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
『종의 기원』
다윈이 자연선택으로 종이 바뀐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40년 뒤 유콘의 겨울 오두막에서 스물한 살의 잭 런던이 읽고 있던 책이 이것이다.

1897 · 클론다이크 · 유콘
1897년 여름, 금을 실은 배 두 척이 미국 서해안에 닿았다. 불황에 지친 사람들이 캐나다 북서쪽 끝 유콘으로 몰려갔다. 산을 넘고 얼어붙은 강을 따라 내려가야 닿는 곳이었고, 겨울에 그 길을 움직이는 것은 개썰매뿐이었다. 이 페이지는 그 세계의 배경 — 역사, 지리, 제도, 낯선 생활 — 만 모았다. 줄거리·결말은 없다.
이 소설을 따라가는 데 필요한 배경을 아홉 가지로 추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각 장에 있다.
1893년 공황 뒤 미국은 몇 년째 일자리가 없었다. 돈이 금에 묶여 있던 시대라 금이 모자라다는 것이 곧 불황의 얼굴이었다. 그때 금을 실은 배가 부두에 닿았고, 시애틀은 자기 도시가 「클론다이크로 가는 관문」이라고 전국에 광고했다. 그래서 떠난 사람은 10만, 금을 찾은 사람은 4,000이 안 된다.
금을 좇아온 사람들보다 먼저, 해안의 틀링잇이 고개 길을 쥐고 내륙과 교역했다. 처음 금을 찾은 세 사람 가운데 둘이 내륙의 타기시 사람이었다. 도슨이 들어선 자리는 한 사람들의 고기잡이 터였다.
클론다이크는 캐나다 유콘에 있다. 그런데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길목인 해안의 좁고 긴 땅은 미국 알래스카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국 항구에 내려 산을 넘어 캐나다로 들어갔다. 국경이 어디인지는 그때 두 나라가 다투고 있었다.
금광 도시로 식량이 들어오는 길은 여름의 강뿐이었다. 사람이 몰려든 첫 겨울 식량이 바닥나자, 캐나다 기마경찰은 국경에서 1년 치 식량을 확인하고서야 들여보냈다. 장비까지 합치면 1톤. 사람들은 그것을 수십 번 나눠 지고 고개를 넘었다.
도슨은 1896년에 거의 아무것도 없다가 1898년 여름 1만 6~7천 명의 도시가 됐다. 물건은 여름 뱃길로만 들어와서 값이 터무니없었다. 가게마다 저울을 두고 금가루를 달아 셈했다.
도슨의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26도, 기록된 최저는 영하 58도다. 그런데 이 시대 미국 책의 온도는 화씨(°F)다. 원문의 「영하 50도」는 섭씨로 영하 46도쯤이다. 무게는 파운드(0.45kg), 거리는 마일(1.6km)이다.
몰려온 사람 대부분이 미국인이었다. 캐나다는 미국이 금광 지대를 넘볼까 걱정해 북서기마경찰을 보냈다. 경찰은 고개 꼭대기에 초소를 세우고 관세를 걷고 짐을 검사했다. 고개 하나 아래 미국 쪽 항구는 사기꾼이 판치는 무법 도시였다.
말은 고개에서 떼로 죽었다. 겨울에 얼어붙은 강 위를 달려 우편과 식량과 사람을 나를 수 있는 것은 개썰매였다. 그래서 힘센 개는 드물고 비쌌다. 북쪽 토박이 썰매개만으로는 모자라 남쪽의 큰 개들이 실려 갔다. 당시 「허스키」는 품종 이름이 아니라 북쪽 썰매개를 두루 부르던 말이다.
숲속 좁은 길에서는 개를 한 줄로 맨다. 맨 앞(리드)과 맨 뒤(휠)는 하는 일이 다르고 이름이 따로 있다. 고삐가 없어서 사람은 구령으로 개를 부린다 — 출발 「머시!」, 오른쪽 「지!」, 왼쪽 「호!」.
1897년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해다. 같은 무렵 한반도에도 미국의 금광이 있었다. 1895년 미국인 사업가가 고종에게서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얻었고, 1897년 미국에서 세워진 회사가 이 권리를 사들여 1939년까지 금을 캤다. 금을 좇는 바람이 태평양 양쪽에서 함께 불던 때다.
유콘은 멀어 보이지만 서울에서 도슨까지는 직선으로 약 6,500km로, 서울에서 샌프란시스코(약 9,000km)보다 가깝다. 대신 훨씬 북쪽이다. 도슨은 북위 64도,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와 비슷한 위도다. 서울은 북위 37.6도, 한반도의 북쪽 끝도 43도쯤이다. 한반도에서 기록된 가장 낮은 기온은 1933년 1월 중강진의 영하 43.6도인데, 도슨에서는 그보다 추운 날이 드물지 않다.
원문은 화씨·파운드·마일로 쓰여 있다. 번역본이 숫자를 그대로 옮겼다면 「영하 50도」는 섭씨 영하 46도, 「100파운드」는 45kg, 「30마일」은 48km다. 06장 끝에 바꿔 읽는 표를 두었다. 그리고 한국에는 개썰매를 부리는 전통이 없어서 썰매 줄과 구령이 낯설 수 있다 — 09장에 정리했다.
왼쪽 목차에서 한 장(章)씩 골라 본다 — 한 번에 한 주제만 뜬다. 처음부터 다 읽을 필요는 없고, 장마다 맨 위의 요약 상자만 읽어도 된다. 개썰매가 처음이라면 08·09장을, 땅이 낯설다면 03장의 지도를 먼저 보면 좋다. 나머지는 읽다가 걸릴 때 펴 보면 된다.
검색창에 낱말을 넣으면 페이지 전체에서 그 대목만 뽑아 준다. “칠쿠트”, “휠 독”, “사워도” 같은 말이 걸렸을 때 쓰면 된다.
스포일러는 없다. 줄거리와 결말, 등장하는 사람과 개의 이름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영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1897년 여름 미국 서해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그리고 왜 그 소식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였나.
1893년 미국에 공황이 왔다. 1880년대에 철도에 돈이 몰려 철도가 지나치게 많이 깔렸고, 그 거품이 꺼졌다. 은행 500곳 이상이 문을 닫고 기업 1만 5천 곳이 쓰러졌다. 실업률은 높게 잡으면 전국에서 17~19%였고, 25%를 넘긴 주도 많았다.
당시 미국 돈은 금에 묶여 있었다. 지폐를 들고 가면 정부가 금으로 바꿔 주어야 했다. 불안해진 사람들이 앞다퉈 지폐를 금으로 바꾸자 정부 금고의 금이 법이 정한 하한까지 줄었다. 금이 모자라다는 것은 곧 돈이 모자라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땅에서 금이 쏟아진다」는 소식은 개인에게는 일확천금이고, 나라 전체에는 숨통이었다.
그 불황이 몇 해째 이어지던 1896년 8월, 캐나다 북서쪽 끝 유콘의 클론다이크 강 지류에서 금이 발견됐다. 그 겨울 북쪽은 바깥과 연락이 거의 끊겨 있었다. 소식이 크게 번진 것은 이듬해 여름, 금이 실물로 도착했을 때다.
1897년 7월 14일, 클론다이크에서 첫 겨울을 난 광부들을 태운 엑셀시어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닿았다. 사흘 뒤 포틀랜드호가 시애틀에 닿았다. 두 배가 실어 온 금은 당국 집계로 113만 9천 달러어치였다. 신문은 “한 톤의 금”이라고 썼다. 닷새 뒤인 7월 19일 클론다이크로 가는 첫 배가 떠났다.


