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나무 독본

1954년 12월 · 워싱턴주 산피에드로 섬

1954년의 섬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1942년이 있다

시애틀 앞바다의 작은 섬. 백인 주민과 일본계 주민이 한 섬에 산다. 12년 전 전쟁이 나자 일본계 주민은 모두 섬에서 실려 나갔고, 백인 청년들은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리고 둘 다 같은 섬으로 돌아왔다. 이 페이지는 그 배경 — 역사, 제도, 낯선 문화 — 만 모았다. 줄거리·결말은 없다.

웨스턴 레드 시더 숲
웨스턴 레드 시더 숲. 태평양 북서부의 이 나무가 소설 제목의 ‘삼나무’다.
2271942년 3월 30일
베인브리지 섬을 떠난 사람
6통보에서 출발까지
주어진 날
2/3옮겨진 12만 명 중
미국 시민이던 비율
30귀화가 막힌 채 흐른 해
1922 → 1952
46정부가 사과하기까지
1942 → 1988
00

읽기 전에

이 소설을 따라가는 데 필요한 배경을 여덟 가지로 추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각 장에 있다.

  • 무대는 미국 서북쪽 끝 워싱턴주, 시애틀 앞바다의 섬이다. 때는 1954년, 2차 대전이 끝난 지 9년 뒤다.
  • 섬에는 백인과 함께 일본계 주민이 산다. 1900년 전후 일본에서 일하러 건너와 딸기 농사와 어업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과 그 자녀다.
  • 일본에서 온 1세는 법적으로 미국 시민이 될 수도, 땅을 살 수도 없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2세)는 시민이었다.
  • 1942년 진주만 공격 뒤, 서해안의 일본계 12만 명이 재판 없이 내륙 수용소로 옮겨졌다. 이 섬 같은 곳이 가장 먼저였다.
  • 그래서 1954년의 섬에는 수용소에서 돌아온 일본계 주민과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돌아온 백인 남자들이 함께 산다.

알아 두면 다르게 읽히는 것 여덟 가지

1 · 이민
왜 일본인이 거기 살았나

메이지 유신 뒤 세금이 현금으로 바뀌고 쌀값이 폭락하면서 일본 농촌이 무너졌다. 그 젊은이들이 몇 년 벌어 돌아갈 생각으로 하와이와 미국 서해안에 일하러 왔다. 철도·제재소·통조림 공장·농장의 노동자였다. 남자가 먼저 오고, 사진만 주고받아 결혼한 사진 신부가 뒤따랐다. 1924년 이민법으로 길이 막혔으므로, 1954년 섬의 일본계 가족은 그 전에 건너온 사람들과 그 자녀다.

→ 01 건너온 사람들

2 · 국적
태어난 곳이 국적을 정한다

미국은 미국 땅에서 태어나면 미국 시민이다(출생지주의). 한국처럼 부모의 국적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한 집 안에서 부모는 일본 국적의 외국인, 자녀는 미국 시민이 된다. 1세·2세라는 말이 단순한 세대 구분이 아니라 신분을 가리키는 이유다.

→ 02 살 수는 있으나 가질 수는 없다

3 · 땅
땅을 가질 수 없던 사람들

1세는 법으로 귀화가 막혀 있었고, 워싱턴주 법은 「시민이 될 수 없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했다. 그래서 땅을 빌려 농사짓거나, 백인 지주와 말로 약속하고 몇 해에 걸쳐 값을 치르는 식으로 거래했다. 문서로 남길 수 없는 거래였다. 땅을 자기 이름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시민인 자녀가 자란 뒤였다.

→ 02 살 수는 있으나 가질 수는 없다

4 · 생업
연어와 딸기

섬 사람들이 먹고사는 일은 둘이다. 밤에 혼자 배를 몰고 나가 그물로 연어를 잡는 자망 어업, 그리고 온 가족이 매달리는 딸기 농사. 그물·부표·조류·그물코 같은 말이 설명 없이 나온다. 일본계 이민이 이 지역 딸기 농사를 일궜다.

→ 05 밤바다의 그물

5 · 1942
이웃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다

진주만 공격 석 달 뒤, 정부는 서해안의 일본계 주민 12만 명 전부를 내륙 수용소로 옮겼다. 재판도 혐의도 없었고, 3분의 2가 미국 시민이었다. 통보에서 출발까지 며칠, 짐은 두 손에 들 만큼. 집·밭·배를 헐값에 팔거나 이웃에게 맡기고 떠났다. 이 섬의 모델인 베인브리지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비워졌다.

→ 07 1941년 12월부터

6 · 전쟁
같은 전쟁, 다른 전선

일본계 2세 청년들은 미군에 들어가 유럽에서 싸웠다(442연대). 가족이 수용소 철조망 안에 있는 병사가 많았다. 같은 시기 섬의 백인 청년들은 태평양의 섬들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전쟁이 끝나고 둘은 같은 섬으로 돌아왔다. 1954년은 그로부터 9년 뒤다.

→ 10 태평양의 전장

7 · 재판
판사가 아니라 배심원이 정한다

미국 형사재판에서 유무죄는 주민 가운데 뽑힌 배심원 12명이 만장일치로 정한다. 한국에도 2008년부터 국민참여재판이 있지만 배심원 의견은 판사에게 권고일 뿐이다. 미국에서는 배심의 결론이 곧 판결이다. 그래서 검사와 변호인은 판사가 아니라 배심원석을 향해 말한다.

→ 11 미국 형사재판 읽는 법

8 · 문화
말하지 않는 사람들

일본계 부모들은 자녀에게 가만(我慢) — 견디기 어려운 것을 참고 내색하지 않는 것 — 을 가르쳤다. 수용소 시절 공동체를 버티게 한 말이다. 백인 이웃들은 이것을 속을 알 수 없는 태도로 오해하곤 했다. 또 1950년대 미국에서 백인과 일본계가 사귀는 일은 법으로 막혀 있지는 않았지만 양쪽 공동체 모두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한국 독자에게 — 일본계 미국인은 일본 제국이 아니다

같은 시기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일본인」이 한국 독자에게는 묘하게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 섬의 일본계 주민은 일본 제국과 별개의 사람들이다. 대부분 전쟁 수십 년 전에 고향을 떠난 농민·어부와 그 자녀이고, 2세는 일본 땅을 밟아 본 적도 없는 미국 시민이다. 미국 정부는 그 차이를 보지 않고 얼굴과 혈통만으로 그들을 적으로 다뤘다.

당시 미국의 한인들도 같은 처지에 놓일 뻔했다. 한인 역시 귀화가 막힌 아시아계였고, 법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기 때문이다. 한인 단체들이 신분증과 「I am Korean」 배지를 나눠 주고 정부를 설득해, 한인을 일본 신민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지시를 받아 냈다.

산피에드로 섬은 실재하지 않는다

작가 데이비드 구터슨이 만든 섬이다. 그러나 섬 위의 것들은 전부 실재했다 — 딸기밭, 자망 어선, 삼나무 숲, 그리고 1942년 3월의 페리. 작가가 살던 베인브리지 아일랜드가 그 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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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목차에서 한 장(章)씩 골라 본다 — 한 번에 한 주제만 뜬다. 처음부터 다 읽을 필요는 없고, 장마다 맨 위의 요약 상자만 읽어도 된다. 책을 읽다 걸리는 것이 생기면 그때 해당 장을 펴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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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건너온 사람들

1954년 섬에 사는 일본계 가족들이 어떻게 거기 있게 되었나. 1869년부터 문이 닫히는 1924년까지.

  • 메이지 유신 뒤 세금이 현금·정액으로 바뀌고 1880년대에 쌀값이 폭락했다. 일본 서남부 농촌이 무너졌다.
  • 그 젊은이들이 몇 년 벌어 돌아갈 생각으로 하와이와 미 서해안에 건너왔다 — 한국인이 독일 광산과 중동 건설 현장에 나간 것과 비슷한 출발이다.
  • 미국에는 마침 빈자리가 있었다. 1882년 중국인 노동자를 막은 자리를 일본인이 채웠다.
  • 사진 신부가 건너오고 아이가 미국 시민으로 태어나면서, 돌아갈 사람들이 눌러사는 사람들이 됐다.
  • 일자리 경쟁, 농사에서의 성공, 러일전쟁 뒤의 공포가 겹쳐 배척이 시작됐다. 1907년 신사협정으로 노동자가, 1924년 이민법으로 가족까지 일본에서 새로 들어오는 길이 막혔다.

왜 일본을 떠났나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서양식 근대 국가를 서둘러 만들기 시작했다. 군대와 철도와 공장에 돈이 필요했고, 새 정부는 그 돈을 농촌에서 걷었다. 1873년의 지조개정(地租改正)이다. 그전까지 농민은 거둔 쌀의 일부를 세금으로 냈다. 이제는 땅값에 매긴 세금을 현금으로, 해마다 같은 액수 내야 했다. 풍년이든 흉년이든, 쌀값이 오르든 내리든 상관없었다.

1881년 정부가 물가를 잡으려고 돈줄을 죄자(마쓰카타 디플레이션) 쌀값과 누에고치 값이 무너졌다. 수입은 줄었는데 세금은 그대로였다. 세금을 못 낸 농민이 땅을 팔고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으로 떨어졌다. 팔린 땅은 지주와 고리대금업자에게 모였다. 히로시마·야마구치·구마모토·후쿠오카 같은 서남부 농촌이 특히 심했고, 흉작까지 겹쳤다.

땅이 없는 집의 둘째·셋째 아들에게는 물려받을 것이 없었다. 바다 건너 일자리는 그들의 탈출구였다. 일본어로 데카세기(出稼ぎ), 「돈 벌러 나간다」는 말이다. 몇 년 벌어 고향에 땅을 사서 돌아오는 것이 목표였다. 1960~80년대 한국인이 독일 광산과 병원으로, 중동 건설 현장으로 나간 것과 비슷한 출발이다.

왜 하필 하와이와 미국이었나

먼저 문을 연 것은 하와이였다. 당시 하와이는 미국 땅이 아니라 독립 왕국이었고, 사탕수수 농장에 일할 사람이 모자랐다. 일본 정부는 하와이 정부와 계약을 맺고 노동자를 보냈다(관약이민). 1885년부터 1894년까지 26차례, 약 2만 9천 명이 3년 계약으로 건너갔다. 대부분 야마구치와 히로시마 출신이었다.

같은 무렵 미국 본토에는 빈자리가 생겼다. 서부의 철도·광산·제재소·통조림 공장·농장을 떠받치던 것은 중국인 노동자였는데, 1882년 중국인 배척법으로 그들이 더는 들어올 수 없게 됐다. 일할 사람을 찾던 그 자리에 일본인이 들어갔다. 하와이에서 계약을 마치고 본토로 건너간 사람도 많았다.

왜 돌아가지 않았나

돈은 생각만큼 모이지 않았다. 그 사이 사람들은 날품팔이에서 소작농으로, 가게 주인으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갔다. 결정적인 것은 가족이었다. 1907년 이후 사진 신부가 건너오고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미국 시민이었다. 아이들은 영어로 말하고 미국 학교에 다녔다. 돌아갈 고향보다 지켜야 할 집이 생긴 것이다.

왜 미움을 받았나

이유는 셋이 겹쳤다.

첫째, 일자리. 일본인은 낮은 임금에도 오래 일했다. 같은 밑바닥 일자리를 두고 다투던 백인 노동자, 특히 아일랜드계·이탈리아계 이민 노동자들이 이를 위협으로 느꼈다. 노동조합이 배척 운동의 앞장에 섰다.

둘째, 성공. 일본인 농부들은 남이 쓰지 않던 땅까지 빌려 손이 많이 가는 집약 농사로 큰 수확을 냈다. 1915년 로스앤젤레스 사람들이 먹는 채소의 4분의 3을 일본인이 길렀다. 백인 농부들에게 이것은 생존의 경쟁이었다. 「이대로 두면 서부의 농지가 일본인 손에 넘어간다」는 말이 돌았다.

