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
첫 정착지
캘리포니아 골드힐에 와카마쓰 차·비단 농장이 세워졌다. 미국 본토 최초의 일본인 정착지다. 이듬해 실패했지만, 이때부터 태평양을 건너오는 흐름이 시작된다. 처음 온 이들은 대부분 남성 단신 노동자였고, 돈을 벌어 돌아갈 생각이었다.
1954년 12월 · 워싱턴주 산피에드로 섬
시애틀 앞바다의 작은 섬. 백인 주민과 일본계 주민이 한 섬에 산다. 12년 전 전쟁이 나자 일본계 주민은 모두 섬에서 실려 나갔고, 백인 청년들은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리고 둘 다 같은 섬으로 돌아왔다. 이 페이지는 그 배경 — 역사, 제도, 낯선 문화 — 만 모았다. 줄거리·결말은 없다.
이 소설을 따라가는 데 필요한 배경을 여덟 가지로 추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각 장에 있다.
메이지 유신 뒤 세금이 현금으로 바뀌고 쌀값이 폭락하면서 일본 농촌이 무너졌다. 그 젊은이들이 몇 년 벌어 돌아갈 생각으로 하와이와 미국 서해안에 일하러 왔다. 철도·제재소·통조림 공장·농장의 노동자였다. 남자가 먼저 오고, 사진만 주고받아 결혼한 사진 신부가 뒤따랐다. 1924년 이민법으로 길이 막혔으므로, 1954년 섬의 일본계 가족은 그 전에 건너온 사람들과 그 자녀다.
미국은 미국 땅에서 태어나면 미국 시민이다(출생지주의). 한국처럼 부모의 국적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한 집 안에서 부모는 일본 국적의 외국인, 자녀는 미국 시민이 된다. 1세·2세라는 말이 단순한 세대 구분이 아니라 신분을 가리키는 이유다.
1세는 법으로 귀화가 막혀 있었고, 워싱턴주 법은 「시민이 될 수 없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했다. 그래서 땅을 빌려 농사짓거나, 백인 지주와 말로 약속하고 몇 해에 걸쳐 값을 치르는 식으로 거래했다. 문서로 남길 수 없는 거래였다. 땅을 자기 이름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시민인 자녀가 자란 뒤였다.
섬 사람들이 먹고사는 일은 둘이다. 밤에 혼자 배를 몰고 나가 그물로 연어를 잡는 자망 어업, 그리고 온 가족이 매달리는 딸기 농사. 그물·부표·조류·그물코 같은 말이 설명 없이 나온다. 일본계 이민이 이 지역 딸기 농사를 일궜다.
진주만 공격 석 달 뒤, 정부는 서해안의 일본계 주민 12만 명 전부를 내륙 수용소로 옮겼다. 재판도 혐의도 없었고, 3분의 2가 미국 시민이었다. 통보에서 출발까지 며칠, 짐은 두 손에 들 만큼. 집·밭·배를 헐값에 팔거나 이웃에게 맡기고 떠났다. 이 섬의 모델인 베인브리지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비워졌다.
일본계 2세 청년들은 미군에 들어가 유럽에서 싸웠다(442연대). 가족이 수용소 철조망 안에 있는 병사가 많았다. 같은 시기 섬의 백인 청년들은 태평양의 섬들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전쟁이 끝나고 둘은 같은 섬으로 돌아왔다. 1954년은 그로부터 9년 뒤다.
미국 형사재판에서 유무죄는 주민 가운데 뽑힌 배심원 12명이 만장일치로 정한다. 한국에도 2008년부터 국민참여재판이 있지만 배심원 의견은 판사에게 권고일 뿐이다. 미국에서는 배심의 결론이 곧 판결이다. 그래서 검사와 변호인은 판사가 아니라 배심원석을 향해 말한다.
일본계 부모들은 자녀에게 가만(我慢) — 견디기 어려운 것을 참고 내색하지 않는 것 — 을 가르쳤다. 수용소 시절 공동체를 버티게 한 말이다. 백인 이웃들은 이것을 속을 알 수 없는 태도로 오해하곤 했다. 또 1950년대 미국에서 백인과 일본계가 사귀는 일은 법으로 막혀 있지는 않았지만 양쪽 공동체 모두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같은 시기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일본인」이 한국 독자에게는 묘하게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 섬의 일본계 주민은 일본 제국과 별개의 사람들이다. 대부분 전쟁 수십 년 전에 고향을 떠난 농민·어부와 그 자녀이고, 2세는 일본 땅을 밟아 본 적도 없는 미국 시민이다. 미국 정부는 그 차이를 보지 않고 얼굴과 혈통만으로 그들을 적으로 다뤘다.
당시 미국의 한인들도 같은 처지에 놓일 뻔했다. 한인 역시 귀화가 막힌 아시아계였고, 법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기 때문이다. 한인 단체들이 신분증과 「I am Korean」 배지를 나눠 주고 정부를 설득해, 한인을 일본 신민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지시를 받아 냈다.
작가 데이비드 구터슨이 만든 섬이다. 그러나 섬 위의 것들은 전부 실재했다 — 딸기밭, 자망 어선, 삼나무 숲, 그리고 1942년 3월의 페리. 작가가 살던 베인브리지 아일랜드가 그 바탕이다.
왼쪽 목차에서 한 장(章)씩 골라 본다 — 한 번에 한 주제만 뜬다. 처음부터 다 읽을 필요는 없고, 장마다 맨 위의 요약 상자만 읽어도 된다. 책을 읽다 걸리는 것이 생기면 그때 해당 장을 펴 보면 된다.
검색창에 낱말을 넣으면 페이지 전체에서 그 대목만 뽑아 준다. “자망”, “토지법”, “키베이”, “배심” 같은 말이 걸렸을 때 쓰면 된다.
1954년 섬에 사는 일본계 가족들이 어떻게 거기 있게 되었나. 1869년부터 문이 닫히는 1924년까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서양식 근대 국가를 서둘러 만들기 시작했다. 군대와 철도와 공장에 돈이 필요했고, 새 정부는 그 돈을 농촌에서 걷었다. 1873년의 지조개정(地租改正)이다. 그전까지 농민은 거둔 쌀의 일부를 세금으로 냈다. 이제는 땅값에 매긴 세금을 현금으로, 해마다 같은 액수 내야 했다. 풍년이든 흉년이든, 쌀값이 오르든 내리든 상관없었다.
1881년 정부가 물가를 잡으려고 돈줄을 죄자(마쓰카타 디플레이션) 쌀값과 누에고치 값이 무너졌다. 수입은 줄었는데 세금은 그대로였다. 세금을 못 낸 농민이 땅을 팔고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으로 떨어졌다. 팔린 땅은 지주와 고리대금업자에게 모였다. 히로시마·야마구치·구마모토·후쿠오카 같은 서남부 농촌이 특히 심했고, 흉작까지 겹쳤다.
땅이 없는 집의 둘째·셋째 아들에게는 물려받을 것이 없었다. 바다 건너 일자리는 그들의 탈출구였다. 일본어로 데카세기(出稼ぎ), 「돈 벌러 나간다」는 말이다. 몇 년 벌어 고향에 땅을 사서 돌아오는 것이 목표였다. 1960~80년대 한국인이 독일 광산과 병원으로, 중동 건설 현장으로 나간 것과 비슷한 출발이다.
먼저 문을 연 것은 하와이였다. 당시 하와이는 미국 땅이 아니라 독립 왕국이었고, 사탕수수 농장에 일할 사람이 모자랐다. 일본 정부는 하와이 정부와 계약을 맺고 노동자를 보냈다(관약이민). 1885년부터 1894년까지 26차례, 약 2만 9천 명이 3년 계약으로 건너갔다. 대부분 야마구치와 히로시마 출신이었다.
같은 무렵 미국 본토에는 빈자리가 생겼다. 서부의 철도·광산·제재소·통조림 공장·농장을 떠받치던 것은 중국인 노동자였는데, 1882년 중국인 배척법으로 그들이 더는 들어올 수 없게 됐다. 일할 사람을 찾던 그 자리에 일본인이 들어갔다. 하와이에서 계약을 마치고 본토로 건너간 사람도 많았다.
돈은 생각만큼 모이지 않았다. 그 사이 사람들은 날품팔이에서 소작농으로, 가게 주인으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갔다. 결정적인 것은 가족이었다. 1907년 이후 사진 신부가 건너오고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미국 시민이었다. 아이들은 영어로 말하고 미국 학교에 다녔다. 돌아갈 고향보다 지켜야 할 집이 생긴 것이다.
이유는 셋이 겹쳤다.
첫째, 일자리. 일본인은 낮은 임금에도 오래 일했다. 같은 밑바닥 일자리를 두고 다투던 백인 노동자, 특히 아일랜드계·이탈리아계 이민 노동자들이 이를 위협으로 느꼈다. 노동조합이 배척 운동의 앞장에 섰다.
둘째, 성공. 일본인 농부들은 남이 쓰지 않던 땅까지 빌려 손이 많이 가는 집약 농사로 큰 수확을 냈다. 1915년 로스앤젤레스 사람들이 먹는 채소의 4분의 3을 일본인이 길렀다. 백인 농부들에게 이것은 생존의 경쟁이었다. 「이대로 두면 서부의 농지가 일본인 손에 넘어간다」는 말이 돌았다.
셋째, 두려움.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이겼다. 아시아의 나라가 처음으로 백인 강대국을 꺾은 것이다. 「누런 피부의 위협」, 이른바 황화론(黃禍論)이 퍼졌다. 서해안의 일본인은 그 강대국이 심어 둔 앞잡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배척 단체가 생기고 신문이 배일 캠페인을 벌였다. 아래 연표의 1906년 학교 분리령은 그 연장선이다.
먼저 규모의 감각을 잡아 두면 좋다. 1940년 미국 본토의 일본계 인구는 약 12만 7천 명이었고, 그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워싱턴·오리건 세 주에 있었다. 전체 인구의 0.1%도 안 되는 숫자다. 그런데 이들에게 적용된 법의 양은 그 비율과 전혀 맞지 않았다.