북쪽으로 가는 사람은 모두 어딘가에서 배를 타고 1년 치 물건을 사야 했다. 그 장사를 두고 서해안 도시들이 다퉜다. 시애틀 상공회의소는 신문 기자 출신 에라스터스 브레이너드에게 홍보를 맡겼다. 그는 시애틀이 알래스카로 가는 단 하나의 관문이라고 전국 신문과 잡지에 퍼뜨렸다. 시애틀 쪽 집계로는 클론다이크로 가는 사람의 4분의 3이 시애틀의 가게와 부두를 거쳤다. 시애틀 시장 한 사람은 아예 시장직을 내놓고 클론다이크행 배를 띄우는 회사를 차렸다.
떠난 사람 약 10만. 실제로 클론다이크까지 간 사람 3~4만. 그중 금을 캐러 나선 사람 1만 5천~2만. 금을 찾은 사람 4,000명 이하, 부자가 된 사람은 몇백 명이다.
왜 이렇게 적었나. 금은 1896년에 발견됐고, 그 겨울 이미 근처에 있던 광부들이 좋은 개울을 다 신고해 버렸다. 바깥사람 대부분은 길이 얼어 1897년 안에 닿지 못하고 1898년에야 도착했다. 그래서 흔히 돈을 번 것은 금을 캔 사람보다 그들에게 물건을 판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 배표, 식량, 장비, 그리고 짐을 끌 짐승.


금을 좇아온 사람들보다 훨씬 먼저 그 길과 강을 알던 사람들이 있었다.

알래스카 남동쪽 해안의 사람들. 칠쿠트 고개 길은 원래 이들이 내륙 사람들과 교역하던 길이고, 이름부터 「칠쿠트 사람들의 길」이라는 뜻이다. 내륙의 모피와 해안의 물건을 사이에서 거래하는 것이 이들의 몫이어서, 다른 무리조차 마음대로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 미국 상인과 허드슨스베이 회사가 들어오며 이 독점이 약해졌고, 탐광꾼들이 이 길을 쓰게 됐다. 러시 때 짐꾼의 대부분이 틀링잇이었다.
고개 너머 호수 지방의 사람들. 1896년 8월 보난자 개울에서 금을 찾은 세 사람 가운데 둘, 스쿠컴 짐과 타기시 찰리가 타기시였다. 발견자로 신고된 것은 백인 조지 카맥이었다. 원주민의 신고를 당국이 받아 주지 않을까 봐 그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유콘 강과 클론다이크 강을 따라 사냥하고 고기를 잡던 사람들. 클론다이크 강과 유콘 강이 만나는 트로첵이 여름 고기잡이 터였다. 1896년 가을 광부들이 몰려들자 지도자 아이작 추장은 성공회 주교·기마경찰과 의논해, 이듬해 봄 몇 km 하류의 무스하이드로 마을을 옮겼다. 광부촌과 거리를 두어 사람들을 지키려는 선택이었다.



사람이 몰려오면 병도 같이 온다. 바깥에서 들어온 결핵 같은 병에 원주민은 면역이 없었다. 유콘 준주의 원주민 인구는 1901년 3,322명에서 1911년 1,489명으로, 10년 사이 절반 아래로 줄었다.
한 사람들의 후손인 트론덱 흐웨친 원주민 공동체는 지금 도슨 맞은편의 옛 고기잡이 터 트로첵을 관리한다. 트로첵은 캐나다 국가 사적이다. “클론다이크”라는 이름 자체가 이 강을 부르던 한 사람들의 말이 영어로 굳은 것이다. 원래 말 「트론덱」은 연어를 막는 어살의 말뚝을 박는 돌망치의 강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보이는 큰 지도에서 시작해, 해안을 따라 올라가 고개와 강까지 좁혀 간다.
클론다이크로 가는 길은 여럿이었다. 배로 베링해까지 돌아가 유콘 강을 거슬러 오르는 길, 캐나다 내륙 에드먼턴에서 숲을 뚫고 가는 길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서해안에서 출발하는 사람에게는 알래스카 남동쪽 해안의 린 운하(좁고 긴 피오르) 끝이 유콘 강의 시작점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였다. 거기서 산 하나만 넘으면 강의 맨 위쪽 호수에 닿는다. 가장 짧고 값싼 길이어서 가장 많은 사람이 이 길로 갔다.
문제는 그 바닷가가 미국 땅이라는 것이었다. 금광은 캐나다에 있는데 거기로 가는 문은 미국 항구였다. 캐나다는 자기 땅만 밟고 바다로 나가는 길을 원했고, 미국은 해안 전체가 알래스카라고 했다. 이 국경 다툼은 07장에서 다룬다.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넓은 골짜기. 19세기 말에는 끝없는 과수원이었다 — 자두·살구·체리. 지금은 실리콘밸리다. 도슨까지 직선으로 약 3,200km.
1897년 7월 금을 실은 포틀랜드호가 닿은 항구. 북쪽으로 가는 사람과 짐과 짐승이 여기서 배를 탔다. 01장.
배가 사람을 내려놓는 두 항구. 서로 몇 km 떨어져 있다. 04장.
해안산맥을 넘는 고개. 높이 1,067m. 꼭대기가 미국과 캐나다의 임시 국경이었다. 04·07장.
고개 너머의 긴 호수. 여기서 배를 띄우면 유콘 강으로 이어진다. 04장.
겨울에는 얼어서 길이 되는 강, 그리고 그 강가의 금광 도시. 05·06장.


배에서 내린 곳부터 강까지 — 사람과 짐이 어떻게, 왜 그렇게 넘어갔나.

클론다이크에 식량이 들어오는 길은 여름의 유콘 강뿐이었다. 10월에 강이 얼면 다음 해 6월까지 배가 끊긴다. 1897년 가을 강이 얼었을 때, 이미 몰려든 사람들이 그 겨울을 날 식량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기마경찰은 9월 30일부터 식량 없는 사람들을 하류의 알래스카 포트유콘으로 내려보냈다.
그래서 캐나다 당국은 유콘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1년 치 식량을 가져오게 했다. 식량만 약 520kg. 텐트와 연장과 옷까지 합치면 한 사람당 1톤 가까이 되었다. 철도 회사가 낸 권장 목록 기준으로 값은 140달러였다.
이걸 한 번에 옮길 수는 없다. 대부분 짐을 29kg짜리 꾸러미로 나누어 등에 지고, 몇 km 앞에 내려놓고, 돌아와서 다음 꾸러미를 졌다. 고개 하나를 넘는 데 30번쯤 오갔고, 걸은 거리를 합치면 4,000km가 넘었다. 무거운 썰매를 쓴 힘센 사람도 베넷 호수까지 90일쯤 걸렸다.
그러니 짐을 대신 지거나 끌어 줄 짐승은 무엇이든 금값이 되었다. 다이이에서는 형편없는 말도 700달러에 팔리거나 하루 40달러에 빌려 줬다.
다이이에서 출발하는 길이다. 전체 약 53km, 고개 높이는 1,067m. 원래 해안의 틀링잇 사람들이 내륙과 교역하던 길이었다(02장). 화이트 고개보다 높고 가팔랐지만 더 많은 사람이 택했다 — 골드러시 동안 약 2만 2천 명. 가장 곧바르고 돈이 덜 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다져진 옛길이었고, 짐을 져 줄 틀링잇 짐꾼도 있었다.
꼭대기 직전의 마지막 비탈을 “황금 계단”이라 불렀다. 눈과 얼음에 계단을 깎아 놓고, 짐을 진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한 칸씩 올라갔다. 그 아래 “저울”이라는 곳에서 짐을 다시 달았고, 짐꾼들은 여기서 값을 올려 불렀다. 뒤로 갈수록 1파운드(0.45kg)에 1달러까지 받았다. 나중에는 짐을 줄에 매달아 끌어올리는 삭도(케이블) 회사가 다섯 곳까지 생겼다.
1898년 4월 3일에는 눈사태가 이 길에서 60명 넘게 묻었다.