셋째, 두려움.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이겼다. 아시아의 나라가 처음으로 백인 강대국을 꺾은 것이다. 「누런 피부의 위협」, 이른바 황화론(黃禍論)이 퍼졌다. 서해안의 일본인은 그 강대국이 심어 둔 앞잡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배척 단체가 생기고 신문이 배일 캠페인을 벌였다. 아래 연표의 1906년 학교 분리령은 그 연장선이다.

얼마나 됐나

먼저 규모의 감각을 잡아 두면 좋다. 1940년 미국 본토의 일본계 인구는 약 12만 7천 명이었고, 그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워싱턴·오리건 세 주에 있었다. 전체 인구의 0.1%도 안 되는 숫자다. 그런데 이들에게 적용된 법의 양은 그 비율과 전혀 맞지 않았다.

1940년 미국 내 일본계 인구 분포
1940년 일본계 인구 분포. 서부 연안 세 주에 몰려 있다. 이 분포가 그대로 1942년 퇴거 구역이 된다.

1869

첫 정착지

캘리포니아 골드힐에 와카마쓰 차·비단 농장이 세워졌다. 미국 본토 최초의 일본인 정착지다. 이듬해 실패했지만, 이때부터 태평양을 건너오는 흐름이 시작된다. 처음 온 이들은 대부분 남성 단신 노동자였고, 돈을 벌어 돌아갈 생각이었다.

1880년대~

철도·제재소·통조림공장

중국인 배척법(1882)으로 중국인 노동력이 끊기자 그 자리를 일본인이 메웠다. 서부 연안의 철도 부설, 제재소, 연어 통조림공장, 농장이 이들을 불렀다. 시애틀과 타코마에 일본인 거리가 생겼고, 퓨젓 사운드의 섬들에는 벌목이 끝난 땅을 개간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철도·제재소·통조림공장
시애틀 일본인 거리, 1909년. 메인 스트리트와 6번가 일대에 상점·여관·목욕탕·신문사가 모여 있었다.

1889 · 1886

땅을 가질 수 없다는 규정이 먼저 있었다

워싱턴은 1889년 주(州)로 승격하면서 헌법에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는 조항을 넣었다. 준주 시절인 1886년 규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문구는 일본인을 이름으로 지목하지 않는다 — 그럴 필요가 없었다.

1906.10

샌프란시스코 학교 분리령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가 일본인 학생 93명을 동양인 전용 학교로 보내라고 결정했다. 러일전쟁(1905)에서 이긴 직후의 일본은 이를 국가적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외교 문제로 번졌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개입한다.

1907

신사협정 — 노동자는 막고 가족은 열어 두다

미국과 일본이 조약이 아닌 합의로 사태를 봉합했다. 일본이 스스로 노동자에게 여권을 내주지 않기로 하고, 대신 미국은 학교 분리를 철회한다. 의회를 거치지 않으려고 “신사들의 약속”이라는 형식을 택했다. 그런데 이 합의에 구멍이 하나 있었다 — 새 노동자는 못 오지만, 이미 미국에 사는 일본인이 아내·자녀·부모를 불러오는 것은 된다.

신사협정 — 노동자는 막고 가족은 열어 두다
시애틀 2번가의 일본인 행진, 1909년.

1908 – 1920

사진신부

그 구멍으로 여자들이 건너왔다. 중매인이 양가의 가문·건강·나이·재산을 조사하고 사진을 주고받았다. 신부의 이름이 신랑의 호적에 오르면 일본 법으로 혼인이 성립했고, 그러면 여권이 나왔다. 서해안으로 1만 명 이상, 하와이로 1만 4천여 명이 이렇게 왔다. 미국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아 부두에서 합동 결혼식을 다시 치렀다. 사진이 손질된 것이거나 십수 년 전 것이거나 아예 다른 사람인 경우도 있었다.

사진신부
샌프란시스코 앤젤아일랜드 이민국에 도착한 사진신부들.

1913

캘리포니아 외국인 토지법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고 3년을 넘는 임차도 할 수 없게 됐다. 1920년 개정으로 임차 자체가 막혔다. 이 법의 문구는 인종을 말하지 않지만 대상은 분명했다.

캘리포니아 외국인 토지법
외국인 토지법 반대 전단. 실제로는 이런 반대가 소수였다.

1920.03.01

일본, 사진신부 여권 발급 중단

미국 내 여론 악화를 이유로 일본이 스스로 멈췄다. 그때까지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 2세는 이미 3만 명에 이르렀다.

1921 · 1923

워싱턴주 — 자녀 명의까지 막다

워싱턴이 캘리포니아를 본떠 1921년 외국인 토지법을 제정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1923년 개정은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 명의로 부모가 땅을 두는 것까지 금지했다. 그때까지 일본계 가족이 쓰던 유일한 합법적 우회로가 막힌 것이다. 이 법은 1967년에야 폐지된다.

1922.11.13

오자와 판결 — 왜 시민이 될 수 없었나

오자와 다카오는 28년을 미국에서 살았다. 버클리에서 공부했고 영어를 썼고 기독교인이었고 미국 회사에 다녔다. 그는 일본인도 귀화법이 말하는 “자유로운 백인”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아니라고 답했다. “백인”이란 “통상 코카서스 인종으로 알려진 자”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 판결로 모든 일본 출신 이민자의 귀화 길이 막혔다. 다시 열리는 것은 30년 뒤인 1952년이다.

1924

이민법 — 문을 닫다

출신국별 할당제를 도입하면서 “귀화 자격이 없는 외국인”의 입국을 사실상 전면 금지했다. 이제 가족을 불러오는 길까지 막혔다 — 일본에서 미국으로 새로 들어오는 문이 닫힌 것이다. 이미 미국에 있던 사람은 그대로 남았다. 일본에서는 “배일이민법”으로 불리며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된다.

이민법 — 문을 닫다
1924년 이민법에 서명하는 캘빈 쿨리지 대통령.
시애틀 일본어 학교
시애틀의 일본어 학교. 2세 아이들은 미국 학교가 끝나면 여기로 다시 갔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1941년 12월 FBI 체포 목록에 있었다.
02

살 수는 있으나 가질 수는 없다

이 장 하나만 읽어도 소설의 절반이 다르게 보인다. 땅과 시민권의 문제다.

  • 핵심은 한 구절이다 —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alien ineligible for citizenship).
  • alien은 라틴어 「남의 것」에서 온 말로, 법에서는 그 나라 국적이 없는 사람이다.
  • 미국 귀화법은 처음부터 「백인」만 받았다. 1870년 흑인을 더할 때 「백인」을 지우자는 안이 나왔지만, 중국인을 막으려고 그대로 남겼다. 일본인은 이 문장에 걸렸다.
  • 땅을 막은 이유는 일본인 농부의 성공이었다. 주들은 조약을 피하려고 「일본인」 대신 그 구절을 썼다 — 인종을 적지 않고 인종만 걸러내는 문장이다.
  •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니세이, 2세)는 태어나면서 시민이었다 — 일본에서 온 부모(잇세이, 1세)와 한 집에 두 신분이 산 것이다.
  • 남은 길은 자녀 명의였는데 워싱턴주는 1923년에 그것마저 막았다. 그래서 거래는 문서가 아니라 말로 오갔다.

핵심은 한 구절이다. aliens ineligible for citizenship —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

alien 이라는 말

라틴어 alienus — 「남의, 다른 사람에게 속한」에서 왔다(alius, 「다른」). 영어 법률에서 alien은 그 나라 국적이 없는 사람, 곧 외국인이다. 지금은 「외계인」이라는 뜻으로 더 익숙하지만 그쪽이 나중에 생긴 뜻이다. 같은 뿌리의 alienate(멀어지게 하다)처럼, 이 말에는 「우리가 아닌 사람」이라는 거리가 배어 있다. 미국 법은 지금도 외국인을 공식적으로 alien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alien ineligible for citizenship을 풀면 이렇다 — 「우리 사람이 될 자격조차 없는 남」. 한번 이 이름이 붙으면 몇십 년을 살아도 벗을 수 없었다.

왜 「백인」과 「아프리카계」만이었나

1790년, 미국 첫 의회가 만든 귀화법은 귀화 자격을 「자유로운 백인」으로 정했다. 새 공화국의 시민은 유럽에서 건너온 정착민이라는 생각이 당연하던 때였다. 노예와 원주민은 처음부터 시민의 범위 밖이었다. 「자유로운」은 노예와 계약에 묶인 하인을 빼려는 말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폐지됐다. 1868년 수정헌법 14조로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이 시민이 됐다. 1870년 귀화법을 고칠 때 찰스 섬너 상원의원은 이참에 「백인」이라는 말을 아예 지우자고 했다. 피부색으로 시민을 가리는 것은 방금 끝낸 전쟁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막은 것은 서부 출신 의원들이었다. 「백인」을 지우면 서부에 많던 중국인이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네바다의 윌리엄 스튜어트 상원의원은 유럽 이민자는 「우리 인종이라 빨리 동화되지만」 「중국 문명은 우리 문명과 전쟁 중」이라고 말했다.

결국 타협이 나왔다. 「백인」은 그대로 두고 「아프리카 태생과 아프리카 혈통」만 덧붙였다. 아프리카에서 건너와 귀화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해방된 흑인에 대한 원칙은 세우면서 실제로 문을 넓히지는 않는 선택이었다. 「백인」이라는 말은 아시아인을 막기 위해 남겨진 것이다. 일본인은 나중에 건너와 이 문장에 걸렸다.

그 문장을 대법원이 확인한 것이 1922년 오자와 판결이다. 오자와 다카오는 일본인의 피부도 희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백인」이란 피부색이 아니라 「코카서스 인종」을 뜻한다며 기각했다. 석 달 뒤, 인도 출신 바가트 싱 신드가 인류학상 자신은 코카서스 인종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법원은 이번에는 「백인」이란 학술 용어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 이해하는 백인」이라며 기각했다. 기준은 판결마다 바뀌었지만 결론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왜 땅이었나

귀화를 막아도 일본인은 이미 미국에 살고 있었고, 농사를 잘 지었다. 앞 장에서 본 대로 백인 농부들은 그것을 위협으로 느꼈다. 그래서 다음 표적은 땅이었다. 땅을 가질 수 없으면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남의 땅 위에서만 짓게 된다.

그런데 각 주는 “일본인은 땅을 못 산다”고 쓰지 않았다. 대신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은 땅을 못 산다”고 썼다. 이유가 있었다. 1911년 미일 통상조약은 일본인이 미국에서 집과 가게를 위한 땅을 갖고 빌릴 권리를 보장했다. 「일본인」이라고 쓰면 조약을 정면으로 어기고, 인종을 명시하면 위헌 시비가 붙는다.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라고 쓰면 유럽 이민자는 귀화할 수 있으니 걸리지 않고, 아시아인만 정확히 걸린다. 인종을 적지 않고 인종만 걸러내는 문장이다. 캘리포니아 법무장관이 직접 이 문구를 다듬었다.

왜 2세는 태어나면서 시민이었나

남북전쟁 뒤인 1868년, 해방된 흑인의 시민권을 보장하려고 수정헌법 14조가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미국 시민이다.」 1898년 대법원은 이 조항이 귀화할 수 없는 부모의 자녀에게도 적용된다고 판결했다(중국계 웡킴아크 사건). 그래서 부모는 평생 시민이 될 수 없는데 자녀는 태어나는 순간 시민인, 한 지붕 아래 두 신분이 생겼다.

한국은 부모의 국적을 따르는 혈통주의라 이 구조가 낯설다. 미국은 태어난 땅을 따르는 출생지주의다.

