청소년 팀 골키퍼였다.
1938~39년 카뮈의 에세이집. 티파사·제밀라의 로마 유적, 알제의 여름, 토스카나 여행을 쓴 네 편이다. 햇빛과 바다를 향한 기쁨의 책이다.
1938년 알제에서 창간된 좌파 신문. 카뮈가 기자로 일하며 카빌리의 굶주림을 고발했다.
파리의 대표적인 문학 출판사. 『이방인』은 이 출판사에서 『어린 왕자』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다.
점령 프랑스에서 출판과 언론을 검열한 독일군 부서. 『이방인』은 여기서 한 줄도 잘리지 않았다.
1942년 11월 8~16일 연합군의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상륙. 모로코·오랑·알제에 내렸다.
레지스탕스의 지하신문. 카뮈가 1943년부터 편집을 맡았고 해방 뒤에는 거의 매일 사설을 썼다.
사실은 기억이 아니라 문헌에서 확인해 적었다.
03장의 두 지도는 Natural Earth(퍼블릭 도메인) 경계 데이터로 이 페이지가 직접 그렸다. 국경은 오늘의 것이다.
사진과 그림은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받았고 전부 퍼블릭 도메인이거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다. 원본 파일명은 build/data/etranger/manifest.py에 그대로 적어 두었다.
Albert Camus, L'Étranger, Gallimard, 1942. 한국어판 『이방인』, 김화영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이 페이지의 흰 바탕과 검정, 빨강은 이 판의 표지 — 카뮈의 흑백 사진과 제목 위아래의 붉은 띠 — 에서 뽑았다.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 위해 만든 배경자료다. 스포일러를 넣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원칙이다. 이 책은 사건이 적어서 사건 하나가 곧 줄거리다. 그래서 소설 안의 이야기는 첫 장의 첫 두 문단까지만 다루었고, 등장인물의 이름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작가 어머니의 결혼 전 성도 적지 않았다 — 소설 속 한 인물의 성과 같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답하는 뒷날의 책들 — 이를테면 2013년 알제리 작가 카멜 다우드의 장편 — 은 다 읽은 뒤에 찾아보기를 권한다. 무엇에 답하는지가 곧 줄거리라서 제목도 적지 않았다. 첫머리 인용은 이 페이지가 원문에서 직접 옮겼다. 영화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페이지는 소설을 해설하지 않는다. 비평가들의 읽기도 옮기지 않았다. 소설이 딛고 선 땅과 말, 작가에 관한 사실만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