스캐그웨이에서 출발하는 길이다. 칠쿠트보다 낮아서 짐 실은 말을 끌고 넘을 수 있다고 광고했다. 실제로는 폭이 60cm밖에 안 되는 곳이 있었고, 넓은 곳은 날카로운 바위로 덮여 있었다. 그런 길에 무거운 짐을 진 말을 몰아넣었으니 말이 떼로 죽었다. 그래서 이 길은 “죽은 말의 길”이라 불렸다.
1897년 가을에는 사람과 말이 너무 많고 비가 계속 와서 길이 진창이 되었고, 결국 막혔다. 약 5,000명이 스캐그웨이에 발이 묶였다. 날이 추워져 땅이 얼고 나서야 다시 열렸다.
그래도 길게 보면 이긴 쪽은 스캐그웨이였다. 다이이 앞바다는 얕아서 큰 배가 밀물 때만 들어올 수 있었지만, 스캐그웨이에는 깊은 항구가 있었다. 1899년 2월 스캐그웨이에서 화이트 고개 꼭대기까지 철도가 놓였고, 1900년 화이트호스까지 이어졌다. 철도가 생기자 칠쿠트 길과 다이이는 금세 버려졌다.




두 길은 베넷 호수에서 만난다. 여기서부터 호수와 강이 이어져 도슨까지 물길이 열린다. 문제는 탈 배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호숫가 숲에서 나무를 베어 큰톱으로 켜서 판자를 만들고 배를 손수 지었다. 그리고 겨울 내내 기다렸다. 얼음이 풀려야 강을 따라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1898년 5월 얼음이 풀리자 크고 작은 배 7,124척이 한꺼번에 호수를 떠났다. 남은 물길은 약 800km였다.
도중에는 급류가 있었다. 마일스 협곡과 화이트호스 급류에서 배 여러 척이 부서지고 수백 명이 죽었다. 그래서 캐나다 기마경찰은 배를 하나하나 검사하고, 여자와 아이는 급류를 배로 건너지 못하게 하고, 급류에는 면허를 가진 뱃사공을 쓰게 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뱃사공 삯은 보통 25달러였다.




모든 길이 끝나는 곳. 이름만 나와도 어떤 곳인지 그려지게.
도슨은 1896년 금이 발견된 직후 세워졌다. 2년 만에 살롱과 오페라 극장과 댄스홀이 늘어선 도시가 되었다. 강가 땅 한 필지가 1만 달러, 앞길의 좋은 자리는 2만 달러까지 갔다.
물건값이 터무니없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바깥에서 물건이 들어오는 길은 여름 몇 달의 강뿐이고, 사람은 그 길로 실어 올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주머니에는 금이 있었다. 집 짓는 데 꼭 필요한 못이 1파운드(0.45kg)에 28달러, 버터 한 통이 5달러, 1898년 봄에는 달걀 하나가 3달러였다. 가장 운 좋은 광부들은 샴페인 한 병에 60달러를 썼다.
동시에 진흙과 불과 병의 도시였다. 여름이면 녹은 땅이 진창이 되었고, 위생이 나빴다. 집은 전부 나무로 지었고 겨울 내내 난로를 땠다. 1899년 4월 26일의 큰불은 번화가를 통째로 태웠다.






클론다이크의 금은 대부분 사금이다. 강바닥 자갈 속에 섞인 금 알갱이다. 문제는 그 자갈이 얼어 있다는 것이다. 북쪽의 땅은 여름에도 속이 녹지 않는 영구동토다.
그래서 불을 피워 땅을 녹이고, 녹은 만큼 파내고, 다시 불을 피웠다. 금을 걸러 내려면 흐르는 물이 필요한데, 겨울에는 물이 얼어 있다. 그래서 겨울에 파낸 흙은 쌓아 두었다가 여름이 되어 물이 흐를 때 걸렀다. 나중에는 땅속에 증기를 불어넣어 녹이는 방법이 나왔다. 가장 좋은 광구에서는 2년 동안 23만 달러어치의 금이 나왔다.





한반도에서 겪어 본 적 없는 추위가 얼마만 한지. 그리고 원문의 숫자를 섭씨로 바꿔 읽는 법.
바닷가는 바다가 겨울에도 열을 품고 있어서 덜 춥다. 도슨은 바다에서 수백 km 떨어진 내륙이고, 바다 쪽으로는 높은 해안산맥이 막고 있다. 게다가 북위 64도의 한겨울 해는 남쪽 산등성이 위로 잠깐 떴다가 진다. 낮에 데워지는 것보다 긴 밤에 식는 것이 훨씬 많다. 그래서 1월 평균이 영하 26도이고, 영하 40~50도까지 내려가는 날도 드물지 않다.
이 정도 추위에서는 맨살이 몇 분 만에도 언다. 온도계는 알코올로 채운 것을 썼다 — 수은은 영하 38.8도에서 얼어 버리기 때문이다.
계산하면 동짓날 도슨에 해가 떠 있는 시간은 4시간 10분쯤이다. 나머지는 어스름과 밤이다. 반대로 여름에는 해가 거의 지지 않아 하짓날 낮이 21시간이 넘는다. 서울은 동짓날 9시간 반, 하짓날 14시간 45분쯤이다.
겨울의 유콘 강은 단단히 얼어 평평한 길이 된다. 쓰러진 나무와 바위가 많은 숲길보다 빠르다. 봄이 오면 얼음이 한꺼번에 깨져 떠내려간다. 1898년에는 5월 29일이었다.
겨울 밤하늘에는 오로라가 자주 뜬다. 태양에서 날아온 입자가 대기와 부딪혀 내는 빛이다. 초록 커튼처럼 너울거린다. 극지방 가까이에서 잘 보이고, 한반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신선한 채소가 없는 겨울에는 비타민 C가 모자라 괴혈병이 흔했다. 잇몸이 붓고 이가 빠진다. 그리고 추위는 손가락·발가락·코끝부터 가져간다.