일본계 가족에게 남은 길은 하나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의 이름으로 땅을 사는 것. 2세는 태어나면서 시민이므로 소유가 가능했다. 그래서 갓난아이 명의의 농장이 생겼다. 그런데 워싱턴주는 1923년에 그것마저 금지했다. 캘리포니아를 다룬 글만 읽으면 이 대목을 놓친다 — 이 소설의 무대는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워싱턴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말로 하는 계약이 오갔다. 백인 이웃 명의로 땅을 두고 대금을 나눠 갚거나, 소작을 하면서 몇 년 뒤 넘겨받기로 약속하거나. 문서로 남길 수 없는 약속이었다 — 문서로 남기면 그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한 문장으로

일본계 1세는 법으로 시민이 될 수 없었고, 시민이 아니어서 땅을 가질 수 없었고, 그래서 자식 이름으로 사거나 말로 약속했고, 1923년 이후에는 자식 이름조차 쓸 수 없었다. 이 사슬의 어느 고리도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이 살아온 법의 연대 — 1954년 시점에 아직 유효한 법과 이미 사라진 법이 섞여 있다
연도이름내용이 소설에서
1870귀화법 개정귀화 자격을 “자유로운 백인”과 “아프리카 태생·혈통인 자”로 한정했다.여기서 나온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라는 표현이 이후 반세기 동안 일본인을 지목하는 도구가 된다. 인종을 적지 않고 인종을 가리키는 문구다.
1889워싱턴주 헌법“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주가 만들어질 때부터 있던 조항이다. 1886년 준주 규정을 이어받았다.
1907신사협정일본이 노동자에게 여권을 내주지 않기로 하고, 미국은 학교 분리를 철회했다.가족은 예외였다. 이 구멍으로 사진신부가 건너온다 — 소설 속 1세 부부 대부분이 이 경로다.
1913캘리포니아 외국인 토지법소유 금지, 3년 초과 임차 금지. 1920년에 임차 자체를 금지.가장 널리 알려진 법이지만 이 소설의 무대는 캘리포니아가 아니다.
1921워싱턴주 외국인 토지법캘리포니아를 본떠 제정.산피에드로에 적용되는 법이 바로 이것이다.
1922오자와 대 미국연방대법원 만장일치. 일본인은 “자유로운 백인”이 아니므로 귀화할 수 없다.이 판결 때문에 1세는 평생 외국인으로 산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어를 해도, 아들이 미군이어도.
1923워싱턴주 개정미국 태생 자녀 명의로 부모가 땅을 두는 것을 금지.일본계 가족이 쓰던 유일한 합법적 우회로가 막혔다. 워싱턴주에만 있던 조항이라, 캘리포니아를 다룬 글에는 안 나온다.
1924이민법출신국별 할당제. “귀화 자격 없는 외국인”의 입국을 사실상 금지.이후 일본에서 오는 길이 끊긴다. 소설의 1세 세대는 이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온 마지막 사람들이다.
1942행정명령 9066호육군장관이 군사 구역을 정하고 “임의의 또는 모든 사람”을 배제할 수 있다.명령문에 ‘일본’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본계에게만 적용됐다.
1952매캐런–월터법인종에 따른 귀화 제한 폐지.1세도 시민이 될 수 있게 됐다. 소설의 시점(1954년)은 그 직후다.
1967워싱턴주 토지법 폐지1921년 법이 46년 만에 사라졌다.1954년에는 아직 살아 있는 법이다.
1988시민자유법생존자 82,219명에게 각 2만 달러. 정부의 공식 사과.원인을 “인종 편견, 전시 히스테리, 정치적 지도력의 실패”라고 못박았다. 군사적 필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외국인 토지법 반대 전단
외국인 토지법에 반대하는 전단. 이런 목소리는 소수였다.
1924년 이민법 관련 신문 삽화
“용광로의 미국이 끝나다.” 1924년 이민법을 다룬 당대 삽화.
03

산피에드로가 있는 바다

소설의 무대가 지도에서 어디인지. 넓은 지도에서 시작해 섬 가까이로 내려간다.

  • 미국 본토의 서북쪽 끝 워싱턴주, 캐나다 국경 바로 아래다. 태평양 건너편이 한국과 일본이다.
  • 태평양에서 들어온 후안 데 푸카 해협이 안쪽에서 갈라져 퓨젓 사운드가 된다. 섬은 그 물길 사이에 있다.
  • 다리가 없고 페리로만 닿는 작은 섬이라 주민끼리 서로를 잘 안다.
  • 해협은 안개와 돌풍이 잦은 거친 바다다.
  • 바다 덕분에 겨울이 온화해 눈보다 비가 많은 곳이다.
태 평 양요코하마 → 시애틀 약 7,700km러시아알래스카 (미국)캐 나 다미 국멕시코하와이 (미국)한국일본요코하마시애틀워싱턴주
먼저 큰 그림. 칠한 곳이 워싱턴주 — 미국 본토의 서북쪽 끝, 캐나다와 맞닿은 주다. 태평양 바로 건너편이 한국과 일본이고, 일본계 이민들이 건너온 것이 이 바다다 — 요코하마에서 시애틀까지 직선으로 약 7,700km. 아래 지도는 시애틀 주변을 확대한 것이다.
캐 나 다미 국밴쿠버 섬올림픽 반도태평양후안 데 푸카 해협조지아 해협퓨젓 사운드밴쿠버빅토리아시애틀베인브리지 섬
시애틀 주변을 확대한 것. 점선이 국경이다 — 위가 캐나다, 아래가 미국. 땅 위에서는 북위 49도 직선이고, 바다로 나가면 해협 한가운데를 지난다. 태평양에서 들어온 후안 데 푸카 해협이 안쪽에서 퓨젓 사운드로 갈라진다. 산피에드로는 가상의 섬이라 지도에 없다. 바탕이 된 베인브리지 섬은 시애틀에서 페리로 35분 거리다.

미국 서북쪽 끝, 워싱턴주다. 태평양에서 육지 쪽으로 후안 데 푸카 해협이라는 물길이 들어온다. 길이 약 154km, 폭은 19~40km. 북쪽은 캐나다 밴쿠버 섬, 남쪽은 미국 올림픽 반도이고, 국경이 그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이 해협이 안쪽에서 갈라져 육지 사이로 깊이 파고든 것이 퓨젓 사운드다. 빙하가 깎아 만든 좁고 긴 만들이 손가락처럼 뻗어 있고, 그 사이에 섬이 흩어져 있다.

소설의 산피에드로는 이 해협 어귀에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섬의 생활에 대해 알아 둘 것이 셋 있다.

닫힌 곳
배로만 닿는다

다리가 없다. 섬에 들고 나는 방법은 페리 하나다. 그 말은 누가 오고 누가 갔는지 섬 전체가 안다는 뜻이고, 한 번 생긴 소문이 빠져나갈 데가 없다는 뜻이다. 인구가 몇천 명인 섬에서는 모두가 서로의 부모 세대까지 안다.

험한 물
안개와 돌풍

해협은 태평양에서 바로 바람과 파도를 받는다. 소형 선박 주의보와 돌풍 경보가 잦고 안개가 짙다. 안쪽 내해보다 훨씬 거칠다. 밤에 혼자 배를 타고 나가는 일이 어떤 일인지가 이 지형에서 나온다.

기후
눈은 드물다

이 지역은 바다가 온도를 눌러 줘서 겨울에도 비가 오지 눈은 잘 오지 않는다. 눈보다 비의 겨울이다.

후안 데 푸카 해협 위성 사진
후안 데 푸카 해협. 위쪽이 캐나다 밴쿠버 섬, 아래쪽이 미국 올림픽 반도다. 국경이 이 물 가운데를 지난다. 오른쪽 안으로 들어가면 퓨젓 사운드다.
올림픽 반도에서 본 해협
올림픽 반도 쪽에서 본 해협. 건너편이 밴쿠버 섬이다.
베인브리지 아일랜드 항공사진
베인브리지 아일랜드. 폭 8km, 길이 16km. 소설의 산피에드로가 이 섬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퓨젓 사운드 위성 사진
퓨젓 사운드. 빙하가 깎은 좁고 깊은 만들이 육지 안으로 손가락처럼 뻗어 있다. 오른쪽 물가의 도시가 시애틀이고, 그 왼편의 섬이 베인브리지다.
1867년 퓨젓 사운드 해도
1867년 미 해안측량국의 퓨젓 사운드 해도. 물이 육지 사이로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 섬이 얼마나 많은지가 한눈에 보인다. 이 물길 하나하나가 어업 구역이 된다.
왜 하필 이 섬이 먼저였나

1942년에 베인브리지 아일랜드가 미국 최초의 강제 퇴거 대상이 된 이유는 이 지형에 있다. 섬 건너편에 퓨젓 사운드 해군 조선소가 있었다. 군은 “군사 시설에 가깝다”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섬이라 인구를 세기 쉽고 배 한 척으로 전부 실어 낼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베인브리지 아일랜드로 가는 페리
지금도 시애틀과 섬을 잇는 것은 페리다. 35분 걸린다. 1942년 3월 30일에 사람들이 실려 나간 것도 이 항로였다.
04

삼나무

제목에 있는 나무다. 그런데 한국에서 ‘삼나무’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 나무가 아니다.

  • 제목의 ‘삼나무’는 한국·일본의 삼나무가 아니라 이 지역의 웨스턴 레드 시더다. 높이 60m가 넘고 잘 썩지 않는 거목이다.
  • 원주민에게는 카누·집·옷의 재료였다.
  • 숲을 베어 낸 자리의 거대한 그루터기를 일본계 이민이 뽑아 밭을 만들고 딸기를 심었다. 그 땅은 법 때문에 그들 것이 될 수 없었다.
  • 처진 가지에 눈이 얹혀 나무가 조용히 휘는 모습 — 그것이 제목의 그림이다.

원문 제목의 cedar는 이 지역의 웨스턴 레드 시더(western red cedar, Thuja plicata)다. 학명이 말해 주듯 측백나무과에 속하고, 일본 삼나무(스기, Cryptomeria japonica)와도 레바논 삼나무와도 다른 나무다. 우리말에 딱 맞는 이름이 없어 ‘삼나무’로 옮긴 것이다.

이 나무는 크다. 다 자라면 높이 60m, 밑동 지름 4m를 넘는다. 향이 강하고 기름 성분이 많아 잘 썩지 않는다. 그래서 태평양 북서부 원주민에게는 재료의 전부에 가까웠다 — 통나무를 파서 카누를 만들고, 판자로 집을 짓고, 속껍질을 벗겨 두드려 옷과 바구니를 짰다. 정착민에게는 지붕널과 울타리 기둥의 재료였다.

그리고 이 나무가 이 소설의 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설명한다.

1단계
벌목

19세기 후반, 퓨젓 사운드의 섬들은 삼나무와 더글러스 퍼(미송)의 거대한 원시림이었다. 제재소가 들어와 이 나무들을 베어 냈다. 시애틀과 샌프란시스코를 지은 목재가 여기서 나갔다.

2단계
그루터기

베고 나면 지름 몇 미터짜리 그루터기가 남는다. 뿌리가 땅속에 그물처럼 박혀 있어 이걸 뽑아내지 않으면 밭을 만들 수 없다. 아래에 자세히 적었다.

3단계
그 일을 누가 했나

백인 지주들이 그 위험하고 더딘 개간을 일본계 이민에게 맡겼다. 몇 해에 걸쳐 그루터기를 뽑아 밭으로 만든 뒤, 거기에 딸기를 심었다. 땅은 자기 것이 아니었다 — 법이 소유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루터기를 뽑는다는 것

원시림을 베어 낸 땅은 밭이 아니다. 키 60m짜리 더글러스 퍼(미송)와 웨스턴 레드 시더를 베고 나면 커다란 그루터기가 숲처럼 남는다. 1912년 미국 농무부가 워싱턴주 서부의 개간지를 조사했다. 그루터기 지름은 45cm에서 3m, 1에이커(약 1,200평)에 10~40개가 박혀 있었다. 뿌리는 땅속으로 넓게 뻗어 서로 얽혀 있다.