1869
캘리포니아 골드힐에 와카마쓰 차·비단 농장이 세워졌다. 미국 본토 최초의 일본인 정착지다. 이듬해 실패했지만, 이때부터 태평양을 건너오는 흐름이 시작된다. 처음 온 이들은 대부분 남성 단신 노동자였고, 돈을 벌어 돌아갈 생각이었다.
1880년대~
중국인 배척법(1882)으로 중국인 노동력이 끊기자 그 자리를 일본인이 메웠다. 서부 연안의 철도 부설, 제재소, 연어 통조림공장, 농장이 이들을 불렀다. 시애틀과 타코마에 일본인 거리가 생겼고, 퓨젓 사운드의 섬들에는 벌목이 끝난 땅을 개간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1889 · 1886
워싱턴은 1889년 주(州)로 승격하면서 헌법에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는 조항을 넣었다. 준주 시절인 1886년 규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문구는 일본인을 이름으로 지목하지 않는다 — 그럴 필요가 없었다.
1906.10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가 일본인 학생 93명을 동양인 전용 학교로 보내라고 결정했다. 러일전쟁(1905)에서 이긴 직후의 일본은 이를 국가적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외교 문제로 번졌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개입한다.
1907
미국과 일본이 조약이 아닌 합의로 사태를 봉합했다. 일본이 스스로 노동자에게 여권을 내주지 않기로 하고, 대신 미국은 학교 분리를 철회한다. 의회를 거치지 않으려고 “신사들의 약속”이라는 형식을 택했다. 그런데 이 합의에 구멍이 하나 있었다 — 새 노동자는 못 오지만, 이미 미국에 사는 일본인이 아내·자녀·부모를 불러오는 것은 된다.

1908 – 1920
그 구멍으로 여자들이 건너왔다. 중매인이 양가의 가문·건강·나이·재산을 조사하고 사진을 주고받았다. 신부의 이름이 신랑의 호적에 오르면 일본 법으로 혼인이 성립했고, 그러면 여권이 나왔다. 서해안으로 1만 명 이상, 하와이로 1만 4천여 명이 이렇게 왔다. 미국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아 부두에서 합동 결혼식을 다시 치렀다. 사진이 손질된 것이거나 십수 년 전 것이거나 아예 다른 사람인 경우도 있었다.

1913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고 3년을 넘는 임차도 할 수 없게 됐다. 1920년 개정으로 임차 자체가 막혔다. 이 법의 문구는 인종을 말하지 않지만 대상은 분명했다.

1920.03.01
미국 내 여론 악화를 이유로 일본이 스스로 멈췄다. 그때까지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 2세는 이미 3만 명에 이르렀다.
1921 · 1923
워싱턴이 캘리포니아를 본떠 1921년 외국인 토지법을 제정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1923년 개정은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 명의로 부모가 땅을 두는 것까지 금지했다. 그때까지 일본계 가족이 쓰던 유일한 합법적 우회로가 막힌 것이다. 이 법은 1967년에야 폐지된다.
1922.11.13
오자와 다카오는 28년을 미국에서 살았다. 버클리에서 공부했고 영어를 썼고 기독교인이었고 미국 회사에 다녔다. 그는 일본인도 귀화법이 말하는 “자유로운 백인”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아니라고 답했다. “백인”이란 “통상 코카서스 인종으로 알려진 자”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 판결로 모든 일본 출신 이민자의 귀화 길이 막혔다. 다시 열리는 것은 30년 뒤인 1952년이다.
1924
출신국별 할당제를 도입하면서 “귀화 자격이 없는 외국인”의 입국을 사실상 전면 금지했다. 이제 가족을 불러오는 길까지 막혔다 — 일본에서 미국으로 새로 들어오는 문이 닫힌 것이다. 이미 미국에 있던 사람은 그대로 남았다. 일본에서는 “배일이민법”으로 불리며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된다.