이 시대 미국 책은 온도를 화씨(°F), 무게를 파운드, 거리를 마일로 쓴다. 번역본이 숫자를 그대로 옮겼다면 아래처럼 바꿔 읽으면 된다.
| 화씨 | 섭씨 | 느낌 |
|---|---|---|
| 0°F | −18°C | 서울의 아주 추운 날 |
| −20°F | −29°C | 한반도 북부 산간의 가장 추운 날 |
| −40°F | −40°C | 수은이 얼기 직전 — 두 눈금이 같은 숫자 |
| −50°F | −46°C | 한반도 최저 기록(−43.6°C)보다 춥다 |
| −60°F | −51°C | 유콘의 혹한 |
| −70°F | −57°C | 도슨의 최저 기록(−58.3°C) 가까이 |
1파운드 = 0.45kg. 100파운드는 45kg쯤이다. 1마일 = 1.6km. 30마일은 48km, 1,000마일은 1,600km쯤이다. 1톤은 미국에서 보통 2,000파운드(약 907kg)를 가리킨다.
클론다이크는 캐나다 땅이다. 몰려온 사람 대부분은 미국인이었다.
북서기마경찰은 1873년에 만든 캐나다 연방 경찰대다. 캐나다가 허드슨스베이 회사에게서 서부의 넓은 땅을 넘겨받은 직후였다. 그 땅에서는 미국 위스키 상인들이 원주민에게 술을 팔며 분란이 잦았고, 1873년 사이프러스 힐스에서 아시니보인 사람 30명가량이 살해되는 사건이 났다. 무엇보다 총리는 미국인이 이 땅을 차지하면 떠나지 않고 미국 땅으로 만들 것을 두려워했다. 경찰은 질서를 세우는 동시에 「여기는 캐나다다」라고 보여 주는 존재였다.
유콘에서도 같은 걱정이 반복됐다. 1894년 금을 캐는 사람이 늘자 위스키 장사와 원주민 보호가 문제가 되었고, 1895년 경찰 20명이 포티마일에 자리 잡았다. 그때까지 광부들은 미국 서부식으로 「광부 회의」를 열어 자기들끼리 규칙을 정했고, 경찰과 부딪쳤다. 러시가 터지자 경찰은 1898년 288명으로 늘었다. 경찰 전체의 3분의 1쯤이다.
1867년 미국이 러시아에게서 알래스카를 사들인 뒤로, 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알래스카 남동쪽 꼬리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캐나다는 금광에서 바다로 나가는 자기 땅만의 길을 원했고, 그러려면 린 운하 끝의 스캐그웨이·다이이가 필요했다. 미국은 거기가 알래스카라고 했고, 국경을 더 안쪽인 베넷 호수까지로 보는 미국인도 있었다.
경찰은 다툼이 없는 곳에서는 유콘의 경계에, 다툼이 있는 곳에서는 지키기 쉬운 자리에 초소를 세웠다. 칠쿠트와 화이트 고개 꼭대기다. 두 나라는 이것을 마지못해 임시 국경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인이 가져온 물건에는 값의 평균 25%쯤 되는 관세가 붙었다. 국경 다툼은 1903년 10월 20일 국제 중재 재판에서 미국 쪽 주장대로 끝났다 — 캐나다는 바다로 나가는 길을 얻지 못했다.
같은 시기 미국 쪽 항구 스캐그웨이에는 이런 힘이 없었다. 사기꾼 “소피” 스미스 일당이 카드·주사위·야바위로 사람들을 털었고, 신문과 보안관 사무실까지 손에 쥐었다. 그는 1898년 7월 8일 부두의 총격전에서 죽었다.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질서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도슨의 질서는 1898년 부임한 경찰 지휘관 샘 스틸이 맡았다.


여름에는 유콘 강에 배가 다닌다. 겨울에는 강이 얼고 배가 끊긴다. 그 몇 달 동안 도슨이 바깥과 이어지는 길은 개썰매뿐이었다. 캐나다 정부는 공문을 나르는 배달꾼을, 우편 회사는 우편 썰매를 두었다. 얼어붙은 강을 따라 수백 km를 몇 주에 걸쳐 오갔다. 우편 썰매 한 대는 보통 개 8~10마리가 230~320kg의 우편을 끌었고, 1901년에는 유콘 강 전 구간을 따라 썰매 길이 나 있었다.
개썰매 출발 구령 “머시!”는 프랑스어 marche!에서 왔다. 17세기부터 캐나다 내륙의 모피 교역을 맡았던 프랑스계 뱃사공과 사냥꾼들이 개썰매를 부리며 쓰던 말이다.

1897년 북쪽에서 개는 가장 귀한 짐승이었다. 왜 그랬나.
04장에서 본 것처럼, 러시가 터지자 짐을 끌 짐승은 무엇이든 값이 치솟았다. 그런데 말은 북쪽의 겨울에 맞지 않았다. 고개에서 쓰러졌고, 깊은 눈에 빠졌다.
개는 달랐다. 북쪽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먹여 온 기름진 연어나 바다짐승 고기를 먹고, 추위를 견디는 털이 있다. 무엇보다 겨울이 길이었다. 여름에 배가 다니던 유콘 강이 겨울에는 단단히 얼어 수백 km짜리 평평한 길이 되는데, 그 위를 달리는 것이 개썰매였다. 개는 배와 기차와 말이 멈추는 조건에서도 우편을 날랐다. 탐광꾼, 덫사냥꾼, 의사, 우편, 장사, 화물 — 언 계절에 북쪽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 개가 끄는 썰매에 실렸다. 그래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북쪽에서는 「썰매개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래서 개가 모자랐다. 원래 북쪽에서 썰매를 끌던 토박이 개들로는 몰려든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었고, 남쪽에서 크고 힘센 개들이 실려 갔다. 북쪽 개와 남쪽 개가 한 썰매에 묶였다. 10장에서 그 개들을 정리했다.



개썰매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자를 위해 — 무엇이 어디에 있고, 왜 그렇게 매는지.
개를 썰매에 매는 방법은 크게 둘이다. 북극 해안의 트인 얼음 위에서는 개마다 따로 줄을 매어 부채꼴로 펼친다. 걸리는 것이 없으니 넓게 퍼져도 된다. 반면 유콘처럼 숲속 좁은 길을 가는 곳에서는 부채꼴로 펼치면 줄이 나무에 걸린다. 그래서 가운데 줄 하나에 개를 앞뒤로 한 줄로 매었다.
한 줄로 서면 자리마다 하는 일이 달라진다. 맨 앞의 개는 길을 찾고, 맨 뒤의 개는 썰매의 무게를 받는다. 그래서 자리에 이름이 붙었다.
| 자리 | 어디 | 하는 일 | 어떤 개가 서나 |
|---|---|---|---|
| 리드 lead dog · leader | 맨 앞 | 길을 찾고 속도를 정한다. 사람의 구령을 받아 방향을 튼다. 나머지는 이 개를 따라간다. | 영리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나쁜 길에서도 길을 찾아내는 개. 한 마리를 세우기도 하고 둘을 나란히 세우기도 한다. |
| 스윙 swing dog · point dog | 리드 바로 뒤 | 굽은 길에서 뒤따르는 줄 전체를 휘어 돌린다(swing). 리드가 튼 방향을 몸통에 전한다. | 리드를 잘 따르는 개. |
| 팀 team dog | 가운데 | 힘을 보탠다. 줄이 길수록 이 자리가 늘어난다. | 꾸준히 당기는 개. |
| 휠 wheel dog · wheeler | 맨 뒤, 썰매 바로 앞 | 썰매의 무게를 가장 직접 받는다. 모퉁이에서 썰매가 나무나 바위에 걸리지 않게 끌어낸다. | 크고 힘세고 침착한 개. 썰매가 갑자기 멈추거나 튈 때 가장 먼저 부딪힌다. |
고삐가 없으므로 말로 부린다. 말을 부리던 구령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많다.
출발. 프랑스어 marche!(걸어라)가 영어로 넘어오며 바뀐 말이다. 캐나다의 프랑스계 뱃사공과 모피 사냥꾼이 쓰던 구령이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멈춰. 말에게 쓰던 구령을 그대로 썼다.