뽑는 방법은 이랬다. 먼저 그루터기 밑을 파고 다이너마이트를 넣어 터뜨린다. 쪼개진 덩어리와 뿌리에 쇠사슬을 걸고, 말이 끄는 윈치나 증기 기관으로 돌리는 윈치로 하나씩 뽑아낸다. 뽑은 나무는 구덩이에 모아 태운다. 그루터기가 빠진 자리에서는 빙하가 남기고 간 돌이 나온다. 그것도 손으로 골라내야 한다.

화약을 다루는 위험한 일이었고, 돈도 많이 들었다. 같은 조사에서 1에이커를 개간하는 데 47~88달러가 들었다. 그리고 하필 삼나무는 잘 썩지 않는다. 그루터기는 몇 해 두어 삭으면 뽑기가 쉬워지는데(같은 조사에서 4~5년 묵은 그루터기는 비용이 4분의 1가량 덜 들었다), 삼나무 그루터기는 오래 두어도 쉽게 삭지 않는다.

베인브리지에서 이 일을 맡은 것이 일본계였다. 섬의 제재소에 일하러 왔던 일본인들이 베어 낸 뒤 버려진 땅을 빌려 그루터기를 뽑고 밭을 만들었다. 한 농부는 「다이너마이트와 말로 땅을 고르고, 빙하가 남긴 돌을 골라내는 고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1920년대 초 제재소가 문을 닫자 그렇게 만든 밭의 딸기가 섬의 가장 큰 산업이 됐다. 땅을 밭으로 만든 사람과 땅 주인이 다른 구조가 여기서 생긴다.

거대한 웨스턴 레드 시더
퀴놀트 호숫가의 웨스턴 레드 시더. 이 정도 크기가 특별하지 않은 숲이었다.
삼나무 카누 옆의 클랄람족
삼나무 통나무를 파서 만든 카누와 클랄람족 사람들. 이 해협의 원래 주인들이다.
웨스턴 레드 시더 한 그루
가지가 아래로 처졌다가 끝만 위로 들리는 것이 이 나무의 모양이다. 눈이 오면 그 처진 가지 위에 얹힌다.
눈과 삼나무

이 나무의 가지는 아래로 처졌다가 끝이 위로 들린다. 눈이 오면 그 처진 가지에 얹혀 가지가 더 내려앉고, 무게를 못 견디면 쏟아진다. 제목의 그림은 그것이다 — 눈이 나무에 쌓이는 동안 나무가 조용히 휘어지는 상태.

05

밤바다의 그물

소설은 자망 어업을 설명 없이 다룬다. 이 방식을 알면 밤바다의 장면들이 구체적으로 보인다.

  • 자망은 물속에 그물을 벽처럼 세워 연어의 아가미가 걸리게 하는 어업이다.
  • 그물코의 크기가 곧 어떤 연어를 잡을지를 정한다.
  • 물고기가 그물을 못 보는 밤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온다.
  • 한 사람이 배 한 척으로 할 수 있다 — 대신 일도 위험도 혼자 진다.
  • 좋은 자리는 정해져 있고 같은 바다에 다른 배들이 있다. 자리를 두고 벌이는 신경전이 일의 일부다.

자망(gillnet)은 이름 그대로 물고기의 아가미(gill)가 걸리게 하는 그물이다. 원리는 단순하다. 그물을 물속에 벽처럼 세워 두고 물고기가 스스로 부딪히기를 기다린다.

자망의 구조
자망의 구조. 위쪽 뜸줄에 달린 부표가 그물을 띄우고, 아래쪽 발줄의 납이 가라앉힌다. 그 사이에 그물이 벽처럼 선다. (미 해양대기청 도해 — 이 그림은 바닥에 고정한 형태이고, 소설의 연어 어업은 이 벽을 배에 매달아 조류에 흘려보내는 방식이다.)
구조
뜸줄과 발줄

그물 위쪽 줄에 코르크 부표를 달아 띄우고, 아래쪽 줄에 납을 달아 가라앉힌다. 그러면 그물이 수직으로 펴진 벽이 된다. 물속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원리
그물코의 크기가 전부다

작은 고기는 코 사이로 빠져나간다. 큰 고기는 머리가 안 들어간다. 딱 그 크기의 고기만 머리가 반쯤 들어갔다가 아가미덮개가 걸려 못 빠진다. 그래서 그물코 크기를 고르는 것이 곧 어떤 연어를 잡을지 정하는 일이다.

시간
왜 밤인가

낮에는 물고기가 그물을 본다. 어두워야 안 보인다. 게다가 연어는 밤에 움직인다. 그래서 자망 어부의 하루는 해질 무렵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는 것이다.

혼자
한 사람, 한 척

건착망 같은 방식은 여러 사람과 큰 배가 필요하다. 자망은 혼자 할 수 있다. 1931년에 나온 동력 드럼이 그물을 감아올리면서 더 멀리 나갈 수 있게 됐다. 자본이 적게 드는 대신 일도 위험도 혼자 진다.

실제 밤 작업은 이렇게 흐른다. 어두워지면 정해진 자리로 나가 그물을 푼다 — 배가 천천히 나아가면서 그물이 뱃전으로 흘러 나가 수백 미터 벽이 선다. 한쪽 끝에는 등을 단 부표를 띄운다. 그러고는 기다린다. 그물과 함께 조류를 타고 떠내려가면서, 부표의 불빛으로 그물이 어디 있는지를 계속 확인한다. 안개가 끼면 그 불빛이 사라진다.

시간이 되면 감아올린다. 그물이 드럼에 감겨 올라오는 동안 걸린 연어를 하나씩 빼낸다. 손이 얼고 비늘에 베인다. 그리고 같은 바다에 다른 배들이 나와 있다. 좋은 자리는 정해져 있고, 누가 어디 있는지는 등불로 안다.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신경전이 이 일의 일부다.

연어 자망 어선
연어 자망 어선. 선미의 드럼에 그물이 감겨 있다.
바우피커형 자망선
뱃머리에서 그물을 걷는 형태의 자망선. 혼자 다루도록 만들어진 배다.
부두에서 그물을 깁는 어부
부두에서 그물을 깁는다. 어업의 절반은 그물을 손보는 일이다.
퓨젓 사운드의 건착망 어업, 1917년
퓨젓 사운드의 건착망 어업, 1917년경. 사람과 배가 이만큼 필요하다. 같은 바다에서도 배의 종류가 곧 처지였다.
연어

퓨젓 사운드에는 여러 종의 연어가 온다. 소설에 자주 나오는 실버(silver)는 은연어(coho)의 통칭이다. 연어는 회유한다 — 바다에서 몇 해를 살다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온다. 그 돌아오는 길목이 곧 어장이고, 그래서 언제 어디에 그물을 놓을지가 어부의 전 재산이 되는 지식이다.

은연어
은연어(coho). 현지에서는 실버라고 부른다. 다 자라면 3~6kg 정도다.
홍연어
홍연어(sockeye). 종마다 회유하는 시기가 달라서, 어부의 한 해는 어떤 연어가 언제 오느냐로 짜인다.
06

딸기밭

이 섬의 다른 절반은 딸기다. 왜 하필 딸기였나.

  • 1900년대 초 이 지역에 딸기를 들여온 것이 일본계 이민이다. 한때 워싱턴주 딸기의 3분의 2가 베인브리지에서 났다.
  • 딸기는 땅이 적어도 되고 심은 해에 수확이 나온다 — 땅을 가질 수 없어 소작·단기 임차로 버티던 사람들에게 맞는 작물이었다.
  • 그래서 땅을 둘러싼 거래는 문서 없는 말로 한 약속이 많았다. 한쪽이 사라지면 증명할 방법이 없다.
  • 1942년 봄 몇 년 만의 대풍을 두고 떠났고, 돌아왔을 때 밭이 남은 집은 많지 않았다.

1900년대 초, 퓨젓 사운드 지역에 딸기 농사를 들여온 것이 일본계 이민이다. 한때 워싱턴주 딸기의 3분의 2가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에서 났다.

딸기를 고른 이유가 있다. 이 작물은 땅이 적어도 되고, 손이 많이 가고, 심은 해에 수확이 나온다. 큰 자본 없이 가족 노동으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땅을 소유할 수 없어 소작이나 단기 임차로 붙어 있어야 했던 사람들에게 이보다 맞는 작물이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오래 걸리는 과수원 같은 것은 처음부터 선택지가 아니었다.

일은 고됐다. 04장에서 본 그루터기를 뽑아 밭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딸기는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따야 한다. 수확기가 되면 온 가족이 밭에 나갔고, 학교가 방학을 그 시기에 맞추는 지역도 있었다.

1942년 봄, 사람들이 실려 나갔을 때 딸기는 몇 년 만의 대풍이었다. 그해 수확은 필리핀계 일꾼들이 빈 농가에 들어와 마쳤다. 돌아왔을 때 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은 많지 않았다 — 세금이 밀려 넘어갔거나, 맡긴 사람이 돌려주지 않았거나, 이미 팔려 있었다. 베인브리지는 이 점에서 예외에 가까웠다. 이웃이 밭을 지켜 준 집이 여럿 있었고, 절반이 넘는 가족이 섬으로 돌아왔다.

딸기
딸기. 땅이 적어도 되고, 손이 많이 가고, 심은 해에 나온다 — 땅을 가질 수 없던 사람들에게 맞는 작물이었다.
일본계 농장 노동자
일본계 농장 노동자. 수확기에는 온 가족이 밭에 나갔다.
말로 한 약속

땅을 살 수 없으니 문서로 남길 수 없는 거래가 오갔다. 백인 이웃 명의로 땅을 두고 몇 해에 걸쳐 대금을 갚거나, 소작을 하다 나중에 넘겨받기로 하거나. 이런 약속은 서로 신뢰가 있는 동안에는 잘 굴러가지만, 한쪽이 사라지거나 마음을 바꾸면 증명할 방법이 없다. 1942년 3월에 섬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그 약속을 지킬 상대도, 다툴 자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07

1941년 12월부터

진주만에서 종전까지. 이 소설의 회상이 가장 자주 돌아가는 시기다.

  •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당일부터 FBI가 미리 만든 목록으로 일본계 지도층을 체포했다. 남은 집들은 일본 물건을 태우거나 묻었다.
  • 1942년 2월 행정명령 9066호로 12만 명이 옮겨졌다. 같은 적국 출신인 독일·이탈리아계는 이렇게 옮겨지지 않았다 — 인종 편견과 이해관계가 이유였다.
  • 1942년 3월 30일, 베인브리지 섬 주민 227명이 미국에서 가장 먼저 페리로 실려 나갔다. 통보부터 출발까지 엿새였다.
  • 옮겨진 사람의 3분의 2가 미국 시민이었다. 짐은 두 손에 들 수 있는 만큼이었다.
  • 전쟁이 끝나 돌아갔을 때 집과 밭이 남은 경우는 드물었다. 베인브리지는 예외에 가까웠다.

1941.12.07

진주만

공격 당일 저녁부터 연방수사국(FBI)이 서해안 일본계 사회의 지도층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불교 승려, 일본어 학교 교사, 신문 기자, 무역회사 간부, 현인회(縣人會) 임원, 그리고 유도·검도 도장 관계자가 목록에 있었다. 며칠 안에 수천 명이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남은 집에서는 일본어 책·편지·사진·기모노·칼을 태우거나 묻었다.

진주만
강제 이주를 알리는 신문 1면들.