이 장 하나만 읽어도 소설의 절반이 다르게 보인다. 땅과 시민권의 문제다.
핵심은 한 구절이다. aliens ineligible for citizenship —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
라틴어 alienus — 「남의, 다른 사람에게 속한」에서 왔다(alius, 「다른」). 영어 법률에서 alien은 그 나라 국적이 없는 사람, 곧 외국인이다. 지금은 「외계인」이라는 뜻으로 더 익숙하지만 그쪽이 나중에 생긴 뜻이다. 같은 뿌리의 alienate(멀어지게 하다)처럼, 이 말에는 「우리가 아닌 사람」이라는 거리가 배어 있다. 미국 법은 지금도 외국인을 공식적으로 alien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alien ineligible for citizenship을 풀면 이렇다 — 「우리 사람이 될 자격조차 없는 남」. 한번 이 이름이 붙으면 몇십 년을 살아도 벗을 수 없었다.
1790년, 미국 첫 의회가 만든 귀화법은 귀화 자격을 「자유로운 백인」으로 정했다. 새 공화국의 시민은 유럽에서 건너온 정착민이라는 생각이 당연하던 때였다. 노예와 원주민은 처음부터 시민의 범위 밖이었다. 「자유로운」은 노예와 계약에 묶인 하인을 빼려는 말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폐지됐다. 1868년 수정헌법 14조로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이 시민이 됐다. 1870년 귀화법을 고칠 때 찰스 섬너 상원의원은 이참에 「백인」이라는 말을 아예 지우자고 했다. 피부색으로 시민을 가리는 것은 방금 끝낸 전쟁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막은 것은 서부 출신 의원들이었다. 「백인」을 지우면 서부에 많던 중국인이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네바다의 윌리엄 스튜어트 상원의원은 유럽 이민자는 「우리 인종이라 빨리 동화되지만」 「중국 문명은 우리 문명과 전쟁 중」이라고 말했다.
결국 타협이 나왔다. 「백인」은 그대로 두고 「아프리카 태생과 아프리카 혈통」만 덧붙였다. 아프리카에서 건너와 귀화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해방된 흑인에 대한 원칙은 세우면서 실제로 문을 넓히지는 않는 선택이었다. 「백인」이라는 말은 아시아인을 막기 위해 남겨진 것이다. 일본인은 나중에 건너와 이 문장에 걸렸다.
그 문장을 대법원이 확인한 것이 1922년 오자와 판결이다. 오자와 다카오는 일본인의 피부도 희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백인」이란 피부색이 아니라 「코카서스 인종」을 뜻한다며 기각했다. 석 달 뒤, 인도 출신 바가트 싱 신드가 인류학상 자신은 코카서스 인종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법원은 이번에는 「백인」이란 학술 용어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 이해하는 백인」이라며 기각했다. 기준은 판결마다 바뀌었지만 결론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귀화를 막아도 일본인은 이미 미국에 살고 있었고, 농사를 잘 지었다. 앞 장에서 본 대로 백인 농부들은 그것을 위협으로 느꼈다. 그래서 다음 표적은 땅이었다. 땅을 가질 수 없으면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남의 땅 위에서만 짓게 된다.
그런데 각 주는 “일본인은 땅을 못 산다”고 쓰지 않았다. 대신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은 땅을 못 산다”고 썼다. 이유가 있었다. 1911년 미일 통상조약은 일본인이 미국에서 집과 가게를 위한 땅을 갖고 빌릴 권리를 보장했다. 「일본인」이라고 쓰면 조약을 정면으로 어기고, 인종을 명시하면 위헌 시비가 붙는다.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라고 쓰면 유럽 이민자는 귀화할 수 있으니 걸리지 않고, 아시아인만 정확히 걸린다. 인종을 적지 않고 인종만 걸러내는 문장이다. 캘리포니아 법무장관이 직접 이 문구를 다듬었다.
남북전쟁 뒤인 1868년, 해방된 흑인의 시민권을 보장하려고 수정헌법 14조가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미국 시민이다.」 1898년 대법원은 이 조항이 귀화할 수 없는 부모의 자녀에게도 적용된다고 판결했다(중국계 웡킴아크 사건). 그래서 부모는 평생 시민이 될 수 없는데 자녀는 태어나는 순간 시민인, 한 지붕 아래 두 신분이 생겼다.
한국은 부모의 국적을 따르는 혈통주의라 이 구조가 낯설다. 미국은 태어난 땅을 따르는 출생지주의다.
일본계 가족에게 남은 길은 하나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의 이름으로 땅을 사는 것. 2세는 태어나면서 시민이므로 소유가 가능했다. 그래서 갓난아이 명의의 농장이 생겼다. 그런데 워싱턴주는 1923년에 그것마저 금지했다. 캘리포니아를 다룬 글만 읽으면 이 대목을 놓친다 — 이 소설의 무대는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워싱턴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말로 하는 계약이 오갔다. 백인 이웃 명의로 땅을 두고 대금을 나눠 갚거나, 소작을 하면서 몇 년 뒤 넘겨받기로 약속하거나. 문서로 남길 수 없는 약속이었다 — 문서로 남기면 그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계 1세는 법으로 시민이 될 수 없었고, 시민이 아니어서 땅을 가질 수 없었고, 그래서 자식 이름으로 사거나 말로 약속했고, 1923년 이후에는 자식 이름조차 쓸 수 없었다. 이 사슬의 어느 고리도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 연도 | 이름 | 내용 | 이 소설에서 |
|---|---|---|---|
| 1870 | 귀화법 개정 | 귀화 자격을 “자유로운 백인”과 “아프리카 태생·혈통인 자”로 한정했다. | 여기서 나온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라는 표현이 이후 반세기 동안 일본인을 지목하는 도구가 된다. 인종을 적지 않고 인종을 가리키는 문구다. |
| 1889 | 워싱턴주 헌법 |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 | 주가 만들어질 때부터 있던 조항이다. 1886년 준주 규정을 이어받았다. |
| 1907 | 신사협정 | 일본이 노동자에게 여권을 내주지 않기로 하고, 미국은 학교 분리를 철회했다. | 가족은 예외였다. 이 구멍으로 사진신부가 건너온다 — 소설 속 1세 부부 대부분이 이 경로다. |
| 1913 | 캘리포니아 외국인 토지법 | 소유 금지, 3년 초과 임차 금지. 1920년에 임차 자체를 금지. | 가장 널리 알려진 법이지만 이 소설의 무대는 캘리포니아가 아니다. |
| 1921 | 워싱턴주 외국인 토지법 | 캘리포니아를 본떠 제정. | 산피에드로에 적용되는 법이 바로 이것이다. |
| 1922 | 오자와 대 미국 | 연방대법원 만장일치. 일본인은 “자유로운 백인”이 아니므로 귀화할 수 없다. | 이 판결 때문에 1세는 평생 외국인으로 산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어를 해도, 아들이 미군이어도. |
| 1923 | 워싱턴주 개정 | 미국 태생 자녀 명의로 부모가 땅을 두는 것을 금지. | 일본계 가족이 쓰던 유일한 합법적 우회로가 막혔다. 워싱턴주에만 있던 조항이라, 캘리포니아를 다룬 글에는 안 나온다. |
| 1924 | 이민법 | 출신국별 할당제. “귀화 자격 없는 외국인”의 입국을 사실상 금지. | 이후 일본에서 오는 길이 끊긴다. 소설의 1세 세대는 이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온 마지막 사람들이다. |
| 1942 | 행정명령 9066호 | 육군장관이 군사 구역을 정하고 “임의의 또는 모든 사람”을 배제할 수 있다. | 명령문에 ‘일본’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본계에게만 적용됐다. |
| 1952 | 매캐런–월터법 | 인종에 따른 귀화 제한 폐지. | 1세도 시민이 될 수 있게 됐다. 소설의 시점(1954년)은 그 직후다. |
| 1967 | 워싱턴주 토지법 폐지 | 1921년 법이 46년 만에 사라졌다. | 1954년에는 아직 살아 있는 법이다. |
| 1988 | 시민자유법 | 생존자 82,219명에게 각 2만 달러. 정부의 공식 사과. | 원인을 “인종 편견, 전시 히스테리, 정치적 지도력의 실패”라고 못박았다. 군사적 필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


소설의 무대가 지도에서 어디인지. 넓은 지도에서 시작해 섬 가까이로 내려간다.
미국 서북쪽 끝, 워싱턴주다. 태평양에서 육지 쪽으로 후안 데 푸카 해협이라는 물길이 들어온다. 길이 약 154km, 폭은 19~40km. 북쪽은 캐나다 밴쿠버 섬, 남쪽은 미국 올림픽 반도이고, 국경이 그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이 해협이 안쪽에서 갈라져 육지 사이로 깊이 파고든 것이 퓨젓 사운드다. 빙하가 깎아 만든 좁고 긴 만들이 손가락처럼 뻗어 있고, 그 사이에 섬이 흩어져 있다.
소설의 산피에드로는 이 해협 어귀에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섬의 생활에 대해 알아 둘 것이 셋 있다.
다리가 없다. 섬에 들고 나는 방법은 페리 하나다. 그 말은 누가 오고 누가 갔는지 섬 전체가 안다는 뜻이고, 한 번 생긴 소문이 빠져나갈 데가 없다는 뜻이다. 인구가 몇천 명인 섬에서는 모두가 서로의 부모 세대까지 안다.
해협은 태평양에서 바로 바람과 파도를 받는다. 소형 선박 주의보와 돌풍 경보가 잦고 안개가 짙다. 안쪽 내해보다 훨씬 거칠다. 밤에 혼자 배를 타고 나가는 일이 어떤 일인지가 이 지형에서 나온다.
이 지역은 바다가 온도를 눌러 줘서 겨울에도 비가 오지 눈은 잘 오지 않는다. 눈보다 비의 겨울이다.