바닥이 납작한 판이다. 무게가 넓게 퍼져 깊고 부드러운 눈에서도 가라앉지 않는다. 북미 원주민의 썰매에서 왔다.
짐칸이 두 개의 날 위에 떠 있다. 바닥이 덜 닿으니 다져진 길이나 강 얼음 위에서 빠르다. 뒤쪽에 사람이 잡고 서는 손잡이가 있다.



한 썰매에 다른 세계에서 온 개들이 묶였다. 어떤 개들이었나.
| 종류 | 어디서 | 어떤 개 | 1897년에 |
|---|---|---|---|
| 맬러뮤트 Alaskan Malamute | 알래스카 서북부 | 이누피아트의 한 갈래인 말레미우트 사람들이 기른 개. 무거운 짐을 끄는 힘센 썰매개다. | 골드러시 때 값이 치솟았고, 남쪽에서 들어온 개들과 많이 섞였다. |
| 이누이트 개 Canadian Eskimo Dog · qimmiq | 캐나다 북극 | 이누이트 말로 그냥 개(키미크)다. 수천 년 동안 이누이트와 함께 썰매를 끌었다. | 북극 해안의 개다. 유전적으로는 그린란드 개와 같은 품종으로 본다. |
| “허스키” husky | 북쪽 전역 | 특정 품종이 아니라 북쪽 썰매개를 두루 부르던 말이다. 두꺼운 털, 선 귀, 말린 꼬리. | 이 소설에서 “허스키”라고 부르는 개는 품종 이름이 아니라 이 뜻이다. |
| 시베리안 허스키 Siberian Husky | 시베리아 추크치 | 추크치 사람들이 기른 가볍고 빠른 썰매개. | 1908년에야 알래스카에 들어왔다. 소설의 시대(1897)에는 없다. |
| 세인트버나드 St. Bernard | 스위스 알프스 | 그랑생베르나르 고개의 수도원이 기른 크고 무거운 구조견. | 남쪽에서 북쪽으로 실려 온 큰 개의 대표. 힘이 세서 썰매에 쓰였다. |
| 뉴펀들랜드 Newfoundland | 캐나다 동쪽 섬 | 물갈퀴가 있는 크고 검은 개. 물에서 사람을 건지는 개로 이름났다. | 역시 남쪽에서 실려 온 큰 개. 추위를 견디는 털이 있다. |
| 스코치 셰퍼드 Scotch shepherd · collie | 스코틀랜드 | 양을 모는 목양견. 영리하고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다. | 추위보다는 들판의 일에 맞춘 개다. |






개는 늑대에서 갈라져 나왔다. 유전자로 보면 개의 조상과 지금의 늑대가 갈라진 것은 2만~4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가장 추웠던 무렵이다. 뼈로 확실히 개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1만 7천5백 년쯤 전의 것이다.
북극의 썰매개는 그중에서도 오래된 갈래다. 시베리아 북쪽 조호프섬에서 나온 9,500년 전의 개가 지금의 북극 썰매개들과 같은 계통이다. 그리고 썰매개들은 그 긴 시간 동안 늑대와 조금씩 피가 섞여 왔다는 흔적이 유전자에 남아 있다.
즉 1897년 유콘의 썰매 줄에는 수천 년 동안 추위 속에서 사람과 함께 일해 온 개와, 따뜻한 남쪽의 집과 농장에서 자란 개가 나란히 묶여 있었다. 둘 다 같은 조상에게서 나왔지만 걸어온 길이 달랐다.



이 소설을 쓴 사람은 그 고개를 직접 넘은 사람이다.


잭 런던은 187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집은 가난했고, 그는 어려서부터 통조림 공장에서 하루 18시간씩 일했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돈을 빌려 작은 배를 사고 샌프란시스코만의 굴 양식장을 터는 도둑이 되었다. 배가 부서지자 이번에는 그 도둑을 잡는 어업 순찰대에서 일했다.
1893년 열일곱 살에 물개잡이 범선을 타고 일본 앞바다까지 나갔다. 돌아와 보니 나라는 공황에 빠져 있었다(01장). 일자리를 찾아 떠돌던 끝에 그는 머리를 팔아 먹고살겠다고, 즉 공부해서 글로 살겠다고 마음먹는다.
오클랜드 부둣가의 술집 하이놀드 한구석에서 공부해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버클리 대학에 들어갔지만 오래 다니지 못했다. 그리고 1897년 여름, 스물한 살에 매형과 함께 클론다이크로 떠났다.


런던은 다이이에 내려 칠쿠트 고개를 넘었다. 한 번에 45kg 가까운 짐을 등에 지고 날랐다. 유콘 강을 내려가 스튜어트 강가에 광구를 신고했고, 도슨과 근처 겨울 야영지에서 겨울을 났다. 주요 썰매 길 옆이어서 썰매개를 날마다 보았다.
그 겨울 오두막에서 그가 읽은 책이 둘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과 밀턴의 『실낙원』이다.
봄이 되자 괴혈병으로 잇몸이 붓고 앞니 네 개가 빠졌다. 그는 동료들과 뗏목을 타고 유콘 강을 3,200km 내려가 하구까지 갔고, 배에서 일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금은 한 줌도 못 찾았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 “클론다이크에서 나는 나를 찾았다.”
도슨에서 런던은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에 목장을 가진 본드 형제와 알고 지냈다. 형제에게는 세인트버나드와 스코치 콜리가 섞인 개가 있었는데, 런던은 훗날 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개가 소설의 바탕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 개의 사진은 지금 예일 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풀 베는 일 같은 잡일로 살았다. 알래스카 이야기를 써 보겠다는 제안서를 신문사에 보냈더니 “알래스카에 대한 관심은 놀라울 만큼 식었다”는 답이 왔다.
몇 해 뒤 그는 사나운 개가 나오는 단편 「바타르」를 썼고, 그 짝이 될 개 이야기를 하나 더 쓰기 시작했다. 4,000단어짜리 단편으로 생각했는데 32,000단어가 되어서야 멈출 수 있었다. 그것이 『야성의 부름』이다. 1903년 잡지 연재 뒤 책으로 나왔고, 그 뒤로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다.
그는 사회주의자였고 노동자의 권리와 동물 복지를 주장했다. 같은 북쪽을 무대로 『흰 엄니』(1906)를 썼고, 『바다 늑대』와 『마틴 에덴』도 그의 대표작이다. 1905년 캘리포니아 글렌엘런에 큰 목장을 사서 거기 살다가, 1916년 11월 22일 마흔 살에 죽었다.