1942.02.19

행정명령 9066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 명령문에는 ‘일본’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육군장관이 “군사 구역”을 지정하고 그 구역에서 “임의의 또는 모든 사람”을 배제할 수 있다고만 적었다. 인종을 명시하지 않은 이 문장이 12만 명을 옮기는 근거가 되었다.

행정명령 9066호
“일본계 조상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알림.” 전신주와 게시판에 붙은 퇴거 공고.

1942.03.24

퇴거명령 제1호 — 대상은 베인브리지 아일랜드

서부방위사령관 존 L. 드윗 중장이 서명했다. 첫 대상이 이 섬이었던 이유는 퓨젓 사운드 해군 조선소와 가깝다는 것이었다. 명령은 주민들에게 엿새를 주었다. 그 엿새 안에 농장을 팔거나 빌려주고, 세간을 맡기거나 헐값에 넘기고, 기르던 짐승을 남에게 부탁하고, 작별을 해야 했다.

퇴거명령 제1호 — 대상은 베인브리지 아일랜드
게시된 퇴거명령.

1942.03.30

오전 11시, 페리

섬에 살던 일본계 276명 가운데 227명이 무장 경비 아래 페리 케홀로켄호에 올라 시애틀로 갔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캘리포니아 만자나르로 향했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집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날 섬을 비운 사람은 돌아올 수 없었다. 두고 온 딸기밭은 그해 몇 년 만의 대풍이었고, 필리핀계 일꾼들이 빈 농가에 들어와 수확을 마쳤다.

오전 11시, 페리
시애틀을 떠나는 특별열차에서 손을 흔드는 베인브리지의 아이들. 1942년 3월 30일.

1942 봄~여름

집합소, 그리고 수용소

서해안 전역에서 12만 명이 옮겨졌다. 먼저 경마장·박람회장 같은 집합소에 모였다 — 마구간을 치우고 그대로 쓴 곳도 있었다. 거기서 내륙의 수용소 10곳으로 보내졌다. 짐은 두 손에 들 수 있는 만큼이었다. 옮겨진 사람의 3분의 2가 미국 시민이었다.

집합소, 그리고 수용소
퇴거를 기다리는 모치다 가족, 캘리포니아 헤이워드. 도로시아 랭 촬영. 아이들 옷에 가족 번호표가 달려 있다.

1943.02

충성 설문

정부가 17세 이상 전원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문제는 마지막 두 문항이었다. 27번은 명령받는 곳 어디서든 전투 임무를 수행하겠느냐고 물었고, 28번은 미국에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천황에 대한 어떤 형태의 충성도 파기하겠느냐고 물었다. 28번은 1세에게 함정이었다 — 법이 그들의 귀화를 막아 놓았으므로, 일본 국적을 버리면 어느 나라의 국민도 아니게 된다. 2세에게는 다른 함정이었다. 애초에 한 적 없는 맹세를 “파기하겠다”고 답하는 것은 그런 맹세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충성 설문
만자나르에서 등록 절차를 설명하는 육군 장교.

1943.02.01

442연대전투단 창설

2세로만 이루어진 부대다. 하와이에서 2,686명, 본토 수용소에서 1,500명이 미시시피 셸비 기지에 모였다. 가족이 철조망 안에 있는 채로 유럽 전선에 나간 병사가 많았다. 부대 표어는 “Go for Broke” — 하와이 노름판에서 판돈을 다 거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442연대전투단 창설
442연대전투단, 하와이 이올라니 궁전 앞. 1943년 3월.

1943.11.20 – 23

타라와

중부 태평양의 환초 타라와, 그중 베티오라는 폭 3km 남짓의 섬을 미 해병대가 공격했다. 산호초를 넘을 만큼 물이 차오를 것으로 계산했는데, 하필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작은 조금(小潮) 때라 수심이 예상보다 60cm 얕았다. 상륙정이 암초에 얹혀 버렸고 해병들은 450m를 걸어서 해변까지 가야 했다. 76시간 만에 약 6,400명이 죽었다. 미국 여론이 처음으로 태평양 전쟁의 대가를 실감한 전투다.

타라와
타라와 레드비치 3호 해안, 방파제 뒤에 엎드린 해병들.

1944.10.27 – 30

잃어버린 대대

프랑스 보주 산지에서 텍사스 출신 141연대 1대대가 독일군에 포위됐다. 442연대가 구출 명령을 받고 닷새를 싸워 211명을 구해 냈다. 그 대가로 800명이 죽거나 다쳤다. 442연대는 규모와 복무 기간을 감안할 때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부대다 — 명예훈장 21개, 은성훈장 371개, 퍼플하트 4,000개 이상.

잃어버린 대대
프랑스 브뤼예르에서 부대 표창을 받는 442연대. 1944년 11월 12일.

1945.08 – 1946

돌아갈 곳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가 닫혔다. 그러나 돌아갈 집과 밭이 남아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세금을 못 내 넘어갔거나, 맡긴 사람이 돌려주지 않았거나, 이미 팔렸다. 서해안 곳곳에서 귀환자에 대한 협박·방화·총격이 일어났다. 베인브리지는 예외에 가까웠다 — 이웃이 밭을 지켜 준 집이 여럿 있었고, 절반 넘는 가족이 섬으로 돌아왔다.

돌아갈 곳
베인브리지 아일랜드 일본계 미국인 배제 기념비.
왜 일본계만, 왜 시민까지 전부였나

두려움. 진주만 직후 서해안은 일본군이 상륙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실제로 그런 위협은 없었다.

그런데 같은 적국이라도 달랐다. 미국은 독일·이탈리아와도 전쟁 중이었고, 독일계·이탈리아계 주민은 수백만 명이었다. 그러나 수용된 것은 그 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 수천 명뿐이었다. 일본계만 미국 시민까지 전부 옮겨졌다. 서부방위사령관 드윗 중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놈은 일본놈이다. 미국 시민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이해관계. 캘리포니아 채소 재배업자 단체의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기적인 이유로 일본인을 몰아내려 한다고들 한다. 맞다.」 일본인 농부가 사라지면 그 밭은 백인 농부의 것이 된다.

결정적인 비교는 하와이다. 하와이는 진주만이 있는 곳이고, 일본계가 주민의 3분의 1이 넘었다. 그런데 하와이에서는 대량 수용이 없었다. 갇힌 사람은 1,200~1,800명이었다. 일본계가 없으면 섬의 경제가 멈추기 때문이었다. 정말 위험해서 옮긴 것이라면 하와이가 먼저였어야 한다.

1983년 의회 조사위원회는 원인을 이렇게 정리했다 — 인종 편견, 전시 히스테리, 정치적 지도력의 실패. 일본계의 불충을 보여 주는 증거는 거의 없었다.

'나는 미국인이다' 간판을 내건 가게
진주만 다음 날, 오클랜드의 일본계 상점 주인이 내건 간판이다. “I AM AN AMERICAN.” 그는 곧 수용소로 갔고 가게는 문을 닫았다.
이름표를 단 아이
옷에 가족 번호표를 달고 출발을 기다리는 아이. 사람이 아니라 화물처럼 번호로 관리됐다.
쌓인 짐
가져갈 수 있는 짐은 두 손에 들 수 있는 만큼이었다. 나머지는 팔거나, 맡기거나, 버렸다.
1차 대전 참전 군복을 입고 집합소에 들어서는 노인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했던 표시가 있는 군복을 입고 집합소에 들어서는 노인. 그 복무도 그를 예외로 만들지 못했다.

1941년 12월, 집집마다 불을 피웠다

진주만 공격 당일 저녁부터 FBI가 움직였다. 무작위 체포가 아니었다 — 목록이 이미 있었다. 불교 승려, 일본어 학교 교사, 일본어 신문 기자, 무역회사 간부, 같은 현 출신 모임인 현인회의 임원, 그리고 유도·검도 도장의 지도자. 공동체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일수록 목록의 위쪽에 있었다. 며칠 안에 수천 명이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남은 집에서는 태웠다. 일본어 책, 편지, 사진, 기모노, 인형, 제사 도구, 칼. 아무 죄가 없는 물건들이지만 그것이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음 목록에 오를 수 있었다. 마당에 묻은 집도 있고 바다에 버린 집도 있다. 이 소설의 1세 세대가 잃어버린 물건들은 대개 그때 없어진 것이다.

여기서 검도를 짚어 둘 값어치가 있다. 1세 부모들이 자녀를 검도장에 보낸 것은 무술을 시키려는 게 아니라 일본식 예법과 자세를 잃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 일본어 학교와 같은 이유다. 그런데 미국 당국은 검도를 일본 군국주의와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도장 관계자가 체포 대상이 되었고, 여러 집에서 죽도와 호구를 태우거나 묻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되살아나지 못했다.

19세기 일본의 검술 수련
19세기 일본의 검술 수련을 그린 그림. 이민 1세대가 알고 있던 검도는 이런 것이었다.
검도 경기
검도. 부모가 자녀를 보낸 이유는 예법과 자세였는데, 1941년 이후 그것이 체포의 사유가 되었다.
퇴거 직전 문을 닫는 상점
퇴거 직전 정리 중인 상점. 재고를 헐값에 넘기고 문을 닫았다. 다시 여는 경우는 드물었다.
08

수용소

10곳이 있었다. 이 소설에 관계되는 것은 만자나르와 미니도카 둘이다.

  • 1942년 2월 행정명령 9066호로 서해안의 일본계 약 12만 명이 퇴거 대상이 됐다.
  • 그중 3분의 2가 미국 시민이었다. 개인별 혐의도, 재판도 없었다.
  • 짐은 들고 갈 수 있는 만큼이었다. 농장·배·가게는 헐값에 넘기거나 그냥 두고 떠났다.
  • 베인브리지 아일랜드가 전국에서 첫 번째였다 — 통보에서 출발까지 엿새였다.
  • 수용소는 사막이나 습지에 세워졌고, 철조망과 감시탑이 있었다.

베인브리지 사람들은 캘리포니아 만자나르로 갔다. 시에라네바다 산맥 동쪽 기슭의 사막, 해발 1,200m다. 여름은 38도를 넘고 겨울에는 눈이 오며, 바람이 불면 온통 먼지다. 연 강수량이 130mm도 안 된다. 퓨젓 사운드의 습한 숲에서 살던 사람들이 그 반대편 극단으로 옮겨진 것이다.

숙소는 가로 6m 세로 7.5m 방 하나에 여덟 명까지였다. 소나무 판자에 타르지를 씌운 건물인데, 생나무가 마르면서 판자 사이가 벌어졌다. 그 틈으로 먼지가 들어왔다. 화장실과 목욕탕은 공용이고 칸막이가 없었다. 식사는 식당에 줄을 서서 받았다 — 그래서 가족이 한자리에서 밥을 먹는 습관이 무너졌다. 이것이 수용소 생활이 가정에 남긴 가장 조용한 파괴로 꼽힌다.