1942년에 베인브리지 아일랜드가 미국 최초의 강제 퇴거 대상이 된 이유는 이 지형에 있다. 섬 건너편에 퓨젓 사운드 해군 조선소가 있었다. 군은 “군사 시설에 가깝다”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섬이라 인구를 세기 쉽고 배 한 척으로 전부 실어 낼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제목에 있는 나무다. 그런데 한국에서 ‘삼나무’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 나무가 아니다.
원문 제목의 cedar는 이 지역의 웨스턴 레드 시더(western red cedar, Thuja plicata)다. 학명이 말해 주듯 측백나무과에 속하고, 일본 삼나무(스기, Cryptomeria japonica)와도 레바논 삼나무와도 다른 나무다. 우리말에 딱 맞는 이름이 없어 ‘삼나무’로 옮긴 것이다.
이 나무는 크다. 다 자라면 높이 60m, 밑동 지름 4m를 넘는다. 향이 강하고 기름 성분이 많아 잘 썩지 않는다. 그래서 태평양 북서부 원주민에게는 재료의 전부에 가까웠다 — 통나무를 파서 카누를 만들고, 판자로 집을 짓고, 속껍질을 벗겨 두드려 옷과 바구니를 짰다. 정착민에게는 지붕널과 울타리 기둥의 재료였다.
그리고 이 나무가 이 소설의 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설명한다.
19세기 후반, 퓨젓 사운드의 섬들은 삼나무와 더글러스 퍼(미송)의 거대한 원시림이었다. 제재소가 들어와 이 나무들을 베어 냈다. 시애틀과 샌프란시스코를 지은 목재가 여기서 나갔다.
베고 나면 지름 몇 미터짜리 그루터기가 남는다. 뿌리가 땅속에 그물처럼 박혀 있어 이걸 뽑아내지 않으면 밭을 만들 수 없다. 아래에 자세히 적었다.
백인 지주들이 그 위험하고 더딘 개간을 일본계 이민에게 맡겼다. 몇 해에 걸쳐 그루터기를 뽑아 밭으로 만든 뒤, 거기에 딸기를 심었다. 땅은 자기 것이 아니었다 — 법이 소유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원시림을 베어 낸 땅은 밭이 아니다. 키 60m짜리 더글러스 퍼(미송)와 웨스턴 레드 시더를 베고 나면 커다란 그루터기가 숲처럼 남는다. 1912년 미국 농무부가 워싱턴주 서부의 개간지를 조사했다. 그루터기 지름은 45cm에서 3m, 1에이커(약 1,200평)에 10~40개가 박혀 있었다. 뿌리는 땅속으로 넓게 뻗어 서로 얽혀 있다.
뽑는 방법은 이랬다. 먼저 그루터기 밑을 파고 다이너마이트를 넣어 터뜨린다. 쪼개진 덩어리와 뿌리에 쇠사슬을 걸고, 말이 끄는 윈치나 증기 기관으로 돌리는 윈치로 하나씩 뽑아낸다. 뽑은 나무는 구덩이에 모아 태운다. 그루터기가 빠진 자리에서는 빙하가 남기고 간 돌이 나온다. 그것도 손으로 골라내야 한다.
화약을 다루는 위험한 일이었고, 돈도 많이 들었다. 같은 조사에서 1에이커를 개간하는 데 47~88달러가 들었다. 그리고 하필 삼나무는 잘 썩지 않는다. 그루터기는 몇 해 두어 삭으면 뽑기가 쉬워지는데(같은 조사에서 4~5년 묵은 그루터기는 비용이 4분의 1가량 덜 들었다), 삼나무 그루터기는 오래 두어도 쉽게 삭지 않는다.
베인브리지에서 이 일을 맡은 것이 일본계였다. 섬의 제재소에 일하러 왔던 일본인들이 베어 낸 뒤 버려진 땅을 빌려 그루터기를 뽑고 밭을 만들었다. 한 농부는 「다이너마이트와 말로 땅을 고르고, 빙하가 남긴 돌을 골라내는 고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1920년대 초 제재소가 문을 닫자 그렇게 만든 밭의 딸기가 섬의 가장 큰 산업이 됐다. 땅을 밭으로 만든 사람과 땅 주인이 다른 구조가 여기서 생긴다.



이 나무의 가지는 아래로 처졌다가 끝이 위로 들린다. 눈이 오면 그 처진 가지에 얹혀 가지가 더 내려앉고, 무게를 못 견디면 쏟아진다. 제목의 그림은 그것이다 — 눈이 나무에 쌓이는 동안 나무가 조용히 휘어지는 상태.
소설은 자망 어업을 설명 없이 다룬다. 이 방식을 알면 밤바다의 장면들이 구체적으로 보인다.
자망(gillnet)은 이름 그대로 물고기의 아가미(gill)가 걸리게 하는 그물이다. 원리는 단순하다. 그물을 물속에 벽처럼 세워 두고 물고기가 스스로 부딪히기를 기다린다.

그물 위쪽 줄에 코르크 부표를 달아 띄우고, 아래쪽 줄에 납을 달아 가라앉힌다. 그러면 그물이 수직으로 펴진 벽이 된다. 물속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작은 고기는 코 사이로 빠져나간다. 큰 고기는 머리가 안 들어간다. 딱 그 크기의 고기만 머리가 반쯤 들어갔다가 아가미덮개가 걸려 못 빠진다. 그래서 그물코 크기를 고르는 것이 곧 어떤 연어를 잡을지 정하는 일이다.
낮에는 물고기가 그물을 본다. 어두워야 안 보인다. 게다가 연어는 밤에 움직인다. 그래서 자망 어부의 하루는 해질 무렵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는 것이다.
건착망 같은 방식은 여러 사람과 큰 배가 필요하다. 자망은 혼자 할 수 있다. 1931년에 나온 동력 드럼이 그물을 감아올리면서 더 멀리 나갈 수 있게 됐다. 자본이 적게 드는 대신 일도 위험도 혼자 진다.
실제 밤 작업은 이렇게 흐른다. 어두워지면 정해진 자리로 나가 그물을 푼다 — 배가 천천히 나아가면서 그물이 뱃전으로 흘러 나가 수백 미터 벽이 선다. 한쪽 끝에는 등을 단 부표를 띄운다. 그러고는 기다린다. 그물과 함께 조류를 타고 떠내려가면서, 부표의 불빛으로 그물이 어디 있는지를 계속 확인한다. 안개가 끼면 그 불빛이 사라진다.
시간이 되면 감아올린다. 그물이 드럼에 감겨 올라오는 동안 걸린 연어를 하나씩 빼낸다. 손이 얼고 비늘에 베인다. 그리고 같은 바다에 다른 배들이 나와 있다. 좋은 자리는 정해져 있고, 누가 어디 있는지는 등불로 안다.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신경전이 이 일의 일부다.




퓨젓 사운드에는 여러 종의 연어가 온다. 소설에 자주 나오는 실버(silver)는 은연어(coho)의 통칭이다. 연어는 회유한다 — 바다에서 몇 해를 살다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온다. 그 돌아오는 길목이 곧 어장이고, 그래서 언제 어디에 그물을 놓을지가 어부의 전 재산이 되는 지식이다.


이 섬의 다른 절반은 딸기다. 왜 하필 딸기였나.
1900년대 초, 퓨젓 사운드 지역에 딸기 농사를 들여온 것이 일본계 이민이다. 한때 워싱턴주 딸기의 3분의 2가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에서 났다.
딸기를 고른 이유가 있다. 이 작물은 땅이 적어도 되고, 손이 많이 가고, 심은 해에 수확이 나온다. 큰 자본 없이 가족 노동으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땅을 소유할 수 없어 소작이나 단기 임차로 붙어 있어야 했던 사람들에게 이보다 맞는 작물이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오래 걸리는 과수원 같은 것은 처음부터 선택지가 아니었다.
일은 고됐다. 04장에서 본 그루터기를 뽑아 밭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딸기는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따야 한다. 수확기가 되면 온 가족이 밭에 나갔고, 학교가 방학을 그 시기에 맞추는 지역도 있었다.
1942년 봄, 사람들이 실려 나갔을 때 딸기는 몇 년 만의 대풍이었다. 그해 수확은 필리핀계 일꾼들이 빈 농가에 들어와 마쳤다. 돌아왔을 때 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은 많지 않았다 — 세금이 밀려 넘어갔거나, 맡긴 사람이 돌려주지 않았거나, 이미 팔려 있었다. 베인브리지는 이 점에서 예외에 가까웠다. 이웃이 밭을 지켜 준 집이 여럿 있었고, 절반이 넘는 가족이 섬으로 돌아왔다.


땅을 살 수 없으니 문서로 남길 수 없는 거래가 오갔다. 백인 이웃 명의로 땅을 두고 몇 해에 걸쳐 대금을 갚거나, 소작을 하다 나중에 넘겨받기로 하거나. 이런 약속은 서로 신뢰가 있는 동안에는 잘 굴러가지만, 한쪽이 사라지거나 마음을 바꾸면 증명할 방법이 없다. 1942년 3월에 섬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그 약속을 지킬 상대도, 다툴 자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주만에서 종전까지. 이 소설의 회상이 가장 자주 돌아가는 시기다.
1941.12.07
공격 당일 저녁부터 연방수사국(FBI)이 서해안 일본계 사회의 지도층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불교 승려, 일본어 학교 교사, 신문 기자, 무역회사 간부, 현인회(縣人會) 임원, 그리고 유도·검도 도장 관계자가 목록에 있었다. 며칠 안에 수천 명이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남은 집에서는 일본어 책·편지·사진·기모노·칼을 태우거나 묻었다.