1900년 무렵 미국에서는 동물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크게 유행했고, 그 유행을 두고 대통령까지 끼어든 논쟁이 벌어졌다.
애나 슈얼. 말이 1인칭으로 제 일생을 이야기한다. 말을 학대하는 풍습을 고발하려고 쓴 책이다.
러디어드 키플링. 동물들이 말을 하고 법을 가진다. 우화에 가깝다. 런던이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책이다.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 실제로 관찰한 동물의 일생을 전기처럼 쓴다. 늑대 “로보” 이야기가 여기 있다.
19세기 말 미국은 빠르게 도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동시에 자연을 보러 가는 길이 열렸다. 1872년 옐로스톤을 시작으로 국립공원이 생겼고, 철도 회사는 자연 관광을 광고했다. 학교에서는 자연 공부(nature study)가 교과의 한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1901년의 한 서평은 「자연 공부가 교육 계획에서 두드러지게 되는 것은 이 시대 진보의 일부」라고 썼다. 자연에 대해 읽고 싶은 사람, 아이에게 읽히고 싶은 부모가 많아졌고, 동물이 주인공인 책이 그 수요를 채웠다.


1903년 3월 박물학자 존 버로스가 『애틀랜틱 먼슬리』에 「진짜 자연사와 가짜 자연사」라는 글을 실었다. 동물이 사람처럼 궁리하고 가르치고 슬퍼하는 이야기는 재미를 위해 자연을 지어낸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숲의 황색 언론」이라고 불렀다. 왜 문제였나 — 그런 책이 사실을 전하는 척하며 아이들 교실에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쟁은 4년을 끌었다. 박물학자이자 사냥꾼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7년 6월 잡지 인터뷰와 9월의 글 「네이처 페이커」에서 버로스 편을 들었다. 그는 그런 책을 아이들에게 자연사의 사실로 가르치는 것은 「분통 터질 일」이라고 했다. 루스벨트가 이름을 찍어 비판한 작가 가운데 잭 런던도 있었다. 9월의 글은 책임을 작가만이 아니라 출판사와 교육위원회에도 돌렸고, 공개 논쟁은 거기서 잦아들었다.
런던은 억울해했다. 그는 1908년 『콜리어스』에 실은 반박문 「다른 동물들」에서 이렇게 썼다 — 자기는 오히려 동물을 사람처럼 그리는 것에 항의하는 쪽이었고, 그래서 개에 대해 “그는 이런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했다”는 식의 문장을 몇 번이고 넣었다고. 개를 움직이는 것은 추상적인 추론이 아니라 본능과 감각과 감정, 그리고 단순한 추론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소설이 쓰인 1903년, 미국 사람들 머릿속에 떠돌던 생각들.


1859년 다윈은 종이 자연선택으로 바뀐다고 썼다. 살아남아 자손을 많이 남기는 형질이 대를 이어 쌓인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사람을 자연 바깥에 서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동물의 한 갈래로 돌려놓았다.
5년 뒤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이것을 한 줄로 줄였다. “적자생존.” 생물학에서 “적합하다”는 것은 환경에 맞아서 자손을 남긴다는 뜻이지 강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회로 옮겨지면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게 옳다”로 바뀌어 읽혔다. 왜 그렇게 잘 퍼졌나. 큰 부자와 큰 가난이 함께 생기던 산업화 시대에, 경쟁에서 이긴 사람과 나라는 이 말로 자기 자리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경쟁과 제국과 인종에 관한 온갖 주장이 이 말에 기댔다. 이것을 나중에 사회 다윈주의라 부른다.
문학에서는 자연주의가 일어났다. 프랑스의 에밀 졸라가 시작했고, 미국에서는 스티븐 크레인, 프랭크 노리스, 그리고 잭 런던이 이 흐름에 든다. 인물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주인공으로 그리지 않고, 유전과 환경과 본능이라는 힘이 그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하듯 쓴다. 과학이 사람을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문학으로 옮겨 온 것이다.
몇 세대 동안 보이지 않던 먼 조상의 형질이 불쑥 다시 나타나는 현상을 격세유전이라 한다. 라틴어 atavus(조상)에서 온 말이다. 유전자를 몰랐던 19세기에는 이 말로 형질이 왜 대를 건너 나타나는지를 설명했다.
이 생물학 용어는 훨씬 넓게 쓰였다. 1870년대 이탈리아 범죄학자 체사레 롬브로소는 범죄자를 「원시인의 형질이 되살아난 사람」으로 보고 몸의 생김새에서 그 표시를 찾으려 했다. 이 주장은 뒤에 과학에서 버려졌지만, 당시에는 문명은 얇은 껍질이고 그 아래에 원시가 있다는 생각을 과학처럼 들리게 했다.
1890년 미국 인구조사국은 「이제는 개척 정착선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발표했다. 3년 뒤 역사학자 프레더릭 잭슨 터너는 미국인의 성격을 만든 것이 서쪽으로 밀려가던 변경(프런티어)이었는데 그것이 끝났다고 주장했다. 동부의 도시와 공장과 사무실의 삶이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는 걱정이 퍼졌다.
1899년 4월 루스벨트는 시카고 연설 「분투하는 삶」에서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안락의 교리가 아니라 분투하는 삶의 교리를 전하고 싶다. 노고와 노력, 수고와 투쟁의 삶이다.」 편안함을 좇으면 사람도 나라도 쇠한다는 것이다. 거친 자연으로 나가야 사람이 제 힘을 되찾는다는 믿음, 사냥과 야영과 국립공원의 유행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2년 전의 클론다이크는 그런 미국인들에게 남은 마지막 변경처럼 보였다.

골드러시와 잭 런던, 그리고 다윈 이후의 생각. 같은 해 한반도의 일도 한 줄 넣었다.
1859
다윈이 자연선택으로 종이 바뀐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40년 뒤 유콘의 겨울 오두막에서 스물한 살의 잭 런던이 읽고 있던 책이 이것이다.

1864
허버트 스펜서가 『생물학 원리』에서 처음 쓴 표현이다. 다윈의 생물학을 읽고 자기의 사회·경제 이론에 겹쳐 놓은 말이었다. 이 말이 곧 사회에 그대로 옮겨져 쓰이기 시작한다.
1870 – 1890
미국의 탐광꾼들이 해안의 틀링잇·타기시 사람들과 거래해 칠쿠트 고개와 화이트 고개를 넘는 길을 텄다. 그 너머 유콘 강 유역에는 한(Hän)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876. 1. 12
샌프란시스코. 본명 존 그리피스 체니. 어머니가 그해 말 존 런던과 결혼하면서 성이 런던이 된다.
1890
미국 인구조사국이 「이제는 개척 정착선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발표했다. 서쪽으로 밀려가던 변경이 끝났다는 생각이 퍼지고, 도시의 삶이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는 걱정이 커졌다.
1893
미국에서 은행 500곳 이상, 기업 1만 5천 곳이 쓰러졌다. 실업률은 높게 잡으면 17~19%, 미시간에서는 43%까지 갔다. 4년 뒤 금 소식이 그토록 크게 번진 바탕이 이것이다. 같은 해 열일곱 살 런던은 물개잡이 범선을 타고 일본 앞바다까지 나갔다가, 돌아와서 공황에 빠진 오클랜드를 보았다.