대부분의 베인브리지 사람들은 나중에 아이다호 미니도카로 옮겨졌다. 워싱턴·오리건·알래스카 출신이 모인 곳이라, 이웃과 다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 이주국(WRA) 수용소 10곳 · 최대 인원 순 — 베인브리지 사람들은 만자나르로 갔다가 대부분 미니도카로 옮겨졌다
수용소위치운영 기간최대 인원어디서 온 사람들
툴레이크캘리포니아1942.05 – 1946.0318,700북캘리포니아·오리건·워싱턴. 1943년 격리 수용소로 바뀐다
포스턴애리조나1942.06 – 1945.1117,814남캘리포니아. 세 구역으로 나뉜 최대 규모
힐라리버애리조나1942.07 – 1945.1113,348로스앤젤레스·프레즈노. 정원 1만에 1만 3천이 들어갔다
하트마운틴와이오밍1942.08 – 1945.1110,767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
만자나르캘리포니아1942.03 – 1945.1110,046로스앤젤레스·스톡턴, 그리고 베인브리지 아일랜드
미니도카아이다호1942.08 – 1945.109,397워싱턴·오리건·알래스카. 베인브리지 사람들이 나중에 옮겨 간 곳
토파즈유타1942.09 – 1945.109,000샌프란시스코 만 일대 (약)
제롬아칸소1942.10 – 1944.068,497로스앤젤레스·하와이. 가장 먼저 닫혔다
로워아칸소1942.09 – 1945.118,475캘리포니아
그래나다 (아마치)콜로라도1942.08 – 1945.107,318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 가장 작았다
수용소 위치 지도
수용소 10곳의 위치. 전부 서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사막·습지·황무지다. 사람이 살지 않던 땅을 골랐다.
만자나르의 막사 거리
만자나르의 막사. 뒤에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보인다.
만자나르 막사 내부
막사 한 칸의 내부. 이 정도 공간에 한 가족이 살았다.
식당 앞 줄
식당 앞에 선 줄. 가족이 함께 밥을 먹던 생활이 여기서 끊겼다.
만자나르 감시탑
감시탑. 철조망과 탑은 안쪽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사람들이 야구를 하고 밭을 갈고 학교를 다닌다. 이것은 수용소가 견딜 만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 반대다 —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던져진 사람들이 몇 달 만에 마을을 하나 만들어 낸 것이다. 신문을 찍고, 상점을 열고, 야구 리그를 짜고, 사막에 물을 대 채소를 길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자나르의 야구 경기
만자나르의 야구 경기, 1943년. 앤설 애덤스 촬영.
만자나르의 농사
사막에 만든 밭과 윌리엄슨 산.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었다.
미니도카 국립사적지 입구
미니도카 자리에 남은 입구 건물. 아이다호 남부의 화산암 사막이다. 베인브리지 사람들 대부분이 만자나르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 워싱턴·오리건 출신이 모인 곳이라 이웃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툴레이크 수용소
툴레이크. 1943년부터 ‘불충’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모은 격리 수용소가 되고, 계엄령이 내려진다.
만자나르의 할아버지와 손자
만자나르의 1세 노인과 2세 손자. 한 사람은 평생 외국인이었고 한 사람은 태어나면서 미국 시민이었다. 둘 다 같은 철조망 안에 있었다.
09

두 개의 질문

1943년, 종이 한 장이 공동체를 갈랐다. 그 균열은 전쟁이 끝나고도 오래 남는다.

  • 1943년, 수용된 사람들에게 충성 심사 설문이 돌았다.
  • 문제는 두 문항이었다 — 미군 복무 의사, 그리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 포기.
  • 1세는 미국 시민이 될 수 없으니, 포기한다고 답하면 어느 나라 국민도 아니게 된다.
  • 둘 다 아니오로 답한 사람들이 ‘노노 보이’로 불리며 툴리레이크로 분리 수용됐다.
  • 이 설문이 공동체를 갈랐고, 균열은 전쟁이 끝나고도 남았다. 소설의 1954년은 그 뒤다.

1943년 2월, 정부가 수용소의 17세 이상 전원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원래 목적은 군에 지원할 2세를 가리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여자와 노인에게까지 같은 종이가 갔다. 문제는 마지막 두 문항이었다.

질문 27
싸우겠는가

“명령받는 곳이 어디든 미군의 전투 임무에 복무할 의사가 있는가?”

수용소에 갇힌 채 이 질문을 받았다. 60대 노인과 여성에게도 같은 문항이 갔다.

질문 28
충성을 맹세하겠는가

“미합중국에 무조건적 충성을 맹세하고 외국 또는 국내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미국을 성실히 방어하며, 일본 천황이나 다른 어떤 외국 정부·권력·조직에 대한 어떤 형태의 충성이나 복종도 파기하겠는가?”

28번이 왜 함정이었나 — 두 가지 이유가 세대별로 달랐다

1세에게. 이들은 법으로 미국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예”라고 답해 일본 국적을 파기하면 어느 나라의 국민도 아닌 사람이 된다. 무국적이 된 채 전쟁 중인 적국 출신으로 남는 것이다. 충성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2세에게. 이들은 태어나면서 미국 시민이었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다. 없는 것을 “파기하겠다”고 답하는 것은 그런 충성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꼴이다. 게다가 시민인 자신을 가둬 놓고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두 문항 모두에 “아니오”라고 답한 사람들이 노노보이라고 불렸다. 이유는 사람마다 달랐다 — 항의, 무국적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가족과 헤어지지 않으려는 선택, 부모를 따르기 위한 결정. 그러나 정부는 이유를 묻지 않고 하나로 묶어 툴레이크로 보냈다. 그곳은 계엄령이 내려진 격리 수용소가 되었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5,589명 중 98%가 그곳에서 포기했다.

반대편에는 지원한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이 철조망 안에 있는 채로 유럽 전선에 나갔다. 2세로만 이루어진 442연대전투단이다. 프랑스 보주 산지에서 포위된 텍사스 부대 211명을 구해 내는 데 8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규모와 복무 기간을 감안하면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부대다.

이 두 선택 사이의 골이 이 소설의 배경에 깔려 있다. 같은 마을 사람들이 한쪽은 아들을 전쟁에 보냈고 한쪽은 노노보이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도 이 이야기는 공동체 안에서 오래 하지 못하는 말로 남았다.

만자나르의 등록 절차 설명
만자나르에서 등록 절차를 설명하는 육군 장교. 여기서 그 설문지가 배포됐다.
프랑스의 442연대 분대장
프랑스에서의 442연대 분대장.
Go For Broke
부대 표어 “Go for Broke” — 하와이 노름판에서 판돈을 전부 거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군사정보국 어학교
군사정보국(MIS) 어학교. 일본어를 하는 2세들이 태평양 전선에서 번역과 심문을 맡았다. 활동이 오래 기밀이어서 전후에도 말하지 못했다.
10

태평양의 전장

1954년 섬의 백인 남자들 상당수가 태평양에서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 전쟁이 어떤 것이었나.

  • 태평양 전쟁은 섬을 하나씩 빼앗는 상륙전이었다. 좁은 땅에서 사상자가 몰렸다.
  • 1943년 11월 타라와 — 물이 예상보다 얕아 해병들이 450m를 걸어서 상륙했고, 76시간 만에 약 6,400명이 죽었다.
  • 전사자 사진이 처음 공개되면서 미국 여론이 이 전쟁의 값을 실감했다.
  • 이 전쟁은 인종의 증오가 밴 전쟁이었다. 적을 얼굴로 미워하도록 배운 사람들이, 같은 얼굴을 한 일본계 이웃이 있는 섬으로 돌아왔다.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은 성격이 아주 달랐다. 태평양은 섬 하나씩 빼앗는 전쟁이었다. 상륙정으로 해변에 내려 참호와 벙커에 박힌 수비대를 밀어내는 방식이라, 좁은 땅에서 사상자가 집중적으로 났다. 그리고 항복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던 일본군을 상대로 거의 전멸시킬 때까지 싸웠다.

그 성격을 미국 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것이 타라와다.

1943.11.20–23
타라와 · 베티오

중부 태평양 길버트 제도의 환초. 그중 베티오는 폭 3km 남짓의 작은 섬이다. 활주로가 있어 다음 진격의 발판으로 필요했다.

계산 착오
60cm의 물

산호초를 넘으려면 수심 1.5m가 필요했는데 90cm밖에 안 됐다. 하필 그날이 조금이었다. 조금(小潮)은 보름에 한 번씩 오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작은 때다 — 밀물 때가 돼도 물이 평소만큼 차오르지 않는다. 상륙정이 암초에 얹혔다.

결과
450m를 걸어서

해병들은 배에서 내려 가슴까지 오는 물속을 450m 걸어 해변으로 갔다. 그동안 기관총 사격에 노출됐다.

76시간
6,400명

나흘 만에 미군 약 1,700명, 일본·조선인 수비대 4,690명이 죽었다. 이 작은 섬 하나에서다.

미국 여론이 충격을 받은 것은 사진과 영상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미군 전사자의 시신은 언론에 나오지 않았다. 타라와에서 처음으로 해변에 널린 시신이 보도됐고, “이 작은 섬 하나에 그만한 값을 치를 이유가 있었나”라는 질문이 나왔다. 한 장군은 이 손실을 게티즈버그의 피켓 돌격에 비유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는 유럽 전선에 없던 것이 있었다 — 인종의 증오다. 미국의 선전 포스터와 신문은 일본군을 원숭이나 벌레로 그렸다. 병사들은 1942년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들이 굶주린 채 끌려가다 죽어 간 바탄 죽음의 행진 소식을 들었고,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덤비는 적을 상대했다. 독일군은 「나치」라는 체제로 미워할 수 있었지만, 일본군은 얼굴로 미워하게 됐다.

돌아온 사람들에게 이 전쟁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온 섬에는 일본계 이웃이 있었다. 1954년의 섬은 그 두 사실이 한 자리에 놓여 있는 곳이다.

타라와 레드비치의 해병들
타라와 레드비치 3호. 방파제 뒤에 엎드린 해병들. 이 뒤가 곧 전선이었다.
타라와의 진격
일본군 벙커를 향해 나아가는 해병들. 섬 전체가 폭 3km 남짓이다.
타라와의 임시 무덤
묘비를 만들기 전의 임시 무덤. 뒤에 세운 천막이 이 섬에 처음 생긴 미군 시설이다. 이런 사진이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된 것이 타라와였고, 그때부터 미국 여론은 태평양 전쟁의 값을 알게 된다.
11

미국 형사재판 읽는 법

한국 형사재판과 다른 지점만 모았다. 이 소설의 재판이 어떻게 되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 유무죄는 판사가 아니라 시민 배심원 열두 명이 정한다. 법정의 모든 말은 배심원석을 향한다.
  • 시신을 판정하는 코로너와 수사를 맡는 보안관은 선거로 뽑힌다. 코로너는 의사가 아닐 수 있다.
  • 배심 선정(voir dire)이 재판의 절반이다. 작은 섬에서는 배심원 후보와 관계자가 서로 아는 사이다.
  • 증명 책임은 검사에게만 있다. 피고인은 무죄를 증명할 필요도, 증언할 의무도 없다.
  • 정황증거만으로도 유죄가 될 수 있다. 다만 무죄와 맞는 합리적 설명이 하나라도 남으면 유죄로 갈 수 없다.

가장 큰 차이 하나부터. 유죄냐 무죄냐를 판사가 정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뽑힌 시민 열두 명이 정한다. 판사는 절차를 이끌고 법을 설명하며, 유죄가 나오면 형을 정한다. 그러니 미국 형사재판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말을 거는 상대는 판사가 아니라 배심원석이다. 법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연출 — 목소리, 눈맞춤, 물건을 들어 보이는 몸짓 — 이 그 열두 명을 향한다.

왜 전문가인 판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맡기나. 미국은 영국 식민지 시절 왕이 보낸 판사에게 재판받던 기억에서 출발했다. 독립선언서는 영국 왕의 죄목 가운데 하나로 「배심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은 것」을 꼽는다. 그래서 국가가 시민을 처벌하려면 그 지역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원칙을 헌법(수정헌법 6조)에 넣었다.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인 셈이다. 그 대가로 재판은 그 지역의 여론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1
시신이 나오면 코로너부터

코로너(검시관)는 카운티의 선출직이고, 20세기 중반까지 의학 교육을 요구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사망의 원인·시각·종류(자연사·사고사·자살·타살)를 판정한다. 한국의 부검의와 달리 의사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2
보안관도 선출직

카운티의 최고 사법 집행관인 보안관도 선거로 뽑는다. 임명된 경찰서장과 다르다. 그 말은 지역 여론이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다.