1942.02.19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 명령문에는 ‘일본’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육군장관이 “군사 구역”을 지정하고 그 구역에서 “임의의 또는 모든 사람”을 배제할 수 있다고만 적었다. 인종을 명시하지 않은 이 문장이 12만 명을 옮기는 근거가 되었다.

1942.03.24
서부방위사령관 존 L. 드윗 중장이 서명했다. 첫 대상이 이 섬이었던 이유는 퓨젓 사운드 해군 조선소와 가깝다는 것이었다. 명령은 주민들에게 엿새를 주었다. 그 엿새 안에 농장을 팔거나 빌려주고, 세간을 맡기거나 헐값에 넘기고, 기르던 짐승을 남에게 부탁하고, 작별을 해야 했다.

1942.03.30
섬에 살던 일본계 276명 가운데 227명이 무장 경비 아래 페리 케홀로켄호에 올라 시애틀로 갔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캘리포니아 만자나르로 향했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집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날 섬을 비운 사람은 돌아올 수 없었다. 두고 온 딸기밭은 그해 몇 년 만의 대풍이었고, 필리핀계 일꾼들이 빈 농가에 들어와 수확을 마쳤다.

1942 봄~여름
서해안 전역에서 12만 명이 옮겨졌다. 먼저 경마장·박람회장 같은 집합소에 모였다 — 마구간을 치우고 그대로 쓴 곳도 있었다. 거기서 내륙의 수용소 10곳으로 보내졌다. 짐은 두 손에 들 수 있는 만큼이었다. 옮겨진 사람의 3분의 2가 미국 시민이었다.

1943.02
정부가 17세 이상 전원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문제는 마지막 두 문항이었다. 27번은 명령받는 곳 어디서든 전투 임무를 수행하겠느냐고 물었고, 28번은 미국에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천황에 대한 어떤 형태의 충성도 파기하겠느냐고 물었다. 28번은 1세에게 함정이었다 — 법이 그들의 귀화를 막아 놓았으므로, 일본 국적을 버리면 어느 나라의 국민도 아니게 된다. 2세에게는 다른 함정이었다. 애초에 한 적 없는 맹세를 “파기하겠다”고 답하는 것은 그런 맹세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1943.02.01
2세로만 이루어진 부대다. 하와이에서 2,686명, 본토 수용소에서 1,500명이 미시시피 셸비 기지에 모였다. 가족이 철조망 안에 있는 채로 유럽 전선에 나간 병사가 많았다. 부대 표어는 “Go for Broke” — 하와이 노름판에서 판돈을 다 거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1943.11.20 – 23
중부 태평양의 환초 타라와, 그중 베티오라는 폭 3km 남짓의 섬을 미 해병대가 공격했다. 산호초를 넘을 만큼 물이 차오를 것으로 계산했는데, 하필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작은 조금(小潮) 때라 수심이 예상보다 60cm 얕았다. 상륙정이 암초에 얹혀 버렸고 해병들은 450m를 걸어서 해변까지 가야 했다. 76시간 만에 약 6,400명이 죽었다. 미국 여론이 처음으로 태평양 전쟁의 대가를 실감한 전투다.

1944.10.27 – 30
프랑스 보주 산지에서 텍사스 출신 141연대 1대대가 독일군에 포위됐다. 442연대가 구출 명령을 받고 닷새를 싸워 211명을 구해 냈다. 그 대가로 800명이 죽거나 다쳤다. 442연대는 규모와 복무 기간을 감안할 때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부대다 — 명예훈장 21개, 은성훈장 371개, 퍼플하트 4,000개 이상.

1945.08 – 1946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가 닫혔다. 그러나 돌아갈 집과 밭이 남아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세금을 못 내 넘어갔거나, 맡긴 사람이 돌려주지 않았거나, 이미 팔렸다. 서해안 곳곳에서 귀환자에 대한 협박·방화·총격이 일어났다. 베인브리지는 예외에 가까웠다 — 이웃이 밭을 지켜 준 집이 여럿 있었고, 절반 넘는 가족이 섬으로 돌아왔다.

두려움. 진주만 직후 서해안은 일본군이 상륙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실제로 그런 위협은 없었다.
그런데 같은 적국이라도 달랐다. 미국은 독일·이탈리아와도 전쟁 중이었고, 독일계·이탈리아계 주민은 수백만 명이었다. 그러나 수용된 것은 그 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 수천 명뿐이었다. 일본계만 미국 시민까지 전부 옮겨졌다. 서부방위사령관 드윗 중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놈은 일본놈이다. 미국 시민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이해관계. 캘리포니아 채소 재배업자 단체의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기적인 이유로 일본인을 몰아내려 한다고들 한다. 맞다.」 일본인 농부가 사라지면 그 밭은 백인 농부의 것이 된다.
결정적인 비교는 하와이다. 하와이는 진주만이 있는 곳이고, 일본계가 주민의 3분의 1이 넘었다. 그런데 하와이에서는 대량 수용이 없었다. 갇힌 사람은 1,200~1,800명이었다. 일본계가 없으면 섬의 경제가 멈추기 때문이었다. 정말 위험해서 옮긴 것이라면 하와이가 먼저였어야 한다.
1983년 의회 조사위원회는 원인을 이렇게 정리했다 — 인종 편견, 전시 히스테리, 정치적 지도력의 실패. 일본계의 불충을 보여 주는 증거는 거의 없었다.




진주만 공격 당일 저녁부터 FBI가 움직였다. 무작위 체포가 아니었다 — 목록이 이미 있었다. 불교 승려, 일본어 학교 교사, 일본어 신문 기자, 무역회사 간부, 같은 현 출신 모임인 현인회의 임원, 그리고 유도·검도 도장의 지도자. 공동체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일수록 목록의 위쪽에 있었다. 며칠 안에 수천 명이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남은 집에서는 태웠다. 일본어 책, 편지, 사진, 기모노, 인형, 제사 도구, 칼. 아무 죄가 없는 물건들이지만 그것이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음 목록에 오를 수 있었다. 마당에 묻은 집도 있고 바다에 버린 집도 있다. 이 소설의 1세 세대가 잃어버린 물건들은 대개 그때 없어진 것이다.
여기서 검도를 짚어 둘 값어치가 있다. 1세 부모들이 자녀를 검도장에 보낸 것은 무술을 시키려는 게 아니라 일본식 예법과 자세를 잃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 일본어 학교와 같은 이유다. 그런데 미국 당국은 검도를 일본 군국주의와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도장 관계자가 체포 대상이 되었고, 여러 집에서 죽도와 호구를 태우거나 묻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되살아나지 못했다.



10곳이 있었다. 이 소설에 관계되는 것은 만자나르와 미니도카 둘이다.
베인브리지 사람들은 캘리포니아 만자나르로 갔다. 시에라네바다 산맥 동쪽 기슭의 사막, 해발 1,200m다. 여름은 38도를 넘고 겨울에는 눈이 오며, 바람이 불면 온통 먼지다. 연 강수량이 130mm도 안 된다. 퓨젓 사운드의 습한 숲에서 살던 사람들이 그 반대편 극단으로 옮겨진 것이다.
숙소는 가로 6m 세로 7.5m 방 하나에 여덟 명까지였다. 소나무 판자에 타르지를 씌운 건물인데, 생나무가 마르면서 판자 사이가 벌어졌다. 그 틈으로 먼지가 들어왔다. 화장실과 목욕탕은 공용이고 칸막이가 없었다. 식사는 식당에 줄을 서서 받았다 — 그래서 가족이 한자리에서 밥을 먹는 습관이 무너졌다. 이것이 수용소 생활이 가정에 남긴 가장 조용한 파괴로 꼽힌다.
대부분의 베인브리지 사람들은 나중에 아이다호 미니도카로 옮겨졌다. 워싱턴·오리건·알래스카 출신이 모인 곳이라, 이웃과 다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수용소 | 위치 | 운영 기간 | 최대 인원 | 어디서 온 사람들 | |
|---|---|---|---|---|---|
| 툴레이크 | 캘리포니아 | 1942.05 – 1946.03 | 18,700 | 북캘리포니아·오리건·워싱턴. 1943년 격리 수용소로 바뀐다 | |
| 포스턴 | 애리조나 | 1942.06 – 1945.11 | 17,814 | 남캘리포니아. 세 구역으로 나뉜 최대 규모 | |
| 힐라리버 | 애리조나 | 1942.07 – 1945.11 | 13,348 | 로스앤젤레스·프레즈노. 정원 1만에 1만 3천이 들어갔다 | |
| 하트마운틴 | 와이오밍 | 1942.08 – 1945.11 | 10,767 | 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 | |
| 만자나르 | 캘리포니아 | 1942.03 – 1945.11 | 10,046 | 로스앤젤레스·스톡턴, 그리고 베인브리지 아일랜드 | |
| 미니도카 | 아이다호 | 1942.08 – 1945.10 | 9,397 | 워싱턴·오리건·알래스카. 베인브리지 사람들이 나중에 옮겨 간 곳 | |
| 토파즈 | 유타 | 1942.09 – 1945.10 | 9,000 |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 (약) | |
| 제롬 | 아칸소 | 1942.10 – 1944.06 | 8,497 | 로스앤젤레스·하와이. 가장 먼저 닫혔다 | |
| 로워 | 아칸소 | 1942.09 – 1945.11 | 8,475 | 캘리포니아 | |
| 그래나다 (아마치) | 콜로라도 | 1942.08 – 1945.10 | 7,318 | 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 가장 작았다 |