1894
러디어드 키플링. 동물을 주인공으로 세운 이야기가 다시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런던은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1896. 8. 16
조지 카맥과 타기시 사람 스쿠컴 짐, 타기시 찰리가 클론다이크 강의 지류에서 금을 찾았다. 실제로 처음 찾은 사람은 짐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원주민의 발견 신고를 당국이 받아 주지 않을까 봐 카맥의 이름으로 신고했다.

1897. 7. 14 – 17
7월 14일 엑셀시어호가 샌프란시스코에, 사흘 뒤 포틀랜드호가 시애틀에 닿았다. 신문은 “한 톤의 금”이라고 썼다. 그 주에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1897. 7
스물한 살의 런던이 매형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났다. 다이이에 내려 칠쿠트 고개를 넘었다. 짐은 한 번에 45kg 가까이 등에 지고 날랐다.
1897. 9. 30
강이 얼면서 도슨에 그 겨울을 날 식량이 모자란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기마경찰은 이날부터 식량 없는 사람들을 하류의 알래스카 포트유콘으로 내려보냈다. 1년 치 식량 규칙이 생긴 이유다.
1897 가을
말이 떼로 죽어 나간 길이 진창이 되어 통행이 막혔다. 약 5,000명이 스캐그웨이에 발이 묶였다. 겨울 추위로 땅이 얼고 나서야 다시 열린다.
1897. 10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같은 해 미국에서 세워진 회사가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사들였다. 1895년 고종이 미국인에게 내준 권리였고, 이 회사는 1939년까지 금을 캤다.
1898. 4. 3
고개를 넘던 사람 60명 이상이 한꺼번에 묻혔다.
1898. 5. 29
유콘 강 얼음이 깨지자 베넷 호수에서 겨울 내내 만든 배 수천 척이 한꺼번에 강을 따라 내려갔다. 6월 8일 첫 배가 도슨에 닿는다.

1898 봄 – 여름
괴혈병으로 잇몸이 붓고 앞니 네 개를 잃었다. 동료들과 뗏목을 타고 유콘 강을 3,200km 내려가 하구의 세인트마이클까지 가서, 배에서 일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금은 찾지 못했다. 훗날 이렇게 말했다 — “클론다이크에서 나는 나를 찾았다.”
1898 여름
2년 전에는 한 사람들이 사냥하고 고기 잡던 터였던 자리다.
1899
2월 스캐그웨이에서 올라온 기차가 화이트 고개 꼭대기에 닿는다. 4월 26일 도슨 대화재. 그해 여름 알래스카 서쪽 놈에서 금이 나왔다는 소식에 8,000명이 도슨을 떠났다.
1902. 6
런던이 개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 「바타르」를 잡지 『코즈모폴리턴』에 팔았다. 사나운 개의 이야기다. 그 짝이 될 이야기를 하나 더 쓰기 시작한다.
1903. 3
박물학자 존 버로스가 『애틀랜틱 먼슬리』에 글을 실어, 동물을 사람처럼 그리는 인기 작가들을 공격했다. 4년을 가는 논쟁이 시작된다.
1903 여름
4,000단어짜리 단편으로 쓰려던 것이 32,000단어가 되었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가 750달러에 사서 다섯 번에 나눠 실었고, 같은 해 런던은 모든 권리를 맥밀런 출판사에 넘겼다. 7월에 나온 초판은 1달러 50센트였다. 이 책은 그 뒤로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다.

1903. 10. 20
알래스카 국경 분쟁의 국제 중재 판정이 미국 쪽 주장대로 났다. 스캐그웨이·다이이는 미국 땅으로 남았고, 캐나다는 금광에서 바다로 나가는 자기 땅만의 길을 얻지 못했다.
1907. 6 – 9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잡지 인터뷰와 9월의 글에서 버로스 편을 들었다. 그런 책을 아이들에게 자연사의 사실로 가르치는 것을 특히 문제 삼았다. 이름을 찍어 비판한 작가 가운데 런던도 있었다.

1908
런던이 『콜리어스』에 「다른 동물들」을 실었다. 자기는 개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했다”고 일부러 되풀이해 썼는데, 오히려 동물을 사람처럼 그린다는 쪽으로 묶였다는 것이다.
1908
시베리아 추크치 사람들의 썰매개가 처음으로 알래스카 놈에 들어왔다. 즉 골드러시 때의 “허스키”는 지금의 시베리안 허스키가 아니다.