3
기소

주(州) 차원의 형사사건은 카운티 검사가 담당한다. 대배심을 거치는 주도 있고, 검사가 직접 기소장을 내는 주도 있다.

4
배심 선정 — 사실상 절반

voir dire, 직역하면 “진실을 말하다”.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 후보를 심문해 편견이 있는 사람을 걸러 낸다. 사유를 대고 배제할 수도 있고, 사유 없이 몇 명까지 배제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열두 자리에 앉느냐가 재판의 절반이다.

5
증명 책임은 검사에게만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beyond a reasonable doubt) 유죄를 입증할 책임은 전적으로 검사에게 있다. 피고인은 자기 무죄를 증명할 의무가 없고, 증언대에 서지 않을 권리도 있다. “변명을 안 했으니 유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6
정황증거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추론을 거쳐야 사실에 닿는 증거. 약한 증거로 오해받지만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 정황증거만으로 유죄가 나올 수 있다. 다만 무죄와 양립하는 합리적인 설명이 하나라도 남으면 유죄로 갈 수 없다.

이 소설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

배심은 그 지역 주민으로 구성된다. 인구 몇천 명의 섬이라면 배심원 후보와 사건 관계자가 서로 아는 사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voir dire 는 미국 소설·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장면이고, 그 절차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고 읽으면 훨씬 잘 보인다.

그리고 정황증거라는 말이 나오면 위의 마지막 문장을 기억하면 좋다 — 무죄와 양립하는 합리적 설명이 하나라도 남으면 유죄로 갈 수 없다. 변호인이 하는 일은 그 설명 하나를 세우는 것이다.

1954년이라는 시점

전쟁이 끝난 지 9년이다. 태평양에서 싸운 사람들이 아직 30대이고, 수용소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다시 밭을 일구고 있다. 일본계에 대한 편견을 공공연히 말해도 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재판이라는 절차는 중립을 전제하지만, 그 절차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 안에 있다.

12

사과까지 46년

1942년 강제수용에서 1988년 정부의 공식 사과까지 46년이 걸렸다. 소설이 끝나는 자리 뒤로 실제 역사가 이어진다. 1954년의 사람들은 이 뒤를 모른다.

  • 1945년 수용소가 닫혔지만 돌아갈 곳이 남아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 1976년 포드 대통령이 행정명령 9066호를 공식 폐기했다 — 34년 만이다.
  • 돌아온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말하지 않았다. 민권운동 세대의 자녀들이 묻기 시작하고, 1981년 청문회에서 750여 명이 처음으로 증언했다.
  • 그 증언이 1988년 시민자유법을 만들었다. 생존자 8만여 명에게 사과와 배상이 이뤄졌다.
  • 법은 원인을 셋으로 못박았다 — 인종 편견, 전시 히스테리, 정치적 지도력의 실패. 군사적 필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 그런데 강제수용을 합헌이라 한 판례가 대법원에서 부정된 것은 2018년이다. 사과가 판례를 지우지는 않았다.

왜 46년이나 걸렸나

돌아온 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다. 부끄러움(하지), 참고 견디는 태도(가만), 그리고 자녀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2세들은 서둘러 「모범적인 미국인」이 되어 과거를 덮으려 했고, 자녀에게도 그 시절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1960~70년대 민권운동 속에서 자란 젊은 세대였다. 그 흐름 속에서 자기 뿌리에 눈뜬 3세들이 부모와 조부모에게 묻기 시작했다. 1981년 의회 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750명이 넘는 사람이 증언대에 섰다. 많은 이에게 그것이 처음으로 입 밖에 낸 이야기였다. 그 증언이 1988년의 사과를 만들었다.

1952

귀화의 문이 열리다

매캐런–월터법이 인종에 따른 귀화 제한을 없앴다. 오자와 판결로부터 30년, 이민이 시작된 지 80여 년 만에 1세도 미국 시민이 될 수 있게 됐다. 이 소설의 시점인 1954년은 그 문이 막 열린 직후다 — 섬의 1세 노인들이 평생 처음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된 시기다.

1967

워싱턴주 외국인 토지법 폐지

1921년 법이 46년 만에 없어졌다. 1954년의 산피에드로는 이 법이 아직 살아 있는 세계다.

1976.02.19

행정명령 9066호 공식 폐기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선언 4417호에 서명했다. 서명일을 EO 9066 서명일과 같은 날짜로 맞췄다. “우리는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안다”고 적었다. 34년이 지난 뒤였다.

행정명령 9066호 공식 폐기
행정명령 9066호의 종료를 확인하는 선언에 서명하는 포드 대통령.

1983

코레마쓰·히라바야시·야스이

전시에 퇴거 명령을 거부하고 유죄를 받았던 세 사람의 사건이 다시 열렸다. 정부가 대법원에 불리한 정보를 숨겼다는 문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유죄 판결은 취소됐다. 다만 취소된 것은 세 사람 개인의 유죄이고, 1944년 대법원이 강제수용을 합헌이라고 한 판례 자체는 그대로 남았다.

코레마쓰·히라바야시·야스이
프레드 코레마쓰·미노루 야스이·고든 히라바야시.

1988.08.10

시민자유법 — 46년 만의 사과

레이건 대통령이 서명했다. 생존자 82,219명에게 각 2만 달러를 지급하고, 정부가 공식으로 사과했다. 법은 그 원인을 세 가지로 못박았다 — 인종 편견, 전시 히스테리, 그리고 정치적 지도력의 실패. 군사적 필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시민자유법 — 46년 만의 사과
시민자유법에 서명하는 레이건 대통령. 1988년 8월 10일.

1994

이 소설이 나오다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에 살던 고등학교 교사 데이비드 구터슨이 10년에 걸쳐 쓴 첫 장편이 나왔다. 이듬해 펜/포크너 상을 받는다. 소설의 산피에드로는 실재하지 않지만, 그 섬에 있는 것들 — 딸기밭, 자망 어선, 삼나무, 그리고 1942년 3월의 페리 — 은 전부 실재한 것이다.

2011.08

니도토 나이 요니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에 일본계 미국인 배제 기념비가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떠난 바로 그 부두 자리다. 삼나무로 세운 벽에 그날 섬을 떠난 27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의 이름은 “二度とないように”(니도토 나이 요니) —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니도토 나이 요니
기념비의 삼나무 벽. 떠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018.06.26

판례가 74년 만에 부정되다

대법원이 다른 사건(트럼프 대 하와이)을 판결하면서, 로버츠 대법원장이 판결문에 “코레마쓰는 결정된 날부터 심각하게 잘못이었다”고 적었다. 1944년의 그 판례가 대법원에서 명시적으로 부정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1988년에 대통령이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급한 뒤로도 30년, 판례 자체는 살아 있었던 셈이다. 다만 이 문장이 판결의 결론이 아니라 곁들인 언급이라, 법적으로 완전한 파기인지는 논쟁이 남아 있다. 사과와 판례는 다른 것이다 — 잘못을 인정하는 일과, 그 잘못을 허용한 법 논리를 걷어내는 일은 따로 일어난다.

베인브리지 기념비의 삼나무 벽
베인브리지 아일랜드 일본계 미국인 배제 기념비. 사람들이 페리에 오른 바로 그 자리에 삼나무로 벽을 세우고 276명의 이름을 새겼다. 기념비의 이름은 “二度とないように” —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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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사전

읽다 걸리는 낱말들. 위쪽 검색창에 넣어도 여기로 잡힌다.

잇세이一世 / Issei세대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온 1세. 一(이치)·二(니)·三(산)에 世(세이, 세대)를 붙인 말이라 문자 그대로 1세·2세·3세다. 1922년 오자와 판결로 귀화가 막혀 죽을 때까지 외국인이었다. 영어가 서툰 경우가 많아 자녀와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1952년에야 시민이 될 수 있게 된다.

니세이二世 / Nisei세대

미국에서 태어난 2세. 태어나면서부터 미국 시민이고, 미국 학교에서 영어를 모어처럼 쓰며 자랐다. 1942년에 옮겨진 사람의 3분의 2가 이들이었다 — 시민이 시민에게 당한 일이다. 미국 사회는 이들을 미국인으로 보지 않았고, 이들은 부모의 일본어와 예법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 어느 쪽에서도 온전히 자기 자리가 아닌 세대다.

키베이帰米 / Kibei세대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2세. ‘미국으로 돌아오다’라는 뜻이다. 약 1만 명으로 추정된다. 부모가 일본어와 예법을 잃지 않게 하려고 보냈다. 전시에 정부가 특히 의심했고, 수용소 안에서 다른 2세와 사이가 나쁜 경우도 있었다.

산세이三世 / Sansei세대

2세의 자녀, 3세. 1954년에는 대부분 어린아이다. 이들이 자라 1970년대에 부모 세대가 입을 다문 수용소 이야기를 묻기 시작한다.

니케이日系 / Nikkei세대

일본계 이주민과 그 후손 전부를 가리키는 말. 세대를 구분하지 않는다.

하쿠진白人 / Hakujin호칭

백인. 일본계 사회에서 백인 이웃을 부르던 일상어다. 멸칭은 아니고 그냥 구분어에 가깝다.

사진신부写真花嫁 / Picture bride제도

사진과 호적으로 성립시킨 결혼. 1907년 신사협정이 노동자의 입국은 막고 가족의 입국은 열어 둔 틈에서 나왔다. 서해안으로만 1만 명 이상이 이렇게 왔다.

나코도仲人 / Nakōdo제도

중매인. 양가의 가문·건강·나이·재산을 조사하고 사진을 주고받게 했다.

데카세기出稼ぎ / Dekasegi이민

「돈 벌러 나간다」. 몇 해 벌어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한 이주다. 1세 대부분이 이렇게 떠났다가 가족이 생기면서 눌러앉았다.

황화론黄禍論 / Yellow Peril관념

「누런 피부의 위협」. 아시아인이 서양을 위협한다는 공포. 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이긴 뒤 미국 서해안에서 크게 퍼져 일본인 배척의 바탕이 됐다.

에일리언Alien법률 용어

외국인. 라틴어 alienus(「남의, 다른 사람에게 속한」)에서 왔다. 「외계인」은 나중에 생긴 뜻이고, 미국 법은 지금도 국적이 없는 사람을 공식적으로 이렇게 부른다. 「우리가 아닌 사람」이라는 거리가 배어 있는 말이다.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aliens ineligible for citizenship법률 용어

이 소설을 읽는 데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이다. 1870년 귀화법이 귀화 자격을 “자유로운 백인”과 아프리카계로 한정한 뒤 — 「백인」을 지우자는 안은 중국인을 막으려는 서부 의원들 때문에 무산됐다 — 이 표현이 일본인을 이름을 대지 않고 지목하는 도구가 되었다. 토지법도, 이민법도 전부 이 문구로 썼다.

외국인 토지법Alien Land Law법률

위 자격이 없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임차를 금지한 주법. 워싱턴주는 1921년에 제정하고 1923년에는 미국 태생 자녀 명의로 두는 것까지 막았다. 1967년 폐지.

오자와 대 미국Ozawa v. United States (1922)판결

28년을 미국에서 산 오자와 다카오가 자신도 “자유로운 백인”이라고 주장했으나 연방대법원이 만장일치로 기각했다. 이 판결로 일본 출신 이민자 전체의 귀화 길이 막혔다.

행정명령 9066호Executive Order 9066명령

1942년 2월 19일 루스벨트 대통령 서명. 육군장관이 군사 구역을 정하고 그곳에서 “임의의 또는 모든 사람”을 배제할 수 있게 했다. 명령문에 ‘일본’이라는 말이 없다.

퇴거명령Civilian Exclusion Order명령

행정명령 9066호에 따라 지역별로 내려진 실제 집행 명령. 제1호의 대상이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였다(1942년 3월 24일). 통보에서 출발까지 엿새를 주었다.