그런데 사진을 보면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사람들이 야구를 하고 밭을 갈고 학교를 다닌다. 이것은 수용소가 견딜 만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 반대다 —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던져진 사람들이 몇 달 만에 마을을 하나 만들어 낸 것이다. 신문을 찍고, 상점을 열고, 야구 리그를 짜고, 사막에 물을 대 채소를 길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3년, 종이 한 장이 공동체를 갈랐다. 그 균열은 전쟁이 끝나고도 오래 남는다.
1943년 2월, 정부가 수용소의 17세 이상 전원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원래 목적은 군에 지원할 2세를 가리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여자와 노인에게까지 같은 종이가 갔다. 문제는 마지막 두 문항이었다.
“명령받는 곳이 어디든 미군의 전투 임무에 복무할 의사가 있는가?”
수용소에 갇힌 채 이 질문을 받았다. 60대 노인과 여성에게도 같은 문항이 갔다.
“미합중국에 무조건적 충성을 맹세하고 외국 또는 국내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미국을 성실히 방어하며, 일본 천황이나 다른 어떤 외국 정부·권력·조직에 대한 어떤 형태의 충성이나 복종도 파기하겠는가?”
1세에게. 이들은 법으로 미국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예”라고 답해 일본 국적을 파기하면 어느 나라의 국민도 아닌 사람이 된다. 무국적이 된 채 전쟁 중인 적국 출신으로 남는 것이다. 충성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2세에게. 이들은 태어나면서 미국 시민이었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다. 없는 것을 “파기하겠다”고 답하는 것은 그런 충성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꼴이다. 게다가 시민인 자신을 가둬 놓고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두 문항 모두에 “아니오”라고 답한 사람들이 노노보이라고 불렸다. 이유는 사람마다 달랐다 — 항의, 무국적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가족과 헤어지지 않으려는 선택, 부모를 따르기 위한 결정. 그러나 정부는 이유를 묻지 않고 하나로 묶어 툴레이크로 보냈다. 그곳은 계엄령이 내려진 격리 수용소가 되었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5,589명 중 98%가 그곳에서 포기했다.
반대편에는 지원한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이 철조망 안에 있는 채로 유럽 전선에 나갔다. 2세로만 이루어진 442연대전투단이다. 프랑스 보주 산지에서 포위된 텍사스 부대 211명을 구해 내는 데 8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규모와 복무 기간을 감안하면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부대다.
이 두 선택 사이의 골이 이 소설의 배경에 깔려 있다. 같은 마을 사람들이 한쪽은 아들을 전쟁에 보냈고 한쪽은 노노보이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도 이 이야기는 공동체 안에서 오래 하지 못하는 말로 남았다.




1954년 섬의 백인 남자들 상당수가 태평양에서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 전쟁이 어떤 것이었나.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은 성격이 아주 달랐다. 태평양은 섬 하나씩 빼앗는 전쟁이었다. 상륙정으로 해변에 내려 참호와 벙커에 박힌 수비대를 밀어내는 방식이라, 좁은 땅에서 사상자가 집중적으로 났다. 그리고 항복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던 일본군을 상대로 거의 전멸시킬 때까지 싸웠다.
그 성격을 미국 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것이 타라와다.
중부 태평양 길버트 제도의 환초. 그중 베티오는 폭 3km 남짓의 작은 섬이다. 활주로가 있어 다음 진격의 발판으로 필요했다.
산호초를 넘으려면 수심 1.5m가 필요했는데 90cm밖에 안 됐다. 하필 그날이 조금이었다. 조금(小潮)은 보름에 한 번씩 오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작은 때다 — 밀물 때가 돼도 물이 평소만큼 차오르지 않는다. 상륙정이 암초에 얹혔다.
해병들은 배에서 내려 가슴까지 오는 물속을 450m 걸어 해변으로 갔다. 그동안 기관총 사격에 노출됐다.
나흘 만에 미군 약 1,700명, 일본·조선인 수비대 4,690명이 죽었다. 이 작은 섬 하나에서다.
미국 여론이 충격을 받은 것은 사진과 영상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미군 전사자의 시신은 언론에 나오지 않았다. 타라와에서 처음으로 해변에 널린 시신이 보도됐고, “이 작은 섬 하나에 그만한 값을 치를 이유가 있었나”라는 질문이 나왔다. 한 장군은 이 손실을 게티즈버그의 피켓 돌격에 비유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는 유럽 전선에 없던 것이 있었다 — 인종의 증오다. 미국의 선전 포스터와 신문은 일본군을 원숭이나 벌레로 그렸다. 병사들은 1942년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들이 굶주린 채 끌려가다 죽어 간 바탄 죽음의 행진 소식을 들었고,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덤비는 적을 상대했다. 독일군은 「나치」라는 체제로 미워할 수 있었지만, 일본군은 얼굴로 미워하게 됐다.
돌아온 사람들에게 이 전쟁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온 섬에는 일본계 이웃이 있었다. 1954년의 섬은 그 두 사실이 한 자리에 놓여 있는 곳이다.



한국 형사재판과 다른 지점만 모았다. 이 소설의 재판이 어떻게 되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가장 큰 차이 하나부터. 유죄냐 무죄냐를 판사가 정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뽑힌 시민 열두 명이 정한다. 판사는 절차를 이끌고 법을 설명하며, 유죄가 나오면 형을 정한다. 그러니 미국 형사재판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말을 거는 상대는 판사가 아니라 배심원석이다. 법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연출 — 목소리, 눈맞춤, 물건을 들어 보이는 몸짓 — 이 그 열두 명을 향한다.
왜 전문가인 판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맡기나. 미국은 영국 식민지 시절 왕이 보낸 판사에게 재판받던 기억에서 출발했다. 독립선언서는 영국 왕의 죄목 가운데 하나로 「배심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은 것」을 꼽는다. 그래서 국가가 시민을 처벌하려면 그 지역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원칙을 헌법(수정헌법 6조)에 넣었다.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인 셈이다. 그 대가로 재판은 그 지역의 여론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코로너(검시관)는 카운티의 선출직이고, 20세기 중반까지 의학 교육을 요구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사망의 원인·시각·종류(자연사·사고사·자살·타살)를 판정한다. 한국의 부검의와 달리 의사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카운티의 최고 사법 집행관인 보안관도 선거로 뽑는다. 임명된 경찰서장과 다르다. 그 말은 지역 여론이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다.
주(州) 차원의 형사사건은 카운티 검사가 담당한다. 대배심을 거치는 주도 있고, 검사가 직접 기소장을 내는 주도 있다.
voir dire, 직역하면 “진실을 말하다”.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 후보를 심문해 편견이 있는 사람을 걸러 낸다. 사유를 대고 배제할 수도 있고, 사유 없이 몇 명까지 배제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열두 자리에 앉느냐가 재판의 절반이다.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beyond a reasonable doubt) 유죄를 입증할 책임은 전적으로 검사에게 있다. 피고인은 자기 무죄를 증명할 의무가 없고, 증언대에 서지 않을 권리도 있다. “변명을 안 했으니 유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추론을 거쳐야 사실에 닿는 증거. 약한 증거로 오해받지만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 정황증거만으로 유죄가 나올 수 있다. 다만 무죄와 양립하는 합리적인 설명이 하나라도 남으면 유죄로 갈 수 없다.
배심은 그 지역 주민으로 구성된다. 인구 몇천 명의 섬이라면 배심원 후보와 사건 관계자가 서로 아는 사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voir dire 는 미국 소설·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장면이고, 그 절차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고 읽으면 훨씬 잘 보인다.
그리고 정황증거라는 말이 나오면 위의 마지막 문장을 기억하면 좋다 — 무죄와 양립하는 합리적 설명이 하나라도 남으면 유죄로 갈 수 없다. 변호인이 하는 일은 그 설명 하나를 세우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9년이다. 태평양에서 싸운 사람들이 아직 30대이고, 수용소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다시 밭을 일구고 있다. 일본계에 대한 편견을 공공연히 말해도 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재판이라는 절차는 중립을 전제하지만, 그 절차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 안에 있다.
1942년 강제수용에서 1988년 정부의 공식 사과까지 46년이 걸렸다. 소설이 끝나는 자리 뒤로 실제 역사가 이어진다. 1954년의 사람들은 이 뒤를 모른다.
돌아온 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다. 부끄러움(하지), 참고 견디는 태도(가만), 그리고 자녀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2세들은 서둘러 「모범적인 미국인」이 되어 과거를 덮으려 했고, 자녀에게도 그 시절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1960~70년대 민권운동 속에서 자란 젊은 세대였다. 그 흐름 속에서 자기 뿌리에 눈뜬 3세들이 부모와 조부모에게 묻기 시작했다. 1981년 의회 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750명이 넘는 사람이 증언대에 섰다. 많은 이에게 그것이 처음으로 입 밖에 낸 이야기였다. 그 증언이 1988년의 사과를 만들었다.
1952
매캐런–월터법이 인종에 따른 귀화 제한을 없앴다. 오자와 판결로부터 30년, 이민이 시작된 지 80여 년 만에 1세도 미국 시민이 될 수 있게 됐다. 이 소설의 시점인 1954년은 그 문이 막 열린 직후다 — 섬의 1세 노인들이 평생 처음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된 시기다.
1967
1921년 법이 46년 만에 없어졌다. 1954년의 산피에드로는 이 법이 아직 살아 있는 세계다.
1976.02.19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선언 4417호에 서명했다. 서명일을 EO 9066 서명일과 같은 날짜로 맞췄다. “우리는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안다”고 적었다. 34년이 지난 뒤였다.