1916. 11. 22
캘리포니아 글렌엘런의 자기 목장에서. 마흔 살이었다.
읽다 걸리는 낱말들. 위쪽 검색창에 넣어도 여기로 잡힌다.
캐나다 유콘 준주의 강 이름이자 그 일대 금광 지대. 원주민 한(Hän) 사람들의 말로 이 강을 부르던 이름이 영어로 굳었다. 도슨이 이 강과 유콘 강이 만나는 자리에 있다.
금 소식을 듣고 한꺼번에 몰려간 사람들. 가축 떼가 놀라서 우르르 내달리는 것(stampede)에서 온 말이다. “클론다이커”라고도 했다.
북쪽에 갓 온 사람, 풋내기. 태평양 연안 원주민의 교역어(치누크 자곤)에서 왔다. 요령 없이 남쪽의 상식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북쪽에서 겨울을 난 사람, 고참. 시큼하게 발효시킨 빵 반죽을 늘 품에 지니고 다닌 데서 왔다 — 효모를 구할 수 없으니 반죽 일부를 남겨 다음 빵의 씨로 썼다. 치차코의 반대말이다.
금을 캘 권리를 신고한 땅 한 구획. 말뚝을 박아 경계를 표시하고 관청에 등록한다. 처음 금을 찾은 사람의 구획을 “디스커버리 클레임”이라 한다.
강바닥의 모래와 자갈에 섞인 금 알갱이를 걸러 내는 일. 넓은 접시에 흙과 물을 담아 흔들면 무거운 금이 바닥에 남는다. 클론다이크의 금은 대부분 이런 사금이었다.
사금에서 걸러 낸 금 알갱이. 도슨에서는 이것이 곧 돈이었다 — 가게마다 저울을 두고 달아서 셈했다.
여름에도 녹지 않고 일 년 내내 얼어 있는 땅. 클론다이크에서는 불을 피우거나 증기를 넣어 땅을 녹여 가며 파 내려갔다.
다이이에서 베넷 호수로 넘어가는 산길의 고개. 길 전체가 약 53km이고, 꼭대기 직전의 가파른 눈 비탈을 “황금 계단”이라 불렀다. 골드러시 때 약 2만 2천 명이 이 고개를 넘었다.
스캐그웨이에서 베넷 호수로 넘어가는 다른 길. 칠쿠트보다 낮지만 길이 좁고 험해서 짐 싣던 말이 수없이 죽었다. 그래서 “죽은 말의 길”(Dead Horse Trail)이라 불렸다.
캐나다 유콘에서 알래스카를 가로질러 베링해로 흐르는 큰 강. 여름에는 뱃길이고, 겨울에는 얼어서 썰매 길이 된다.
북쪽 사람들이 미국 본토를 부르던 말. 따뜻하고 편한 곳, 북쪽의 규칙을 모르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시애틀에서 알래스카 남동쪽 스캐그웨이까지, 해안의 섬들과 본토 사이로 이어지는 뱃길. 1,600km가 넘는다. 섬이 바깥 바다의 파도를 막아 주어 물결이 잔잔하다.
캐나다의 행정구역 가운데 주(province)보다 자치 권한이 작은 곳. 유콘은 골드러시로 사람이 몰려 따로 다스릴 필요가 생기자 1898년 노스웨스트 준주에서 갈라져 준주가 되었다.
썰매 길을 따라 하루 거리마다 선 숙박소. 사람과 개가 먹고 자는 곳이다.
짐승이 못 닿게 기둥 위에 올려 지은 작은 창고. 식량과 장비를 넣어 둔다. 프랑스어 cacher(숨기다)에서 왔다.
개썰매를 모는 사람. 출발 구령 “머시!”에서 온 말이다. 개썰매 모는 일 전체를 머싱(mushing)이라 한다.
개가 몸에 차는 마구. 가슴과 어깨로 끄는 힘을 받아 줄로 전한다.
썰매와 개들을 잇는 가운데 줄. 개마다 하니스에서 나온 짧은 줄(트레이스)이 이 줄에 걸린다.
개의 하니스와 갱라인을 잇는 짧은 줄. 이 줄이 팽팽하면 그 개가 제 몫을 당기고 있다는 뜻이다.
바닥이 납작한 판으로 된 썰매. 깊고 부드러운 눈에서 가라앉지 않는다. 북미 원주민의 썰매에서 왔고 이름도 원주민 말이다.
무거운 짐을 싣는 긴 썰매. 짐칸이 날 위에 떠 있어 다져진 길에서 빠르다.
썰매 줄 맨 앞의 개. 길을 찾고 속도를 정한다. 09장 「개썰매 — 줄의 자리와 구령」에 자리 전체를 정리했다.
썰매 바로 앞의 개. 썰매의 무게를 가장 직접 받는다.
북쪽 썰매개를 두루 부르던 말. 품종 이름이 아니다. 지금 말하는 시베리안 허스키는 1908년에 알래스카에 들어왔다.
알래스카 서북부 말레미우트 사람들이 기른 힘센 썰매개.
알프스 그랑생베르나르 고개의 수도원이 기른 크고 무거운 구조견.
스코틀랜드 계통의 목양견. 콜리라고도 한다.
캐나다의 연방 경찰대. 1873년 서부 개척지를 다스리려 만들었고, 골드러시 때 유콘의 국경 고개를 지켰다. 지금의 캐나다 왕립기마경찰(RCMP)의 전신이다. 빨간 제복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의 공문과 우편을 개썰매로 나르던 사람. 겨울 유콘에서 소식이 오가는 길은 이것뿐이었다.
캐나다 퀘벡 지방의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 17세기부터 북미 내륙의 모피 교역을 맡은 뱃사공(부아야죄르)과 숲의 사냥꾼(쿠뢰르 데 부아)이 이들이었다. 개썰매 구령 “머시!”가 이들의 말 “마르슈!”에서 왔다.
북미 원주민의 부드러운 가죽 신. 눈 위에서 발을 따뜻하게 하고 소리를 덜 낸다.
말코손바닥사슴. 북쪽 숲에서 가장 큰 사슴이다. 어깨 높이가 사람 키를 넘는다.
비타민 C가 모자라 생기는 병. 잇몸이 붓고 피가 나며 이가 빠진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없는 북쪽의 겨울에 흔했다. 잭 런던도 이 병으로 클론다이크를 떠났다.
북쪽 하늘에 커튼처럼 너울거리는 빛. 태양에서 날아온 입자가 대기와 부딪혀 빛을 낸다. 북극광이라고도 한다.
미국에서 쓰는 온도 눈금. 물이 어는 점이 32°F, 끓는 점이 212°F다. 섭씨로는 (°F − 32) × 5/9. 영하 40도에서 두 눈금이 같아지고, 화씨 영하 50도는 섭씨 영하 46도쯤이다. 원문의 「below zero」는 화씨 0도 아래라는 뜻이다.
1파운드는 0.45kg, 1마일은 1.6km. 이 시대 미국 책의 무게와 거리는 모두 이 단위다.
허버트 스펜서가 1864년에 만든 말. 다윈은 나중에 이 말을 자기 책에 받아들였다. 생물학에서 “적합하다”는 것은 강하다가 아니라 환경에 맞아서 자손을 많이 남긴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회로 옮겨지면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로 바뀌어 읽혔다.
19세기 말의 문학 사조. 사람을 유전과 환경이 만든 존재로 보고, 그 힘이 인물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냉정하게 관찰하듯 쓴다. 에밀 졸라가 시작했고 미국에서는 프랭크 노리스·스티븐 크레인·잭 런던이 이 흐름에 든다.
여러 세대 동안 숨어 있던 먼 조상의 형질이 다시 나타나는 현상. 라틴어 atavus(조상)에서 왔다. 19세기 말에는 문명 아래에 원시가 잠들어 있다는 생각을 설명하는 말로 널리 쓰였다.
동물을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게 그려 자연을 왜곡한다고 비판받은 작가들. 1907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퍼뜨린 말이다.
원제 The Call of the Wild의 the wild는 형용사가 아니라 이름씨로,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곳 — 숲·황야·길들지 않은 자연 — 을 가리킨다. 글자대로는 “그런 곳이 부르는 소리”다. 한국어로는 둘로 옮긴다. 야생(野生)은 들에서 저절로 나고 자람, 또는 그런 곳과 그런 것 — 바깥의 장소에 가깝다. 야성(野性)은 길들지 않은 성질 — 몸 안의 본성을 가리킨다. 한국어판은 대부분 『야성의 부름』이고 『야생의 부름』으로 나온 판도 있다. 옛 번역에는 『야성의 부르짖음』, 『황야는 부른다』 같은 제목도 있었다. 모두 같은 책이다.
사실은 기억이 아니라 문헌에서 확인해 적었다.
사진과 그림은 위키미디어 공용에서 받았고 전부 퍼블릭 도메인이거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다. 원본 파일명은 build/data/callwild/manifest.py에 그대로 적어 두었다. 골드러시 사진 다수는 워싱턴 대학교 도서관(에릭 헤그, 에이시얼 커티스 촬영)과 캐나다 국립기록원 소장품이다.
Jack London, The Call of the Wild, Macmillan, 1903. 한국어판 『야성의 부름』, 권택영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 이 페이지의 색은 이 판의 표지에서 뽑았다 — 흰 짐승의 두 눈을 꽉 채운 사진과 주황 띠.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 위해 만든 배경자료다. 스포일러를 넣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원칙이다. 줄거리·결말을 쓰지 않았고, 사람과 개의 이름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썰매의 자리와 구령은 개썰매 일반의 역할과 뜻까지만 적었다. 영화는 언급하지 않았다.