집합소Assembly Center시설

수용소로 가기 전 임시로 모아 둔 곳. 경마장·박람회장이 쓰였고, 마구간을 청소해 그대로 가족 숙소로 쓴 곳도 있다.

전시 이주국War Relocation Authority (WRA)기관

수용소 10곳을 운영한 민간 기관. ‘이주(relocation)’라는 말 자체가 완곡어였다.

충성 설문Loyalty Questionnaire제도

1943년 2월, 17세 이상 전원에게 돌린 설문. 27번은 전투 임무를 수행하겠느냐, 28번은 미국에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파기하겠느냐고 물었다. 두 문항이 공동체를 갈랐다.

노노보이No-No Boy말

27·28번에 모두 “아니오”라고 답한 사람. 툴레이크 격리 수용소로 보내졌다. 답을 그렇게 한 이유는 사람마다 달랐다 — 항의, 가족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선택, 무국적이 될 것에 대한 두려움.

툴레이크 격리 수용소Tule Lake Segregation Center시설

1943년부터 ‘불충’으로 분류된 사람을 모은 곳. 계엄령이 내려졌고, 시민권을 포기한 5,589명 가운데 98%가 여기서 포기했다.

442연대전투단442nd Regimental Combat Team부대

2세로만 이루어진 부대. 표어 “Go for Broke”는 하와이 노름판에서 판돈을 전부 거는 것을 뜻한다. 규모 대비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았다. 가족이 수용소에 있는 채로 싸운 병사가 많았다.

군사정보국 어학병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MIS)부대

일본어를 하는 2세가 태평양 전선에서 문서 번역·포로 심문·감청을 맡았다. 442연대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규모가 비슷하다. 활동이 오래 기밀이어서 전후에도 말하지 못했다.

퓨젓 사운드Puget Sound지리

워싱턴주 서북부의 내해. 빙하가 깎아 만든 좁고 깊은 만이 육지 안으로 길게 들어와 있고, 그 사이에 섬이 흩어져 있다. 시애틀·타코마가 이 물가에 있다.

후안 데 푸카 해협Strait of Juan de Fuca지리

퓨젓 사운드와 태평양을 잇는 폭 19~40km, 길이 약 154km의 물길. 소설의 산피에드로 섬이 있는 곳이다. 북쪽은 캐나다 밴쿠버 섬, 남쪽은 미국 올림픽 반도이고 국경이 해협 한가운데를 지난다. 안개와 돌풍이 잦다.

산피에드로San Piedro Island지리

실재하지 않는 섬이다. 작가가 살던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와, 그가 조사한 여러 섬을 합쳐 만들었다. 그러나 섬 위의 것들 — 딸기밭, 자망 어선, 삼나무 숲, 1942년 3월의 페리 — 은 전부 실재했다.

베인브리지 아일랜드Bainbridge Island지리

시애틀에서 페리로 35분. 폭 8km, 길이 16km. 미국에서 가장 먼저 일본계 주민이 강제로 쫓겨난 곳이다. 작가 데이비드 구터슨이 이 섬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소설을 썼다.

웨스턴 레드 시더Western red cedar / Thuja plicata나무

태평양 북서부 숲을 이루는 거목. 한국어로는 ‘삼나무’로 옮기지만 일본 삼나무(스기)와는 다른 나무다. 향이 강하고 잘 썩지 않아 원주민이 카누·집·옷을 만들었고, 정착민은 지붕널로 썼다. 붉은 속살이 이 페이지 색의 유일한 따뜻한 자리다.

올림픽 반도Olympic Peninsula지리

해협 남쪽의 반도. 서쪽 끝은 연 강수량이 2,500mm를 넘는 온대우림이고, 동쪽 끝은 600mm도 안 되는 건조지다. 산 하나를 두고 이렇게 갈린다.

자망刺網 / Gillnet어업

그물코에 물고기의 아가미가 걸리게 하는 그물. 위쪽은 뜸줄(코르크)로 띄우고 아래쪽은 발줄(납)로 가라앉혀 물속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운다. 작은 고기는 빠져나가고 큰 고기는 머리가 안 들어가므로, 그물코 크기가 곧 잡을 물고기의 크기다.

표류 자망Drift gillnet어업

그물을 배에 매단 채 조류에 흘려보내는 방식. 퓨젓 사운드의 연어 어선이 밤에 하던 일이 이것이다. 어두워야 그물이 안 보이고, 연어는 밤에 움직인다. 한 사람이 배 한 척으로 하는 고된 일이다.

뜸줄과 발줄Corkline / Leadline어업

그물 위아래를 잡아 주는 두 줄. 뜸줄에 달린 부표가 수면에 떠 그물의 위치를 알려 준다. 밤바다에서 이 줄들이 어디 있는지가 곧 배의 위치 감각이다.

자망 어선Gillnetter배

혼자서 그물을 놓고 걷을 수 있게 만든 작은 배. 1931년에 나온 동력 드럼이 그물을 감아올리면서 손으로 걷던 시절보다 훨씬 멀리 나갈 수 있게 됐다.

건착망巾着網 / Purse seine어업

물고기 떼를 둘러싼 뒤 아래를 조여 자루처럼 닫는 그물. 여러 사람과 큰 배가 필요하다. 자망보다 자본이 드는 방식이라, 같은 바다에서도 배의 종류가 곧 처지였다.

실버Silver / Coho물고기

은연어. 퓨젓 사운드 자망 어업의 주 대상 중 하나다.

소작Sharecropping농사

땅 주인에게 수확의 일부를 내고 짓는 농사. 토지법으로 땅을 살 수 없던 일본계 가족이 흔히 놓이던 자리다. 계약이 말로만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이 나중에 문제를 만든다.

코로너Coroner법정

카운티의 검시관. 미국에서는 선거로 뽑는 자리이고, 20세기 중반까지 의학 교육을 요구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사망의 원인·시각·종류를 판정한다. 한국의 부검의와 달리 의사가 아닐 수 있다.

보안관Sheriff법정

카운티의 최고 사법 집행관. 이 자리도 선거로 뽑는다. 임명직 경찰서장과 다르다 — 그래서 지역 여론이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

배심Jury법정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판사가 아니라 시민 12명이 정한다. 판사는 절차를 진행하고 법을 설명하며, 유죄가 나오면 형을 정한다. 한국 형사재판과 가장 크게 다른 지점이다.

배심 선정Voir dire법정

직역하면 “진실을 말하다”.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 후보를 심문해 편견이 있는 사람을 걸러 내는 절차다. 사유를 대고 배제할 수도, 사유 없이 몇 명까지 배제할 수도 있다. 재판은 사실상 여기서 절반이 정해진다.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beyond a reasonable doubt법정

형사재판의 증명 기준. “아마 그랬을 것”으로는 안 된다. 유죄를 입증할 책임은 전적으로 검사에게 있고, 피고인은 자기 무죄를 증명할 의무가 없다.

정황증거Circumstantial evidence법정

직접 보거나 들은 것이 아니라 추론을 거쳐야 사실에 닿는 증거. 흔히 약한 증거로 오해받지만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 정황증거만으로 유죄가 나올 수 있다. 다만 무죄와 양립하는 합리적 설명이 하나라도 남으면 유죄로 갈 수 없다.

검시 심문Coroner's inquest법정

코로너가 사망의 종류(자연사·사고사·자살·타살)를 판정하기 위해 여는 절차. 형사재판이 아니고 유무죄를 가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타살’이 나오면 그다음이 시작된다.

검도剣道 / Kendō문화

죽도로 하는 일본 검술. 1세 부모들이 자녀에게 일본식 예법과 자세를 가르치려고 시켰다. 그런데 진주만 이후 검도·유도 지도자가 FBI 체포 목록에 올랐다. 도구를 태우거나 묻은 집이 많았고, 전후에도 한동안 되살아나지 못했다.

일본어 학교日本語学校 / Nihongo gakkō문화

2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던 방과 후 학교. 미국 학교가 끝나고 다시 가는 곳이라 아이들에게는 부담이었다. 이 학교의 교사들도 1941년 12월의 체포 대상이었다.

현인회県人会 / Kenjinkai문화

같은 현(県) 출신끼리 만든 상호부조 모임. 낯선 땅에서 돈을 빌리고 일자리를 얻고 장례를 치르는 실질적 조직이었다. 이 모임의 임원도 체포 목록에 있었다.

온恩 / On관념

받은 은혜와 그에 대한 의무. 일본계 1세 세대의 인간관계를 지탱한 관념이다. 갚아야 할 빚으로 남고, 갚지 못하면 짐이 된다. 소설에서 세대 간에 말이 어긋나는 자리에 자주 이것이 있다.

하지恥 / Haji관념

부끄러움. 개인의 잘못이 가족 전체의 이름에 닿는다는 감각이다. 그래서 억울해도 말하지 않는 선택이 나온다 — 밖에서 보면 침묵이 자백처럼 보인다.

시카타 가 나이仕方がない관념

“어쩔 수 없다.” 수용소 시기를 견딘 세대가 가장 많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체념으로도, 존엄을 지키는 방식으로도 읽힌다. 이 말을 어떻게 읽느냐가 이 소설을 읽는 태도를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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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실은 기억이 아니라 문헌에서 확인해 적었다. 숫자와 날짜는 아래 출처를 대조한 것이다.

역사

  • Densho —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을 기록하는 시애틀의 아카이브. 사진·구술·백과사전을 공개한다. densho.org
  • BIJAC (Bainbridge Island Japanese American Community) — 이 섬의 역사를 당사자 후손들이 정리한 곳. 퇴거명령 제1호 관련 기록. bijac.org
  • 미국 국립공원청 — 만자나르 국립사적지, 미니도카 국립사적지, 툴레이크 국립기념물의 공식 자료.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 이 페이지의 전시 사진 대부분이 여기 소장 자료다. 도로시아 랭·클렘 앨버스·러셀 리가 전시 이주국 소속으로 찍은 것이 많다.
  • 스미소니언 아시아태평양계 미국인 센터 — 「Race and America’s Wars」. 2차 대전 중 한인 단체의 신분증·배지 운동. apa.si.edu
  • 『Personal Justice Denied』 (1982–83) — 전시 민간인 이주·수용에 관한 미국 의회 조사위원회 보고서. 1988년 시민자유법의 근거가 된 문서다.

법과 판결

  • Ozawa v. United States, 260 U.S. 178 (1922)
  • Executive Order 9066 (1942.02.19) · Civilian Exclusion Order No. 1 (1942.03.24)
  • 워싱턴주 외국인 토지법 (1921 제정, 1923 개정, 1967 폐지)
  • Civil Liberties Act of 1988 (Public Law 100-383)

지리·어업

  • 미국 해양대기청(NOAA) — 자망 도해, 퓨젓 사운드 연어 어업 자료.
  • 워싱턴주 어류야생동물국 — 연어 회유와 어구(漁具) 규정.
  • Natural Earth — 「01 바다」 장의 한글 지도를 그린 경계·해안선 데이터(퍼블릭 도메인). naturalearthdata.com

이미지

이 페이지의 사진은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받았고 전부 퍼블릭 도메인이거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다. 원본 파일명과 라이선스는 build/data/cedars/manifest.py에 그대로 적어 두었다.

소설

David Guterson, Snow Falling on Cedars, Harcourt Brace, 1994. 한국어판 『삼나무에 내리는 눈』, 노혜숙 옮김, 피니스아프리카에, 2025.

이 페이지에 대하여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 위해 만든 배경자료다. 스포일러를 넣지 않는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삼았다 — 줄거리·결말·인물의 운명은 한 줄도 없고, 재판도 절차만 설명했다. 그래도 새는 것이 보이면 알려 주면 좋겠다.

확인되지 않은 숫자에는 “약”을 붙였다. 붙어 있지 않은 숫자는 위 출처에서 대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