1983
전시에 퇴거 명령을 거부하고 유죄를 받았던 세 사람의 사건이 다시 열렸다. 정부가 대법원에 불리한 정보를 숨겼다는 문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유죄 판결은 취소됐다. 다만 취소된 것은 세 사람 개인의 유죄이고, 1944년 대법원이 강제수용을 합헌이라고 한 판례 자체는 그대로 남았다.

1988.08.10
레이건 대통령이 서명했다. 생존자 82,219명에게 각 2만 달러를 지급하고, 정부가 공식으로 사과했다. 법은 그 원인을 세 가지로 못박았다 — 인종 편견, 전시 히스테리, 그리고 정치적 지도력의 실패. 군사적 필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1994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에 살던 고등학교 교사 데이비드 구터슨이 10년에 걸쳐 쓴 첫 장편이 나왔다. 이듬해 펜/포크너 상을 받는다. 소설의 산피에드로는 실재하지 않지만, 그 섬에 있는 것들 — 딸기밭, 자망 어선, 삼나무, 그리고 1942년 3월의 페리 — 은 전부 실재한 것이다.
2011.08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에 일본계 미국인 배제 기념비가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떠난 바로 그 부두 자리다. 삼나무로 세운 벽에 그날 섬을 떠난 27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의 이름은 “二度とないように”(니도토 나이 요니) —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2018.06.26
대법원이 다른 사건(트럼프 대 하와이)을 판결하면서, 로버츠 대법원장이 판결문에 “코레마쓰는 결정된 날부터 심각하게 잘못이었다”고 적었다. 1944년의 그 판례가 대법원에서 명시적으로 부정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1988년에 대통령이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급한 뒤로도 30년, 판례 자체는 살아 있었던 셈이다. 다만 이 문장이 판결의 결론이 아니라 곁들인 언급이라, 법적으로 완전한 파기인지는 논쟁이 남아 있다. 사과와 판례는 다른 것이다 — 잘못을 인정하는 일과, 그 잘못을 허용한 법 논리를 걷어내는 일은 따로 일어난다.

읽다 걸리는 낱말들. 위쪽 검색창에 넣어도 여기로 잡힌다.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온 1세. 一(이치)·二(니)·三(산)에 世(세이, 세대)를 붙인 말이라 문자 그대로 1세·2세·3세다. 1922년 오자와 판결로 귀화가 막혀 죽을 때까지 외국인이었다. 영어가 서툰 경우가 많아 자녀와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1952년에야 시민이 될 수 있게 된다.
미국에서 태어난 2세. 태어나면서부터 미국 시민이고, 미국 학교에서 영어를 모어처럼 쓰며 자랐다. 1942년에 옮겨진 사람의 3분의 2가 이들이었다 — 시민이 시민에게 당한 일이다. 미국 사회는 이들을 미국인으로 보지 않았고, 이들은 부모의 일본어와 예법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 어느 쪽에서도 온전히 자기 자리가 아닌 세대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2세. ‘미국으로 돌아오다’라는 뜻이다. 약 1만 명으로 추정된다. 부모가 일본어와 예법을 잃지 않게 하려고 보냈다. 전시에 정부가 특히 의심했고, 수용소 안에서 다른 2세와 사이가 나쁜 경우도 있었다.
2세의 자녀, 3세. 1954년에는 대부분 어린아이다. 이들이 자라 1970년대에 부모 세대가 입을 다문 수용소 이야기를 묻기 시작한다.
일본계 이주민과 그 후손 전부를 가리키는 말. 세대를 구분하지 않는다.
백인. 일본계 사회에서 백인 이웃을 부르던 일상어다. 멸칭은 아니고 그냥 구분어에 가깝다.
사진과 호적으로 성립시킨 결혼. 1907년 신사협정이 노동자의 입국은 막고 가족의 입국은 열어 둔 틈에서 나왔다. 서해안으로만 1만 명 이상이 이렇게 왔다.
중매인. 양가의 가문·건강·나이·재산을 조사하고 사진을 주고받게 했다.
「돈 벌러 나간다」. 몇 해 벌어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한 이주다. 1세 대부분이 이렇게 떠났다가 가족이 생기면서 눌러앉았다.
「누런 피부의 위협」. 아시아인이 서양을 위협한다는 공포. 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이긴 뒤 미국 서해안에서 크게 퍼져 일본인 배척의 바탕이 됐다.
외국인. 라틴어 alienus(「남의, 다른 사람에게 속한」)에서 왔다. 「외계인」은 나중에 생긴 뜻이고, 미국 법은 지금도 국적이 없는 사람을 공식적으로 이렇게 부른다. 「우리가 아닌 사람」이라는 거리가 배어 있는 말이다.
이 소설을 읽는 데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이다. 1870년 귀화법이 귀화 자격을 “자유로운 백인”과 아프리카계로 한정한 뒤 — 「백인」을 지우자는 안은 중국인을 막으려는 서부 의원들 때문에 무산됐다 — 이 표현이 일본인을 이름을 대지 않고 지목하는 도구가 되었다. 토지법도, 이민법도 전부 이 문구로 썼다.
위 자격이 없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임차를 금지한 주법. 워싱턴주는 1921년에 제정하고 1923년에는 미국 태생 자녀 명의로 두는 것까지 막았다. 1967년 폐지.
28년을 미국에서 산 오자와 다카오가 자신도 “자유로운 백인”이라고 주장했으나 연방대법원이 만장일치로 기각했다. 이 판결로 일본 출신 이민자 전체의 귀화 길이 막혔다.
1942년 2월 19일 루스벨트 대통령 서명. 육군장관이 군사 구역을 정하고 그곳에서 “임의의 또는 모든 사람”을 배제할 수 있게 했다. 명령문에 ‘일본’이라는 말이 없다.
행정명령 9066호에 따라 지역별로 내려진 실제 집행 명령. 제1호의 대상이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였다(1942년 3월 24일). 통보에서 출발까지 엿새를 주었다.
수용소로 가기 전 임시로 모아 둔 곳. 경마장·박람회장이 쓰였고, 마구간을 청소해 그대로 가족 숙소로 쓴 곳도 있다.
수용소 10곳을 운영한 민간 기관. ‘이주(relocation)’라는 말 자체가 완곡어였다.
1943년 2월, 17세 이상 전원에게 돌린 설문. 27번은 전투 임무를 수행하겠느냐, 28번은 미국에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파기하겠느냐고 물었다. 두 문항이 공동체를 갈랐다.
27·28번에 모두 “아니오”라고 답한 사람. 툴레이크 격리 수용소로 보내졌다. 답을 그렇게 한 이유는 사람마다 달랐다 — 항의, 가족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선택, 무국적이 될 것에 대한 두려움.
1943년부터 ‘불충’으로 분류된 사람을 모은 곳. 계엄령이 내려졌고, 시민권을 포기한 5,589명 가운데 98%가 여기서 포기했다.
2세로만 이루어진 부대. 표어 “Go for Broke”는 하와이 노름판에서 판돈을 전부 거는 것을 뜻한다. 규모 대비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았다. 가족이 수용소에 있는 채로 싸운 병사가 많았다.
일본어를 하는 2세가 태평양 전선에서 문서 번역·포로 심문·감청을 맡았다. 442연대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규모가 비슷하다. 활동이 오래 기밀이어서 전후에도 말하지 못했다.
워싱턴주 서북부의 내해. 빙하가 깎아 만든 좁고 깊은 만이 육지 안으로 길게 들어와 있고, 그 사이에 섬이 흩어져 있다. 시애틀·타코마가 이 물가에 있다.
퓨젓 사운드와 태평양을 잇는 폭 19~40km, 길이 약 154km의 물길. 소설의 산피에드로 섬이 있는 곳이다. 북쪽은 캐나다 밴쿠버 섬, 남쪽은 미국 올림픽 반도이고 국경이 해협 한가운데를 지난다. 안개와 돌풍이 잦다.
실재하지 않는 섬이다. 작가가 살던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와, 그가 조사한 여러 섬을 합쳐 만들었다. 그러나 섬 위의 것들 — 딸기밭, 자망 어선, 삼나무 숲, 1942년 3월의 페리 — 은 전부 실재했다.
시애틀에서 페리로 35분. 폭 8km, 길이 16km. 미국에서 가장 먼저 일본계 주민이 강제로 쫓겨난 곳이다. 작가 데이비드 구터슨이 이 섬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소설을 썼다.
태평양 북서부 숲을 이루는 거목. 한국어로는 ‘삼나무’로 옮기지만 일본 삼나무(스기)와는 다른 나무다. 향이 강하고 잘 썩지 않아 원주민이 카누·집·옷을 만들었고, 정착민은 지붕널로 썼다. 붉은 속살이 이 페이지 색의 유일한 따뜻한 자리다.
해협 남쪽의 반도. 서쪽 끝은 연 강수량이 2,500mm를 넘는 온대우림이고, 동쪽 끝은 600mm도 안 되는 건조지다. 산 하나를 두고 이렇게 갈린다.
그물코에 물고기의 아가미가 걸리게 하는 그물. 위쪽은 뜸줄(코르크)로 띄우고 아래쪽은 발줄(납)로 가라앉혀 물속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운다. 작은 고기는 빠져나가고 큰 고기는 머리가 안 들어가므로, 그물코 크기가 곧 잡을 물고기의 크기다.
그물을 배에 매단 채 조류에 흘려보내는 방식. 퓨젓 사운드의 연어 어선이 밤에 하던 일이 이것이다. 어두워야 그물이 안 보이고, 연어는 밤에 움직인다. 한 사람이 배 한 척으로 하는 고된 일이다.
그물 위아래를 잡아 주는 두 줄. 뜸줄에 달린 부표가 수면에 떠 그물의 위치를 알려 준다. 밤바다에서 이 줄들이 어디 있는지가 곧 배의 위치 감각이다.
혼자서 그물을 놓고 걷을 수 있게 만든 작은 배. 1931년에 나온 동력 드럼이 그물을 감아올리면서 손으로 걷던 시절보다 훨씬 멀리 나갈 수 있게 됐다.
물고기 떼를 둘러싼 뒤 아래를 조여 자루처럼 닫는 그물. 여러 사람과 큰 배가 필요하다. 자망보다 자본이 드는 방식이라, 같은 바다에서도 배의 종류가 곧 처지였다.
은연어. 퓨젓 사운드 자망 어업의 주 대상 중 하나다.
땅 주인에게 수확의 일부를 내고 짓는 농사. 토지법으로 땅을 살 수 없던 일본계 가족이 흔히 놓이던 자리다. 계약이 말로만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이 나중에 문제를 만든다.
카운티의 검시관. 미국에서는 선거로 뽑는 자리이고, 20세기 중반까지 의학 교육을 요구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사망의 원인·시각·종류를 판정한다. 한국의 부검의와 달리 의사가 아닐 수 있다.
카운티의 최고 사법 집행관. 이 자리도 선거로 뽑는다. 임명직 경찰서장과 다르다 — 그래서 지역 여론이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판사가 아니라 시민 12명이 정한다. 판사는 절차를 진행하고 법을 설명하며, 유죄가 나오면 형을 정한다. 한국 형사재판과 가장 크게 다른 지점이다.
직역하면 “진실을 말하다”.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 후보를 심문해 편견이 있는 사람을 걸러 내는 절차다. 사유를 대고 배제할 수도, 사유 없이 몇 명까지 배제할 수도 있다. 재판은 사실상 여기서 절반이 정해진다.
형사재판의 증명 기준. “아마 그랬을 것”으로는 안 된다. 유죄를 입증할 책임은 전적으로 검사에게 있고, 피고인은 자기 무죄를 증명할 의무가 없다.
직접 보거나 들은 것이 아니라 추론을 거쳐야 사실에 닿는 증거. 흔히 약한 증거로 오해받지만 법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 정황증거만으로 유죄가 나올 수 있다. 다만 무죄와 양립하는 합리적 설명이 하나라도 남으면 유죄로 갈 수 없다.
코로너가 사망의 종류(자연사·사고사·자살·타살)를 판정하기 위해 여는 절차. 형사재판이 아니고 유무죄를 가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타살’이 나오면 그다음이 시작된다.
죽도로 하는 일본 검술. 1세 부모들이 자녀에게 일본식 예법과 자세를 가르치려고 시켰다. 그런데 진주만 이후 검도·유도 지도자가 FBI 체포 목록에 올랐다. 도구를 태우거나 묻은 집이 많았고, 전후에도 한동안 되살아나지 못했다.
2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던 방과 후 학교. 미국 학교가 끝나고 다시 가는 곳이라 아이들에게는 부담이었다. 이 학교의 교사들도 1941년 12월의 체포 대상이었다.
같은 현(県) 출신끼리 만든 상호부조 모임. 낯선 땅에서 돈을 빌리고 일자리를 얻고 장례를 치르는 실질적 조직이었다. 이 모임의 임원도 체포 목록에 있었다.
받은 은혜와 그에 대한 의무. 일본계 1세 세대의 인간관계를 지탱한 관념이다. 갚아야 할 빚으로 남고, 갚지 못하면 짐이 된다. 소설에서 세대 간에 말이 어긋나는 자리에 자주 이것이 있다.
부끄러움. 개인의 잘못이 가족 전체의 이름에 닿는다는 감각이다. 그래서 억울해도 말하지 않는 선택이 나온다 — 밖에서 보면 침묵이 자백처럼 보인다.
“어쩔 수 없다.” 수용소 시기를 견딘 세대가 가장 많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체념으로도, 존엄을 지키는 방식으로도 읽힌다. 이 말을 어떻게 읽느냐가 이 소설을 읽는 태도를 가른다.
사실은 기억이 아니라 문헌에서 확인해 적었다. 숫자와 날짜는 아래 출처를 대조한 것이다.
이 페이지의 사진은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받았고 전부 퍼블릭 도메인이거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다. 원본 파일명과 라이선스는 build/data/cedars/manifest.py에 그대로 적어 두었다.
David Guterson, Snow Falling on Cedars, Harcourt Brace, 1994. 한국어판 『삼나무에 내리는 눈』, 노혜숙 옮김, 피니스아프리카에, 2025.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 위해 만든 배경자료다. 스포일러를 넣지 않는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삼았다 — 줄거리·결말·인물의 운명은 한 줄도 없고, 재판도 절차만 설명했다. 그래도 새는 것이 보이면 알려 주면 좋겠다.
확인되지 않은 숫자에는 “약”을 붙였다. 붙어 있지 않은 숫자는 위 출처에서 대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